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여기서 잠깐 디자인에 대해 넘어가자. 참, 호불호가 갈린다. 그러나 메이커측의 설명을 들으면 나름 일리가 있다. 일단 프런트 패널 가운데 부분이 볼록 앞으로 돌출되어 있다. 크렐은 이것을 “센터 캡”(center cap)이라 부른다. 무슨 드라이버에 관련된 용어라 흥미롭기는 하다.

한편 센터 캡 하단에 단단히 각인된 크렐 마크가 있다. 이것은 손으로 만져보면 상당한 존재감을 전달해준다. 그래, 내가 크렐을 소유하고 있구나, 하는 감을 확실히 받을 수 있다. 어딘지 모르게 구식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세련된 맛도 있다. 신구의 적절한 밸런스로 만들어진 디자인임에는 분명하다. 이번에 크렐은 프리에 관한 한 두 종을 내놨다. 각각 일루션 및 일루션 2다. 이미 일루션에 대해선 리뷰도 있고, 전모도 어느 정도 밝혀진 상태다. 특히, 투 박스로 구성되어 전원부를 별도로 설계했다거나, 무려 290VA급의 전원 트랜스가 투입되는 등, 물량 공세란 측면에서 일루션이 갖는 위치는 무척 독특하다. 과연 크렐의 플래그쉽다운 면모다.

그런데 동시에 발표된 일루션 2는 좀 내용이 다르다. 우선 다기능이 눈에 띠고, 디지털 입력도 가능하다. 심지어 해드폰 단자도 있다. 왜 그럴까? 크렐은 두 제품이 목표로 하는 타깃을 전혀 다르게 보고 있다. 일루션의 경우, 심각한 오디오파일, 그것도 최상의 아날로그 방식의 프리를 원하는 분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여기에 일체의 타협이나, 어중간한 퀄리티는 있을 수 없다. 무조건 최고의 퍼포먼스를 선사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물량 투입이 이뤄진 것이다. 반면 일루션 2는, 보다 디지털쪽으로 관심이 있고, 해드폰과 같은 매체에 친화적인 분들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기능만 넣은 것은 아니다. 핵심이 되는 프리부는 상급기의 설계 사상을 그대로 가져왔다. 그러면서 이런 여러 기능을 아우르는 것이다. 아마 본 기의 내용을 차근차근 읽다보면 구매 의욕이 상당히 솟구치지 않을까 싶다.

참 절묘한 포지셔닝이라고 본다. 구매자의 심리를 정확히 궤뚫어본 것이다. 사실 제대로 된 아날로그 프리를 원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최상의 물량 투입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만족한다. 반면 실속파들은 덜렁 프리만 사고 싶지 않다. 최소한 DAC 정도는 붙여줘야 한다. 그런 여러 욕구를 담아낸 라인업인 것이다. 일단 본 기는 크게 3가지 기능을 제공한다. 전통적인 아날로그 프리앰프다. 그래서 총 다섯 개의 아날로그 인풋을 제공하는 바, XLR이 두 개, RCA가 세 개다. 아마 이 정도면 어지간한 아날로그 소스는 다 커버하지 않을까 싶다.

둘째는 DAC다. 여기엔 총 다섯 개의 입력단이 있다. XLR 단자를 통한 AES/EBU가 하나 제공되고, RCA 단을 통한 코액셜이 두 개 있으며, 마지막으로 토스링크를 통한 옵티컬이 두 개 있다. 말하자면 어지간한 디지털 입력은 모두 제공되는 것이다. 단 여기서 선은 확실히 긋고 있다. USB라던가 네트웍 플레이어 기능 등은 삼간다. 만일 이런 것까지 집어넣었다간, 한도 끝도 없는 R&D가 투입되고, 단가도 오를 수밖에 없다. 기왕에 갖고 있는 기술력을 집대성해서 이런 식으로 처리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하긴 그 밖의 기능이 필요하다면 단품으로 사면 되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해드폰 단자다. 이것은 진짜로 대충 만들지 않았다. “이런 컨셉은 우리에게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KPS 25SC를 한번 보죠. 여기엔 프리뿐 아니라 CDT, DAC 등을 모두 담았습니다. 그리고 최상의 퍼포먼스를 연출했습니다. 일루션 2는 그런 전통의 연장선상에 있답니다.” 맞는 말이다. 당시 KPS 25SC의 높은 가격과 지금까지 이어지는 꾸준한 사랑을 감안할 때, 본 기의 출현은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아무래도 집중적으로 다룰 것은 바로 프리앰프에 관한 것이다. 하긴, 우리가 본 기의 구매를 고려할 때 DAC나 해드폰 앰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아날로그 프리로서의 성능이 최우선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완전한 좌우 독립의, 그러니까 듀얼 모노럴 구성이 눈에 띤다. 이것은 서킷뿐 아니라 전원부까지 각각 독립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밸런스 회로로 구성된 만큼, 그 안정성이나 음질에 대해선 충분한 믿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이런 물량 투입이 잘못하면 제품 자체를 비대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SMT (Surface Mount Technology)를 투입해서, 부품 자체의 사이즈와 신호 경로를 줄이는, 최신 기술이 아낌없이 도입되고 있다. 또 이 회로의 루프 전체의 리니어리티를 올리기 위해 전류 자체의 아웃풋을 다중화함으로써, 극대화시키고 있다. 상당히 복잡한 기술적 내용이라 쉽게 설명하기 힘든데, 대략 일반 앰프에 비해 500배 정도의 리니어리티를 확보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제로 피드백 기술을 추구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사실 피드백이라는 것은 일종의 필요악이고, 그래서 어느 정도는 흘려줘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그에 따른 음성 신호의 순수성이 훼손되는 것은 크렐에서 용납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일체의 피드백이 없는 회로를 실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 기의 왜곡률은 무려 0.003% 이하로 떨어진다. 경이로운 스펙이라 해도 좋다. 

