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작년 11월, 광저우에서 열린 오디오 쇼에 참석했다. 중국은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지만, 본격적인 오디오 쇼 탐방은 처음이라, 가벼운 긴장감이 밀려왔다. 낯선 중국어 간판을 보고 해맨 끝에 동방호텔에 가보니, 그 안에 마련된 많은 부스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 중국의 높은 오디오 열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원래 중국에선 베이징, 상하이 그리고 광저우에서 열리는 오디오 쇼를 제일로 친다. 이른바 빅 3라 하겠다. 그중 광저우가 가장 인터내셔널하고, 규모도 커서, 중국의 간판으로 떠오른 상태다. 정말 다양한 지역에서 수많은 관람객과 딜러들이 몰려든 모습을 보니, 상대적으로 침체된 우리 시장이 생각나 여러 상념이 떠오른다.

그 와중에 머리를 짧게 깎고, 훤칠한 키에 밝은 미소를 뿌리는 사람을 한 명 만나게 되었다. 바로 CH를 주재하는 플로리언 코시다. 가만, 이 친구와는 여러 오디오 쇼에서 만났다. 최근만 해도 홍콩에서 만나 차 한 잔하지 않았는가. 반갑게 악수를 하고, 그의 안내로 부스에 가보니, 풀 CH 시스템에 오션 웨이 스피커와 연결된 그림이 나왔다. 이 스피커는 외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생김새 때문인지 국내엔 아직 소개되지 않은 상태. 아무튼 여기서 흘러나오는 유려하면서, 기품 있는 음은 장내를 가득 채운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코시의 입에서도 절로 미소가 나온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

생각해보면, 처음 CH가 국내에 소개될 때부터 음을 들었던 것같다. 단단한 만듦새에 편의성이 극대화된 조작 시스템 그리고 널찍한 디스플레이 창. 메이드 인 스위스라는 간판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물건으로서의 만듦새나 완성도가 무척 높다. 또 트랜스포트, DAC, 앰프 등의 사이즈가 일정해, 하나의 틀을 만들어놓고, 다양한 용도로 두루두루 쓰는 모습도 무척 보기 좋다. 거기에 용도에 맞게 각각 모듈을 투입할 수 있어서, 취미성도 높다. 일단 사두고 쓰다가, 아쉽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기기 교체가 아닌 모듈의 구매로서, 즐거움을 배가시킬 수 있는 것이다. 정기적인 펌웨어 업그레이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요즘의 전자 제품들은, 이렇게 다양한 옵션과 업그레이드 서비스가 기본인 것같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시간이 지나면 뭔가 질리거나 아쉬운 법인데, 그럴 때마다 이런 방식으로 갈증을 해결해주는 것은, 마치 나와 제품이 함께 성장하는 것같아 기분이 좋다. 예전처럼 마크 2니 스페셜 에디션이니 해서 제품 교체를 강매하는 쪽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각설하고, 이번에 만난 D1은, 이런 CH의 출사표와 같은 제품이다. 개인적으로도 몇 년전에 처음 출시되어 수입상에 도착했을 때부터 만난 인연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SACD 및 CD를 커버하는 트랜스포트로서, 에소테릭의 메커니즘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 내용은 무척 다르다. 그리고 그 안에 향후 CH가 전개해나갈 여러 다양한 기술들의 맹아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역사적인 제품이기도 하다.

바로 그 핵심 중 하나는, 트랜스포트 메카니즘을 사용하되, 클록 설계는 자신들 것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하긴 이미 애너그램과 ABC 등을 통해 쌓아올린 기술력을 발휘하기 위해 만든 제품인 만큼, 이 부분에서 에소테릭의 클록을 사용한다면 별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이와 커플링되는 C1의 기술적 배경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을 좀 더 설명하면, 정확히 D1이 사용하는 것은 VMK-5라는 메커니즘이다. VRDS-NEO에 해당하는 것으로, 덕분에 CD뿐 아니라 SACD도 커버한다. 그것을 좀 더 부연 설명하면, 이른바 레드북 CD부터 CD-R/RW도 읽고, SACD의 경우도 세 가지 포맷에 대응한다. 하나는 싱글 레이어로 만든 SACD 온리이고, 또 하나는 CD의 층을 함께 갖고 있는 하이브리드이며, 마지막으로 멀티 채널이다. 

그런데 여기서 왜 독자적인 클록을 채용했는가 하면, 바로 지터의 혁신적인 감쇄를 위해서다. 사실 VMK-5 안에는 VCXO라는 슬레이브가 존재한다. 클록에서 마스터가 아닌 슬레이브라는 점을 유의깊게 살펴봐야 한다. 이 경우 디지털 오디오 신호가 들어왔을 때 싱크로나이제이션, 즉 동기화를 해야 하는데, 그 작업이 FPGA라는 곳에서 이뤄진다. 이게 위치한 곳은 디지털 신호를 버퍼로 부풀리거나 혹은 DAC로 전달하기 직전이다. 즉, 디지털 신호의 가공이 이뤄지기 전에 싱크로 작업을 완료함으로서, 지터에 대한 만반의 대책을 미리부터 해버리는 것이다.

사실 CH는 일종의 브레인 집단이다. 최고의 엔지니어링과 기술력을 갖춘 엘리트 4명에 의해 운영되며, 끊임없는 연구와 회의 끝에 신기술이 척척 탄생된다. 그래서 어떤 기기를 만들어도 다른 회사들과 차별화시킨다. 그게 CH의 매력이라 하겠다. 일례로 DAC+Pre의 컨셉으로 만들어진 C1을 보면, 컨버팅 과정에서 델타 시그마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R2R 방식의 컨버터 칩을 채널당 무려 4개나 넣는다. 그것도 각각에 다른 신호를 집어넣어 최종적으로 합산하는 방식이다. 

