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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셰필드라는 곳을 아는지? 영국 중부의 사우스 요크셔 주에 있는 이곳은 우리에게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지도를 보면 인근에 리버풀, 맨체스터, 리즈와 같은 도시가 있다. 당연히 이 지역과 연계되어 산업적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는데, 특별한 축구 팀이 없는지 우리에겐 생소한 편이다. 실제로 그 역사를 파고 들면, 영국 산업 혁명의 주요 도시중 하나였던 이곳은, 특히 철강과 광산업이 주를 이뤘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하는 동력이자 심장이 바로 셰필드였던 것이다. 무척 콧대가 셀 수밖에 없는 도시인 것이다. 

그럼 크레이그 밀른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원래 대학에서 파인 아트를 전공했고, 브리티쉬 철강에서는 엔지니어로 일한 바 있다. 말하자면 문무를 겸비한 셈이다. 만일 셰필드의 경기가 지속되었다면, 그 도 한눈 팔지 않고 이쪽 분야에서 쭉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이 그를 바꿔놓았으니, 그 중심에 카본 파이버라는 특별난 소재가 있는 것이다. 당시 이 신소재에 대한 관심은 별로였다. F1 그랑프리용 승용차나 항공기에 일부 도입될 뿐이었다. 누구도 이게 향후 전산업계에 광범위하게 쓰일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크레이그는 이 소재에 대한 확신이 남달랐다.

특히, 1990년에 카본 파이버 소재의 서브 섀시를 가진 턴테이블을 출시하면서 상황이 일변했다. 이 소재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증가하던 무렵이라. 이 대목에서 정부의 융자가 이뤄진 것이다. 처음 2만5천 파운드를 시작으로, 향후 큰 세 개의 프로젝트가 가동함에 따라 결국 지금까지 상당액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세상에 많은 오디오 메이커가 있지만, 정부가 기술을 인정해서 융자까지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 면에서 이래저래 WB는 독특한 존재이고, 그 핵심엔 기술집약적 브레인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 딜을 추진한 영국 상무성은 WB 덕택에 꽤 짭짤한 수익을 올리지 않았나 싶다.

현재 WB가 사용하고 있는 공장은, 예전에 부첼러라는 수프 회사가 쓰던 것이다. 이를 개조해서 메인 오피스와 머신 공장 그리고 카본 파이버 제조용 부지 등으로 각각 나눠서 운영해왔다. 여기에 최근에 리스닝과 데모를 할 수 있는 룸을 따로 오픈함에 따라, 이제는 번듯한 오디오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번에 만난 A.C.T.로 말하면, WB의 스피커 공학이 하나의 정점을 찍었다고 할까, 말하자면 일대 전기를 마련한 제품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이를테면 U자형 인클로저라던가, 철과 알루미늄을 기본으로 카본 파이버를 더한 소재의 발전이라던가 택틱 드라이버의 개발 등, 여러 면에서 신기원을 이룩했던 것이다. 

본 기가 속한 것은 오디세이 시리즈로, 2000년대 초반까지 동사의 대표 얼굴이었다. 여기서 축적된 기술을 바탕으로 보다 덩치가 크고, 고가의 제품을 런칭한 지오메트리 시리즈가 나왔으며, 한편 이 시리즈를 다소 축소한 와이드 밴드위쓰 라인이 나왔다. 아무튼 그 핵심 스피커가 A.C.T.라는 점에서 이견은 없을 것이다. 사실 본 기는 1995년에 나온 A.C.T. One을 시작으로, A.C.T. Two에 이어 이른바 (New) A.C.T.라 할 정도로, 긴 역사를 지닌 물건이다.

개인적으로 A.C.T의 전신을 들어본 적이 있다. 90년대 중반으로 기억하는데, 목재 인클로저를 쓴 작고 아담한 톨보이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모든 애호가들의 목표는 와트/퍼리 5.1이었다. 어떻게 하든 이것을 손에 넣고 싶었지만, 높은 가격표가 발목을 붙잡았다. 그 대안으로 여러 스피커들이 열거되었던 상황에서 우연치 않게 청취를 한 것이다. 우선 놀란 것은 빼어난 음장감에 시원시원한 다이내믹스였다. 저역 구동력도 괜찮았고,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는 포용력도 좋았다. 이 작은 몸체에서 어떻게 이런 스케일이 나오는지 정말 신기했다. 특히, 중역대의 달콤하면서 포근한 느낌은, 다소 냉랭한 와트/퍼피쪽과는 꽤 달랐다. 이후 WB를 주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인클로저 이야기를 좀 더 하면, 이것은 모노코크(Monocoque)라는 디자인을 메인 컨셉으로 한다. 이것은 형태에 관련된 것으로, 이른바 달걀 모양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공기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고안된 디자인으로, 항공기, 로켓, 승용차 등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고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이런 디자인을 기조로, 여러 개의 층이 아닌, 알루미늄과 철을 혼합한 소재를 중심으로 하되, 사이드에 카본 파이버를 더한 포름이다. 이런 제작 방식은 향후 지오메트리 시리즈에서 보다 심화되어간다.

