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물론 나도 이런 음악에 흥미는 있지만, 이곳을 자주 방문한 것은 바로 오디오 때문이다. 특히, JBL의 커다란 모니터 스피커에서 나온 다채로운 음악은 단순히 듣는 것보다 보는 즐거움도 각별했다. 스피커는 이것으로 고정한 채 여러 앰프가 들락거렸는데, 바뀔 때마다 방문해서 듣는 즐거움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다 얼마 후, 아주 흥미로운 물건이 도착했다. 위 아래 폭이 얇고, 일체의 베이스, 트레블 조정 스위치가 없는 제품으로, 디자인 감각 자체가 무척 뛰어났다. 알고 보니 크렐에서 만든 제품이라고 한다. 아마 PAM-3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 작은 물건이 시스템 전체의 소리를 바꿔놨다. 한없이 투명하고, 디테일이 풍부하며, 감촉도 좋았다. 과연 이게 바로 크렐이구나 나뿐 아니라 주인장도 꽤나 놀랐다.

사실 하이엔드 업체에서 신제품을 발표한다고 하면, 더럭 겁부터 먹는 애호가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바로 가격표 때문이다. 어떤 내용이나 해명을 담아서라도 일단 가격은 올라간다. 하긴 똑같은 내용이라고 해도, 그 사이 물가가 오르고, 임금이 오르고, 각종 부품이며 자재비가 오르기 때문에 이는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내용은 똑같은데 껍데기만 바꾸고 가격을 올렸다고 분개하는 팬들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 내놓은 크렐의 제품들은 시대를 역행하고 있다. 오히려 가격을 내린 것이다. 그렇다고 이전 시리즈에 비해 품질이 떨어지냐 하면 절대 아니다. 숱한 고안과 노하우를 담으면서도 원가 절감의 요소들을 과감하게 도입해서, 되도록 많은 애호가들이 크렐을 접할 수 있게 선처한 것이다. 이 부분은 다른 메이커들도 한번 참고했으면 좋겠다. 이런 가격적인 미덕을 가진 만큼, 크렐의 새 시리즈에 거는 기대도 많다. 그 과정에서 소개된 두 종의 프리는 각각 일루션 1과 2로 명명되어 있으며, 이번에는 상급기인 1을 집중적으로 다루겠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싸고 질 좋은 음을 찾는다면 2도 꽤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원부 분리형이 아닌 대신에 내부에 DAC를 갖추고 있어서 다양한 디지털 입력을 받기 때문이다. 오로지 아날로그 음의 절대적 경지를 추구한 본 기보다 더 많은 시선을 받지 않을까 싶다. 

각설하고, 본 기는 철저한 아날로그 프리앰프다. 그런데 이 컨셉이 뭐 별다를 것도 없어 보이지만, 신제품중엔 이런 정공법으로 만든 프리가 의외로 귀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또 만든다고 해도 이렇게 전원부를 분리시키면 가격표가 한참 올라간다. 이래저래 본 기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이 많을 것같다.

일단 주요 내용은, 오디오부와 전원부를 철저히 구분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원부에서 발생하는 각종 전자기의 영향을 피했다는 점을 높게 치고 싶다. 사실 대부분의 프리에 들어가는 전원부는 보잘 것이 없다. 프리 자체가 요구하는 전기의 양이 많지도 않은 탓이다. 그런데 본 기에는 어지간한 인티 앰프쯤에 해당하는 290VA 급의 전원 트랜스에다 이전 에볼루션 시리즈의 e 파워에 채용된 기술 대부분을 이양했다. 또 프리라는 특성에 맞게 이를 최적화시켰다.

과연 프리에서 전원부가 해야할 일이 뭘까? 우선 양질의 전기를 공급해야 한다. 특히, AC에서 들어오는 불규칙한 전압의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하고, 내부에서 제대로 정류해서 최상의 퀄리티를 확보해야 한다.

또 하나의 역할이라면, 그때 그때 원하는 전류와 전압을 적절하게 공급해야 한다. 음성 신호의 변화에 따라 프리에서 요구하는 양도 바뀌기 때문에 여기에 신속하게 대응해야 한다. 거기에 좌우 채널을 완전히 분리해서 전원을 공급하고, 일체 신호 경로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작동을 하며, 별도의 케이스에 담아 실딩 처리에 만전을 기한 점 등은 높이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사실 전원부쪽이 좋으면, 오디오는 거저 먹는다고 해야 할까? 여러모로 음질상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쪽에도 상당한 기술적 성과가 투입되어 있다.

