HIFICLUB, High-end Internet

어느 해 연말로 기억되는데, 프랑스의 럭셔리 브랜드 ‘카르티에’가 프라임 타임 대에 꽤나 거창한 TV광고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필자의 느낌으로 최소 2분은 넘어 보이는 풀 라인업 이미지 광고 풍의 그 화려한 영상은 대한민국 소비자들의 관심이 어디로 가고 있는 지, 그리고 그게 보편적 현상이든 일부가 보여준 가능성이든 그 활용가치를 판단한 판매자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지를 제대로 시사해주었다. 음향기기 정기 간행물은 서서히 자취를 감춰가지만, 시계나 주얼리, 럭셔리 상품 전문지는 지속적으로 유지 혹은 확장되고 있어 보인다. 필자의 10대 시절만 해도 TV에서 음향기기 광고를, 시쳇말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라디오는 물론, 일반 월간지에도 음향기기에 대한 별책을 편성할 정도로 70~80년대 고급 소비재 시장에서 우선권을 갖는 카테고리였다. 필자의 뇌세포 어디엔가는 이들 매체가 곳곳에 뿌려놓은 이미지가 자리잡고 크고 작은 피드백을 걸어 오디오평론가의 단서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전문 프로모터의 부재인지, 산업자체의 위축문제인지 확인은 안되지만, 현상만으로 파악하기로는 확실히 소비의 주도권이 여성에게 넘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남녀 모두에게 팔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크게 기인하고 있어 보인다. 오디오 시장이 수입 자동차 시장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이런 배경이 있어 보이며, 그래서 반드시 대한민국 만의 현상은 아닌 듯 하다.

 

VTL의 실질적 플래그쉽인 ‘지그프리드’가 발매된 지도 벌써 10년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VTL 또한 어느덧 출범한 지 한 세대가 다 되어가는 이름이다. VTL이 월드클래스의 전문 투자사나 기타 상업적인 프로모션을 뒷받침하는 정책을 기조로 했었다고 가정해본다면 지그프리드와 같은 제품은 오디오파일들에게는 일종의 이상적인 지향점으로, 일반인들에게도 어디 높은 곳에 그런 게 있나 보다 싶은 관념적 대상이 되어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런 스펙과 내용, 그리고 모양새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이 자신들의 구매한도를 넘어서는 억대의 자동차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보가 많으면서도 음향기기에 대한 관심은 그보다 몇 단계 아래쪽에 있는 것은 상기한 문화적 현상이,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핏 이런 현상은 자동차는 생활의 카테고리이고, 오디오는 아니라는 메시지와도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상업적 정책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주도하는 부분일 따름이다. 그래서 지그프리트와 같은, 스펙과 외형에서 공히 ‘대규모’ 사이즈를 가진 진공관 앰프는 오디오 인더스트리, 제조사, 오디오파일 등의 각 부문에 따라 매우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데, 필자의 짐작이 맞다면 VTL은 상기 세 부문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율해서 만들어낸 한계점에 있는 제품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원래의 컨셉을 많이 깎아내지 않고 최대한 수용한 형태로 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지그프리드라는 제품의 컨셉은 등급과 무관하게도 ‘보편적인 사용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진공관 앰프’였다. 그것은 90년대 말에서 밀레니엄 초반에 걸친 시장의 요청, 그러니까 사용자 환경에 맞게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고, 영화와 음악을 함께 즐길 수 있으며, 진공관에 대한 편견 없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발된 제품이었다. 단지 VTL이라는 회사는 가정용 가전제품을 만들던 회사가 아니라 전문 녹음 스튜디오와 실제 현장 사운드의 품질을 재현하는 기준에 맞춰진 제품들을 제작하던 컨셉이 2대에 걸쳐 이어져 있다 보니, 디자인과 스펙에 제한을 두지 않고 설계해 온 제품의 사이즈나 디자인이 일반 오디오파일 등급의 제품들과 거리가 있었을 뿐이다. 지그프리드만 하더라도 사실은 특정 제품의 주니어 버전, 혹은 현실화 버전이라고 보는 게 맞다. 채널당 24개씩의 6550을 장착한 1,200와트급의 ‘보탄’을 현실적 스펙에 맞게 구현시킨 제품이었다. 지그프리드가 발매된 후, 자체로 오디오랙에 가까운 규모의 본 앰프는 과연 전설이 되어버렸다.