프리에서 제일 중요한 항목이 볼륨단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여기서 동사는 저항을 이용한 방식을 도입하되, 완전한 밸런스 구성으로 이룩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볼륨 세팅은 절대로 프리앰프의 회로나 과도 특성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고안되었다. 이것은 프리 설계에 있어서 핵심적인 항목으로, 그 부분에서 오랜 기간 갈고 닦아온 기술력이 최상으로 발휘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어서 디지털 모듈로 넘어가자. 모든 디지털 소스가 24bit/192KHz로 업샘플링되어 출력된다는 점은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리니어 PCM 방식의 스펙이다. 그리고 이 디지털 신호는 ESS Sabre DAC를 통해 변환되며, 크렐 독자적인 커런트 모드 방식으로 전송되어 풀 밸런스 및 디스크리트 회로로 구성된 아날로그 서킷에서 출력된다. 말하자면 단품 DAC가 갖는 최상의 퀄리티를 여기서 구현한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많은 양의 CD를 소장하고 있고, 음성 파일도 많이 갖고 있다. 그러나 너무 다기능으로 무장한 제품은 구하고 싶지 않다. 본 기처럼 DAC와 프리에 정공법적인 어프로치로 빼어난 퀄리티를 구현한 것은, 어쨌든 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거기에 양질의 해드폰 앰프로 말하면, 일종의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다. 여담이지만 맥케이씨는 해드폰 단자의 우수성을 여러 차례 역설했다. 정말 공들여 만든 것이다. 사실 별도의 해드폰 앰프도 가격이 만만치 않은 현실을 생각하면, 솔직히 이 부분도 솔깃해진다. 늦은 밤, 양질의 해드폰으로 집중해서 음악을 드는 재미도 만만치 않으니까.

크렐답게 본 기도 충실한 전원부를 구성해서, 무려 95VA급의 전원 트랜스가 동원되었으며, 에코 진화적인 설계로 스탠바이 상태에선 겨우 2W만 소비하는 점도 마음에 든다. 크렐 하면, 클래스 A 방식으로 대표되는 명작 파워가 즐비하지만, 프리 역시 만만치 않은 실력을 자랑한다. 거기에 본 기는 다기능으로 무장하고 있으니, 가격적인 메리트를 생각할 때 무척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제품이라 하겠다. 

본 기의 시청을 위해 파워는 동사의 듀오 175로 했고, 소스기는 에소테릭의 K03을 사용했으며, 스피커는 아발론의 이데아를 동원했다. 참고로 시청 트랙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YoYoMa, Mutter - Triple Concerto

첫 곡으로 들은 베토벤의 《트리플 콘체르토》. 우선 175가 스피커를 콱 움켜쥐고 완전 구동이 이뤄졌기 때문에, 저역의 펀치력이나 양감에 대한 불만은 일체 없다. 그렇다면 중고역의 해상도와 매력이라는 요소인데, 이 부분에서 본 기의 장점이 잘 드러난다. 이를테면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악기군이 빠짐없이 표현되고, 넘실넘실 리듬감을 타고 펼쳐진다. 그 위에 세 개의 솔로 악기가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데, 그 음장이 상당히 빼어나다. 특히, 신경질적이지 않은 바이올린의 뻗음이나 느긋하게 중저역을 감싸는 첼로의 매력이 상당하며, 의외로 타건이 깊고 잔향이 풍부한 피아노의 존재감이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자칫 난삽해지기 쉬운 편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부분이 특필할 만하다.

이번에는 정 명훈 지휘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중 행진》을 들어본다. 서서히 압박해오는 큰 북의 울림이나 공간을 획획 가르는 바이올린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중간에 강력한 임팩트를 자랑하는 팀파니의 존재나 튜바의 깊숙한 울림 등은, 곡에 풍부한 다이내믹스를 선사한다. 이렇게 저역이 탄탄하면, 중고역의 해상도는 아울러 따라온다. 저 다양한 관악기와 현악기가 어우러져 복잡한 구성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대목에서 가벼운 탄성이 나온다. 스피드, 해상력, 다이내믹스 등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한 퍼포먼스다.

Aaron Nevile - Stardust

아론 네빌이 부른 《Stardust》는 팔세토 창법의 극한이 발휘된 곡으로, 그 아름다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게다가 오른쪽 채널을 점한 코러스의 멋진 화음과 확산감은 곡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든다. 등장한 악기라곤 밥 와서먼의 더블 베이스 하나. 그러나 전혀 빈틈이 없다. 공간을 가득 메우는 네빌의 보이스는 꿈결처럼 요동치며 굽이굽이 몸을 감싼다. 소스의 장점이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조네 퍼커션 프로젝트가 연주하는 《Jazz Variants》. 드럼과 타악기가 어우러진 멋진 앙상블로, 스피커의 능력을 거의 한계치까지 몰고 간다. 단순히 강한 음만 내는 것이 아니라, 북과 심벌즈의 현란한 컴비네이션으로 이뤄지는 향연에는 일종의 스토리가 담겨 있다. 그 흐름이 면밀하게 표현된다. 오랜 기간 음을 다듬어온 크렐이란 메이커의 내공이 듬뿍 담긴 재생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