우선 입력단을 보면 SMT(Surface Mount Topology)를 이용해서, 최단의 신호 경로를 유지함과 동시에 리니어리티를 대폭 높이는 결과를 얻고 있다. 또 무려 1.5MHz에 달하는 광대역을 커버하면서도 노이즈 플로워가 거의 없다는 점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여기에 일체의 네거티브 피드백을 제거한 제로 피드백의 실현, 풀 밸런스 회로, CAST 전송의 투입 등, 크렐이 지속적으로 추구해온 기술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한편 옵션으로 별도의 크로스오버를 장착할 수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그 경우 서브우퍼를 연결할 수 있는 바, 기존의 스피커와 연동해서 보다 풍부한 저역과 다이내믹스를 확보할 수 있다. 특히, 40, 55, 75, 100Hz 등 네 가지 선택 사항이 있어서 기존의 스피커에 맞게 조절할 수 있는 점은 소비자 친화적인 조치라 하겠다. 

1980년에 창업해서 지속적인 기술 개발로 신제품 발표로 하이엔드 오디오계의 터줏대감이 되어온 크렐에서 새롭게 발표한 플래그쉽 프리앰프란 점에서 본 기가 갖는 화제성이 남다를 것이라 하겠다. 물론 중요한 것은 음질이고, 그 대목에서 역시 큰 만족감을 선사하고 있다.

본 기의 시청을 위해 파워는 함께 발매된 솔로 575이고, 스피커는 YG 어쿠스틱의 소냐 1.2 그리고 소스기는 동사의 사이퍼를 사용했다. 참고로 시청 트랙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말러 : 교향곡 2번 '부활'-정명훈 지휘
Mahler : Symphony No.2 'Resurrection' - Myung-Whun Chung

확실히 대형기 시스템에서 본기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첫곡으로 들은 말러를 보자. 우리가 흔히 말러를 들을 때 기대하는 사이즈나 스케일이 거대하게 출몰한다. 그럼에도 뭔가 여유가 느껴진다. 초반에 출몰하는 첼로군의 육중한 돌진, 서서히 기지개를 켜는 관악기의 움직임, 점차 음량이 높아질 때의 자연스러움 ... 광대역한 음이 빠르고, 정교하며, 일체 흐트러짐이 없이 펼쳐진다. 거기에 풍부한 음악성을 갖춘 크렐만의 음색이라니. 아직도 프리는 아날로그 방식이 우월하다는 뜻일까?

이어서 슈베르트를 들어본다. 이 전설적인 연주에서 놀란 것은, 그간 심하게 들렸던 테이프 노이즈가 상당히 감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첼로와 피아노 음이 더욱 선명하고 싱싱하게 부각된다. 마치 낡은 녹음을 새롭게 리마스터링해 요즘 녹음처럼 개량한 듯한 인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음이 명료해지면서, 더욱 음악의 표정이 풍부하게 다가온다. 특히 천의무봉, 신의 손길로 쓰다듬는 첼로 현의 세세한 마찰음은 극도의 세밀함으로 표현된다. 어떻게 이런 경지가 가능할까? 

카리 브렘네스의 노래는 그간 오디오파일용으로 자주 쓰였는데, 여기서 그 진가를 새롭게 발휘한다. 어쿠스틱 기타를 보면 확 공간을 치고 나올 만큼 팽팽하고, 단호하며, 더블 베이스의 움직임이 분명하면서 어택감이 있다. 오른편의 피아노도 충분히 낭랑하고 매혹적인 음색으로 보컬을 돕는다. 주역인 카리의 음성은, 그 특유의 애수가 깃든 음색이 한껏 정취를 더하고, 한숨 소리나 침 삼키는 소리 등 디테일이 더해져 강한 실재감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침투력이 강한 재생은 처음이어서, 새삼 이 소프트의 장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오스카 피터슨. 초반에 오른쪽 채널을 가득 채우는 깊은 더블 베이스의 울림. 자연스럽게 밑으로 뻗으면서 양감 또한 적절하다. 이어서 손가락으로 튕기면서 흥얼거리는 연주자의 모습이 무척 사실적이다. 브러쉬로 긁는 스네어의 찰진 음향이나 라이드 심벌의 화려한 질주 그리고 중앙에 위치한 피아노의 유머 가득한 타건까지 세 명의 연주자가 어떤 기분으로 악기를 만지는지 그 감성이 또렷이 전달된다. 디테일, 해상력, 공간감 등 양질의 프리가 갖는 미덕이 골고루 갖춰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