 

 

 
본 출력트랜스는 이전 버전에서 가장 많은 노력을 들여 성능을 향상시킨 부문이기도 하다. 신제품에는 또한, 제로 네거티브 피드백 설계된, 경로가 간소화하고 빨라진 풀밸런스 네거티브 피드백 루프 회로로 개선되어 있다. 본 루프 구성은 링잉(ringing) 현상을 완벽히 제거해서 위상 일치와 소스정보를 유지시키기 위한 커패시터 보정이 필요 없다. 이에 따라 최대 부하시에도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또 한 가지의 눈에 띄는 개선점으로서 댐핑팩터를 임의조정할 수 있도록 제작한 부분인데, 네거티브 피드백의 양을 변경해서 앰프의 출력 임피던스를 조절하는 방식이다. 댐핑 팩터의 로딩 양에 따라 LOW, MED, HI, MAX 의 4가지 모드로 작동이 가능하다. 문도르프의 실버 오일 커패시터를 사용해서 고역을 더 달콤하고 대역을 넓히고, 중역은 편하고 좀더 유연하게 흐르고 유지되도록, 그리고 스피커를 최적으로 드라이브할 수 있도록 향상시키기 위한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본 제품의 시청은 GLV 메인 시청실에서 윌슨 사샤, 메리디언 818, 메트로놈 C6 시그너춰, 메트로놈 칼리스타 레퍼런스 조합으로 진행했다. GLV 시청실은 하이파이와 AV를 공히 시청하기에 적합한 공간이라 생각된다. 이상적으로는 전작과의 AB테스트를 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제품의 사용자가 아닌 상황과 대략 2년 간의 시청 시간 차이를 기억과 기록에 의존해서 비교할 수 밖에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출시 시점이 다른 제품간의 비교에 있어서는 동시에 같은 자리에 모아놓지 않고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마침 이전의 시청은 윌슨의 맥스 3로 진행했었다. 여하튼 필자의 방식은 가능한 동일한 음원으로 시청을 함으로써 이런 상황을 최대한 극복하고자 하며 그 효과에 대해서는 꽤나 긍정적이다. 개인적으로 직접 작성한 메모와 리뷰를 다시 한 번 읽어보고, 몰입해서 시청했던 그 곡을 시청함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 재현하는 것은 성과가 있어왔다. 다만, 다른 시스템과의 조합의 문제가 남을 뿐이다.

 

본 제품은 기본적으로 전작이 갖는 기조가 흔들리지 않고 유지되어 있다. 무엇보다 낮은 대역에서도 뛰어난 해상도가 유지되는 점이 눈에 뜨이고, 친화적 표현이라고나 할까? 다이나믹스가 자연스럽고 시청자를 압도하려 하지 않는다. 깔끔하고 잘 정돈된 스테이징이 쉽고 명쾌하게 펼쳐지는데, 매칭 스피커인 윌슨의 사샤를 충분히 드라이브하고 있어 보인다. 사샤와 잘 어울리는 성향을 보인다고도 할 수 있고, 사샤의 가능성을 거의 다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중에서 ‘키에프의 문’은 실로 호쾌한 다이나믹스를 선사한다. 깨끗하고 정숙한 배경 위에 크고 작은 입자들을 매우 선명하게, 예리하면서도 자극 없는 윤곽으로 묘사한다.

 