A1이라는 파워 앰프를 보면, 글로벌 피드백의 양을 사용자가 직접 조절할 수 있게 해놨다. 논 피드백이 최선이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 약간 흘려주는 것도 좋을 때가 있다. 바로 그 점에 착안한 것이다. 게다가 출력단에 쓰는 MOS-FET의 바이어스를 정확하게 조절해서 최상의 음질을 추구하는 점도 흥미롭다. FET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진공관과 같은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바이어스 조정은 어떤 면에서 필수라 하겠다. 왜 다른 앰프 회사들이 이런 점에 착안하지 못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 

한편 본 기는 다양한 옵션 보드를 설치해서 그 기능을 극대화하는 점이 유니크하다. 예를 들어 2 채널 아날로그 보드를 설치하면, 별도의 DAC 없이 바로 앰프로 연결해서 음을 들을 수 있다. 반대로 복잡한 디지털 멀티 채널 출력도 가능하다. 심지어 싱크로 보드를 설치할 경우, 본 기는 일종의 외부 클록 제너레이터 기능도 하게 된다. 이 부분만 따로 떼어놓고 설명하자면 한이 없는데, 그만큼 현행 디지털 오디오의 다양한 환경을 고려했다고 판단하면 좋을 듯싶다.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CH-Link의 존재. 이것은 본 기에서 C1으로 고음질 파일을 비롯, DSD 음성 신호를 바로 흘려보내는 역할을 한다. 그간 DSD 신호를 보낼 때엔 PCM의 16bit/44.1KHz의 사양으로 다운 샘플링한 다음 일반적인 디지털 아웃풋 신호로 내보냈던 만큼, 이 파일의 장점이 전혀 부각되지 못했다. 이런 독자적인 CH-Link의 존재는 DSD 파일의 가치를 한껏 부각시킬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아날로그 인풋 옵션을 선택할 경우, 입력되는 아날로그 신호가 정확히 디지털 신호로 바뀐다는 점이다. 그 스펙은 DSD128로, 5.6MHz의 사양이다. 이렇게 변환된 디지털 신호가 본 기의 디지털 프로세싱을 따라 출력되는 것이다. 참 흥미로운 제안이다. 아날로그 신호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전송하는 것이 원칙이나, 이렇게 디지털로 변환될 경우, 정보량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유익한 면이 분명히 있다. 아직 확인하지 못해 아쉽지만, 이런 제안의 퀄리티는 몹시 궁금하다.

본 기의 시청을 위해 DAC와 앰프는 CH제로 통일했다. 각각 C1과 A1을 동원했으며, X1이라는 외장 파워 서플라이도 추가했다. 여기에 윌슨 베네시의 카디널을 사용해서, 본 기의 성능을 깊이 파악할 수 있었다. 참고로 시청 트랙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Janos Starker - Duo for Violin & Cello. op.7

Kodaly: Duo for Violin & Cello. op.7
우선 코다이의 경우, 바이올린과 첼로라는 두 현악기만의 이색 편성이 눈길을 끈다. 오른쪽 채널엔 첼로, 왼쪽 채널엔 바이올린이 각각 위치한 가운데, 강력한 배틀이 펼쳐진다. 덕분에 두 악기의 질감이나 음색 등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다. 현으로 말하면 결코 가늘지 않고, 심지가 있으며, 두툼하면서도 세부 묘사가 빼어나다. 바로 요 앞에 악기가 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또 악기 주변의 공간도 충분히 드러내서 배음이나 잔향이 멋지게 드러난다. 

mendelssohn: Violin Concerto
힐러리 한으로 듣는 멘델스존은, 마치 LP를 듣는 듯한 자연스러움이 일품이다. 당당하고, 스케일이 큰 오케스트라를 배경으로, 빠르게 질주하는 한의 모습이 분명하게 그려진다. 이 대목에서 과연 DSD 파일의 장점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고역의 끝이 약해지거나, 현의 심지가 얇은 등, 일반적인 디지털 소스의 폐해가 드러나지 않고, 풍부한 질감과 감촉까지 아우르는 대목은 무척 인상적이다. 중간중간 나오는 오케스트라의 펀치력 또한 박력 넘친다.

Jane Monheit - Misty

제인 모나이트의 노래는, 일단 강력한 뱃심이 인상적이다. 싱싱한 어깨로 160Km를 팍팍 꽂아대는 강속구가 연상된다. 성량과 발성에 자신만만한 제인이기에 가능한 경지다. 그러면서 그 끝을 살짝 말거나 부풀려서, 묘한 뉘앙스를 선사한다. 곡 자체가 갖는 처연한 느낌의 표현에 무척 유용하다. 그런 세밀한 테크닉, 그러니까 뮤지션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를 알게 해주는 재생이다. 

Keiko Lee - Body & Soul

Keiko Lee - Another Side of Keiko Lee
마지막으로 게이코 리. 처음엔 더블 베이스의 반주만으로 시작하는데, 그 풍부한 공간감이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게이코의 톤으로 말하면, 약간 달콤하면서 진한 허스키의 매력이 충분히 발휘되고, 세밀한 표현력이 구구절절 다 포착이 된다. 이후 악기들이 본격 가세하면서 몰아칠 때의 기세가 좋고, 테너 색스와 주고받는 부분에선 무척 자유로운 분위기가 연출된다. 과연 패키지 미디어의 미래가 어떨지 잘 모르겠으나, 이런 플레이어가 발표되고 있다는 점 하나는 무척 고무적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