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사족 딱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이 오디오랙을 시청하고 귀가하는 동안 안도현의 시'너에게 묻는다'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사용중인 오디오기기에 대한 대접이 '한번이라도 뜨거운' 적도 없었으면서 이들을 구박하고 내치려하고 '발로 찬'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자괴심이었습니다.

 

알테사니아 오디오(Artesania Audio)는 음향엔지니어이자 오디오파일인 호세 루이스 라파르가(Jose Luis Lafarga)가 20년 전 스페인 아라곤에 설립한 오디오랙과 액세서리 전문회사입니다. 자칭 ‘하이엔드 랙 컴퍼니’(High End Rack Company)입니다. 이 회사의 핵심기술이 음향 공명제어 기술(Acoustic Anti-Resonant Treatment)이고, 이 기술이 찬연히 꽃피운 게 이번 시청 오디오랙인 엑소테릭 랙(Exoteryc Rack)입니다. 

‘음향 공명제어 기술’의 핵심은 오디오기기에 올려놓은 모든 오디오기기들을 외부의 모든 진동으로부터 ‘격리’(isolation)시킨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부의 진동’은 스피커로부터 쏟아져나오는 공기 압력으로 인한 1차 진동, 바닥으로부터 기어올라오는 2차 진동, 그리고 오디오기기와 오디오랙 자체의 진동입니다. 사실 이 진동의 폐해를 얼마나 인식하고 대처하고 있는지가 오디오파일들의 내공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기도 합니다. 

우선 외양부터 봅니다. 복잡합니다. 한눈에 잘 안들어옵니다. 보통 봐왔던 오디오랙이 철재와 나무로 구성된 것에 비하면 이 엑소테릭 랙은 거의 공업용 로봇 수준입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메탈릭한 메카니즘의 미학을 풍기고 있어 '사내들의 로망'을 자극합니다. 좀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오디오기기를 위에서 잡아매달고 있는 구조입니다. 4개 기둥을 흔들어보면 꿈쩍도 안하지만 선반을 흔들어보면 그네처럼 어느 정도 움직이는 이유입니다.

알테사니아 오디오의 홈페이지 설명을 참조해서 엑소테릭 랙의 구조를 바닥부터 찬찬히 들여다보겠습니다. 시청한 모델은 3단 랙 위에 유리로 만든 턴테이블 플랫폼이 놓여있는 모델입니다. 총중량은 50kg, 지탱할 수 있는 오디오기기 무게는 170kg이라고 합니다. 높이는 73cm, 폭은 52.5cm, 안길이는 67cm(외부 기둥 간격), 55cm(내부 지지대 간격)입니다. 

바닥 스파이크와 스파이크 받침대 = 스틸 스파이크와 아이솔레이션 디스크(스테인레스 스틸)로 구성. 바닥으로부터 전달되는 진동을 차단하고 공진을 제거. 

 

4개 기둥 = 직경 60mm 관 모양의 메탈 구조물. 관 내부가 질량이 다른 탄성중합체(elastomer. 고무와 같은 성질을 가진 물질)로 구성돼 진동 흡수 및 제거. 

 

상단 스파이크 = 기둥에 붙어있는 도툼한 원기둥 모양(직경 38mm)의 하얀색 테플론 실린더 위에 설치. 이 상단 스파이크에 연결된 선반이 그네처럼 랙에 수납되는 모든 오디오기기를 끌어당기고 있는 구조. 

 

4개 내부 서스펜디드 지지대 = 상단 선반으로부터 수직으로 연결돼 랙의 각 선반을 지지. 구조적으로 4개 기둥과 격리 상태.

 

기기 밑 스파이크와 아이솔레이션 디스크 = 선반 위의 오디오기기를 지지. 원추모양의 아이솔레이션 디스크의 경우 검정 베이스는 네오프렌 재질로 사운드를 흡수하거나 댐프하는 효과. 디스크 재질은 테플론. 

댐퍼 = 오디오기기 위에 놓는 원반 모양의 안티 마그네틱 댐퍼. 무게 2.4kg

 

턴테이블 플랫폼 = 샌드위치 구조의 압축유리와 스테인레스 스틸로 구성. 4개 기둥 위의 원뿔모양 지지대에 스파이크로 지지

 

 

 

엑소테릭 랙 시청은 당연히 비교시청으로 진행했습니다. A. 프리와 파워 앰프를 바닥에 놓았을 때, B. 이 앰프를 엑소테릭 랙에 올려놓을 때. 소스기와 DAC은 처음부터 엑소테릭 랙에 올려놓은 상태입니다. 볼륨, 스피커 간격, 청취위치 등 모든 조건은 A와 B가 동일했습니다. 시청 오디오 기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실 이 비싼 비올라 앰프들을 청음실 바닥에 그냥 놓는 것은 예의가 아닐테지만 '비청'을 위해 감행했습니다. 비올라 크레센도는 입력임피던스 40k옴(밸런스), 출력임피던스 100옴, 최대출력 14.6V(밸런스), 주파수응답 20Hz~20kHz(0.2dB), 비올라 콘체르토는 클래스AB 푸쉬풀 방식으로 8옴에 100W, 4옴에 200W, 주파수응답은 10Hz~20kHz(0.2dB) 스펙입니다. DAC, 프리, 파워는 모두 밸런스 연결입니다. 