그럼 왜 이런 철제 캐비닛에 복합 물질을 붙여서 만드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스피커에서 발생하는 공진을 없애기 위함이다. 특히, 자체 진동은 물론 벽이나 천장을 타고 들어오는 반사파에도 적극 대응하려면, 이 소재는 무척 요긴한 셈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면, 보다 3차원적인 입체 음향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선, 모든 유닛이 하나의 드라이버처럼 작동해야 한다. 제일 좋은 것은 유닛간의 근접 배치. 하지만 정통적인 MDF 소재로는 일정한 간격을 띄어놓아야 한다. 상호 간섭이나 진동 문제 때문이다. 하지만 WB가 만든 캐비닛엔 이런 단점이 없으니, 보다 근접 배치를 노릴 수 있고, 그게 극대화된 3D 이미지의 사운드의 창출로 완성되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스피커를 풀레인지로 친다면, 본 기는 최대한 그에 접근하고 있다. 유닛의 근접 배치 및 중역대 드라이버의 대역폭을 최대한 확장한 점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갖고 음이 나오는 것은 본 기의 가장 큰 성과라 하겠다. 한편 크로스 오버의 경우, 두 개로 나눠서 각각 인클로저의 뒤편과 베이스(base)에 나눠 담았다. 특히, 제일 예민한 저역용 인턱터는 베이스의 한 구석에 멀찍이 떼어놓으면서 인클로저의 공진을 최대한 피하게 한 점은 유의할 만하다. 벤트에 대한 처리도 효과적이다. 중 저역의 경우, 그냥 포트로 내지 않고, 일단 베이스를 통해 밑으로 빠지게 한 다음, 뒤편의 등뼈와 같은 부분을 타고 올라가서 최종적으로 벤팅되는 시스템이다. 이 과정에서 뒷벽과 부딪히는 에너지가 최소화되고, 그게 사운드 전체의 왜곡을 현저하게 낮추는 결과를 도출한다. 이런 수법은 다른 스피커 회사들이 참조할 만한 대목이 아닐까 싶다.

본 기에 투입된 드라이버는 세 개다. 그 중 두 개는 170mm, 그러니까 7인치 구경의 미드 베이스이고, 나머지 하나는 25mm, 즉 1인치 구경의 소프트 돔 트위터다. 당연히 2웨이 구성으로 보겠지만, 실제 내용은 2.5웨이다. 왜 그런가 하면, 두 개의 미드레인지가 담당하는 대역이 좀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단 본 기가 커버하는 전체 주파수 대역폭을 보면, 35Hz~24KHz에 이름을 알 수 있다. 우선 트위터 바로 밑에 있는 미드 베이스 드라이버는 수납된 챔버도 적고, 담당 대역도 좁다. 이것은 위로 500Hz까지만 뻗는다. 한편 그 밑에 있는 것은 보다 대역이 넓어서 위로 5KHz에 이른다. 이렇게 대역을 다르게 함으로써 얻는 이익이라면, 중역대의 충실한 재현은 물론, 베이스의 적절한 보강이다. 실제 이 사이즈에서 상상하기 힘든 베이스가 가능한데, 이것은 통상의 2웨이 구성으로는 보기 힘든 성취라 하겠다.

본 기의 시청을 위해 앰프와 소스는 오디오넷으로 통일했다. 사실 WB와 오디오넷의 조화도 널리 권장되거니와, 재미있게도 오디오넷의 영국 수입원이 WB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본 기의 시청에 오디오넷이 동원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프리는 DNP, 파워는 AMP 모노블록 그리고 소스기는 ART G3다. 참고로 시청 트랙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첫 곡으로 들은 것은, 젊은 날의 요요마, 조피 무터 등이 함께 한 카라얀 지휘의 베토벤 <트리플 콘체르토>이다. 일단 초반부에 나오는 오케스트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넘실넘실 춤을 추듯, 이쪽으로 다가온다. 공간에 빈틈이 없을 만큼 꽉 짜였고, 속도도 빠르며, 풍요롭다. 브리티쉬 사운드의 느낌을 간직한 따스한 질감은, 이윽고 등장하는 세 개의 악기에 유감없이 표현된다. 대개 최첨단 기술로 무장할 경우, 다소 음이 차가워지는 경향이 있는데, 본 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 특히, 중간중간 펑펑 터지는 저역의 펀치력은 무척 인상적이다.

Cesar Frank: Violin Sonatas
이어서 세자르 프랭크를 들어본다. 가장 연주하기 힘든 3대 바이올린 소나타중 하나인 본 작품은, 피레스와 뒤메이 조합이다. 음색 자체가 고급스럽고, 서로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악상이 진행되며, 악기의 위치나 잔향이 무척 좋은 녹음이다. 그 장점이 본 기에서 잘 살아난다. 힘 있게 쭉 고역으로 뻗으면서 아름다운 질감을 자랑하는 바이올린이나, 풍부한 감촉과 배음으로 깊이 있게 퍼지는 피아노의 음향은 그냥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실내악을 감상할 때 원하는 음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브리티쉬 사운드의 미덕이 잘 발휘된 부분이다.

Joey Calderazzo - Scriabin

Joey Calderazzo - Secrets
마지막으로 조이 칼데라초. 스크리아빈이라는 러시아 작곡가에게 헌정한 곡으로, 처음에는 클래식 소품처럼 잉글리쉬 혼과 첼로 등이 등장해 차분히 전개된다. 그러다 본격적인 피아노 트리오가 출몰하는 가운데, 중간중간 클래시컬하거나 스패니쉬적인 요소가 적절히 삽입된다. 쉽지 않은 편곡인데, 여기서는 그 전개 과정에 일체 무리가 없다. 특히, 강력한 타건이지만 잔향이 깊고, 배음이 풍부한 피아노에서 그랜드한 사이즈가 느껴지고, 빠르게 질주할 때조차 왼손과 오른손의 컴비네이션이 낱낱이 포착된다. 해상력, 투명함, 다이내믹스 등에서 별 불만이 없는 멋진 재생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