이와 더불어 약음에서의 감수성 넘치는 프레이징은 시청자를 순간 당황스럽게 만들 만큼 인상적이다. 자세히 들어보면 주로 중역대에서의 호소력이 뛰어난 재생 특성이 주로 기여하는 부분인데, ‘TUTTI’테스트 중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9번 ‘스케르초’ 도입부의 현악 스타카토는 이후의 다이나믹스보다도 더 가치 있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매우 촘촘한 밀도와 탄력 있는 짧은 현악 피치는 뛰어난 호소력으로 어필한다. 메인테마는 아니지만, 이 부분을 이렇게 들려주는 조합은 많지 않다. 팀파니가 시작되면서 위력적이지만 깔끔한 슬램이 이 곡 특유의 다이나믹스를 열기 넘치게 표현해준다. 전술했듯이 이 조합 고유의 덕목으로서 낮은 대역에서의 울림이 선명하다. 저역에서의 단계별 그라데이션을 매우 정교하게 묘사해서 스테이징, 프레이징이 모두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중역과 더불어 고역의 끝으로 갈수록 울림에 심금을 울릴 만한 서정미가 담겨있다. 정명훈이 지휘하는 <미사탱고> 도입부는 상당히 도취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는 인상을 준다. 주로 매시브한 코러스와 반도네온의 중고역에서의 운행이 아련히 만들어내는 독특한 울림과 홀의 잔향이 기여하는 부분으로 보이는데, 재생 스타일이 하모닉스를 과장시키거나 하는 스타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감성적인 굴곡의 깊이를 편차가 큰 스트록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모닉스의 느낌은 듣기 좋은 지점을 정확히 계산하고 있는 듯 풀어줄 만큼만을 열어주며 소위 순간 순간 잘 피어나는 소리의 전형을 보여준다.

 

폴 아웃 보이의 ‘Thks Fr Th Mmrs’의 도입부 현악 인트로의 전율은 맥스 3에서보다 싱싱하다고나 할까? 스피디하고 박진감이 넘쳐 좀더 긴박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있어 보인다. 스테이징은 보다 정숙하고 정교하며 보컬은 좀더 조여진 포커싱으로 느껴진다. 워낙 이 곡이 이전의 시청에서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더 좋게 느껴질 부분이 있을까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스피디하고 좀더 싱그러운 사운드가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펑크록에서 소리의 노선이 다소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도 이채롭다.

 

헤레제헤가 지휘하는 바하의 'B단조 미사'는 그런 면에서 무대의 색채감을 잘 그려내주는 대표적인 곡이다. 질감까지도 느껴지는 듯 하다. ‘Cum Sancto Spiritu’를 들어보면, 이상적으로 통제되고 보관된 원 소스의 뚜껑을 열어서 보여주는 듯한 신선함이 있다. 마치 무대가 밝아오는 듯한 느낌으로 그라데이션을 이어가며 코러스가 생동감 넘치는 힘과 단원수를 늘여가는 장면이 매우 수월하고 자연스럽다.

 

음파들이 서로 다툰다거나 선명하지만 귀를 자극한다거나 하는 느낌을 주는 경우가 발견되지 않는다. 8성 푸가에서 각 파트별 위치의 분명한 대비와 울림의 이동을 그려내는 모습도 실제 현장에서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과 거의 차이가 없다. 전작에서도 그랬듯이 본 제품이 이 곡에서 갖는 최대 장기 중의 하나로서 ‘에어리한’ 공기의 움직임을 잘 포착하고 연출하고 있다.

 

 

조금 수선을 떨자면, 지그프리드 Ⅱ와 같은 제품은 오디오파일들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다 장르의 음악을 사운드적으로 각각의 특성에 맞게 표현해준다는 점에서 우선 그렇고, 구현 방식에 있어서 스피커를 드라이브하는 품질이 그러하다. 종종 이런 제품의 의미는, 진공관의 입장에서 해석해서, 진공관과 트랜지스터라는 양대 진영의 소자 특성을 고루 반영시킨 결과물로 파악해야 할 것으로 보이며, 시청자에게는 사실적이고 음악적 감성에 충실한 음향기기 본연의 모습이 된다. 특이 성향도 적은 편이면서도, 다른 제품이 대신할 수 없는 덕목들을 갖추고 있다.

 

특정 음원이 원래 어떤 소리로 들려야 하는 지를 알려주는 지표제품이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이런 제품을 ‘레퍼런스’라고 부른다. 여기에 더해 사용자 편의적인 설계와 음악성을 갖추고 있다. 실제로 이 제품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몇 곡 시청하다 보면 본 제품에 대한 ‘애착’이 생겨날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보기에 일반적인 오디오파일들에게 있어서 본 제품의 장벽은 가격과 사이즈가 될 것으로 보인다. 언제나 그렇지만, 스마트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음악성 넘치는 사운드를 눈앞에 놓고서는 오디오파일에게 불가능은 없어 보인다. 어쩌다라도 이 제품을 시청하게 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