 

Jenifer Warnes - Way Down Deep

 

 

 

맨 밑 선반에 비올라 콘체르토, 그 위 선반에 비올라 크레센도를 올려놓고 크레센도 위에는 댐퍼를 올렸습니다. 이 것 말고는 다른 조건은 A 때와 동일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공부 다시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실력기일수록 제 대접을 해줘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엑소테릭 랙이 무슨 마술사도 아니고 기기가 낼 수 없는 소리까지 내주는 게 절대 아닙니다. 100만원짜리 기기에선 100만원짜리, 1000만원짜리 기기에선 1000만원짜리 소리를 들려주는 겁니다. 이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금까지는 100만원짜리에서 50만원짜리, 1000만원짜리에서 500만원짜리 소리밖에 못들었던 겁니다. 지금까지 들었던 소리는 다 '거짓부렁이', 열화된 소리였던 겁니다. 

 

'Way Down Deep'이 나오는 순간 그냥 알겠습니다. 사운드에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정갈합니다. 목소리에는 윤기가 흐르고, 저역은 단정하면서도 울림이 대폭 상승했습니다. 메모에 '위화살표'를 3개나 그렸습니다. 메모하는 손이 바빠집니다. 보컬은 촉촉하고, 입자감은 고급스러워졌으며 현장감은 더욱 생생해졌습니다. 스피커가 놀란 듯합니다. “무슨 일 있었어?” 이 모든 변화는 엑소테릭 랙 위에 앰프를 올려놓은 이후 저역이 단단해졌기 때문입니다. 바닥으로부터 기어올라오려는 그 기분 나쁜 진동을 이 랙이 발로 뻥 차버린 그런 느낌입니다. 

 

'스코틀랜드 교향곡' 1악장을 듣자마자 이렇게 메모했습니다. '암, 이래야지.' 전망이 확 트이는 느낌입니다. SN비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습니다. 마침내 오케스트라 금관악기들의 찬란한 빛깔이 보입니다. 단원들이 아까와는 달리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듯 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단원들이 정신을 차리고 페터 막과 일심단결해 음들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멘델스존이 이 곡에서 주문한 'Allegro Un Poco Agitato'(빠르고 약간 격렬하게)가 제대로 느껴집니다. 그렇게 제 몸이 반응을 합니다.  

 

'스코틀랜드 교향곡' 1악장의 변화가 워낙 두드러져 조금 더 기술하겠습니다. 랙 비청 이후 올라간 것은 다이나믹스와 피아니시모입니다. 그리고 이 곡 특유의 향기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왜 있잖습니까. 새로 산 맥북을 펼칠 때 나는 그 특유의 상쾌한 향기 말입니다. 전체적으로 음악이 유연하고 부드럽게 그리고 물흐르듯이 나옵니다. 하도 신기해서 청음실 소파에서 일어나 파워앰프가 놓여있는 선반을 흔들어봅니다. 공중부양된 탓이라 약간 흔들거립니다. 맞습니다. 비올라 프리, 파워는 이 랙에 올라타는 순간 제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겁니다. 혼란스럽습니다. 과연, 오디오가 구사하는 사운드라는 것은 어디까지가 자신의 영역일까요. 이 오디오랙을 만나기 전 비올라 앰프들은 진정 비올라 크렌센도였고 콘체르토였던 걸까요. 

 

엑소테릭 랙에 올려놓기 전에도 좋았던 'You Look Good To Me'는 베이스는 소리가 더 커졌고 피아노 타건에는 더 힘이 실렸습니다. 역시 감동은 상대적인 겁니다. 아까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좋습니다. 비올라 크레센도와 콘체르토가 비로소 완전체가 된 느낌입니다. 흥취가 살아나고 리듬&페이스가 활개를 칩니다. 뭐에 단단히 홀린 듯합니다. 

 

나탄 밀스타인의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 2번' 1악장에서는 정신이 버쩍 들 정도로 윤기가 흐릅니다. 바이올린이 참으로 여러 소리를 내는 악기구나,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그냥 음악에 빠져듭니다. 2악장에서는 프리앰프 위에 올려놓았던 댐퍼를 빼봤습니다. 순간 음들이 물러집니다. 맥이 좀 풀린 듯합니다. 다시 올려놓으니 바이올린의 흐느낌이 더 진하게 다가옵니다. 3악장은 아까보다 스테이지의 앞뒤 두께가 늘어났습니다. 

 

웅산 - Fall In Love

웅산의 '미소를 띄우며 너를 보낸 그 모습처럼'을 플레이하는 순간, 그녀가 아무런 기척도 없이 청음실에 등장합니다. 가운데서 저에게 직접 노래를 불러줍니다. 약간은 마른 듯한 웅산의 음색이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실려 감미롭기 짝이 없습니다. 

Kenny Drew Trio - Golden Earing

케니 드류 트리오의 'Golden Earing'은 베이스가 발군입니다.

중간에 조를 바꾸는 피아노의 움직임도 선연합니다. 역시 이 곡의 주인공은 케니 드류의 피아노입니다. 청음실을 꽉 채우는 이 음들의 습격! 동시에 제 앞으로 어느새 슬쩍 다가온 무대의 출격! 

O-zone Percussion Group - La Bamba

오존 퍼커션 그룹의 'Jazz Variants'는 퍼커션들이 청음실을 제 안방인 것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곡 중간 음들이 갑자기 사라진 순간에는 마치 장시간 비행을 마치고 비행기가 하강을 할 때처럼 귀가 먹먹해집니다. 

 

 

 

낯간지러운 결론이지만 그래도 어쩝니까. 솔직하게 제 생각을 토로해봅니다. 진동의 폐해란 게 이 정도였구나,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들어본 수많은 앰프들은 진짜 제 실력을 보여준 게 아니었구나, 입니다. 맞습니다. 저는 그 앰프들의 맨얼굴을 단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몹시 미안하고 아쉽고 혼란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