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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익 오디오의 제품을 정식으로 시청하는 일은 처음이었는데, 역시 오디오 특히 진공관앰프에 대한 선입관은 금기임을 잘 시사해주는 제품이었다. 제품의 외관에서 느껴지는 스타일로 보아서는 막연히 고전 진공관앰프의 포맷을 따르고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이유로 다른 솔리드 앰프를 시청한 이후에 맨 마지막으로 순서를 배정했다. 하지만 예상은 명쾌하게 빗나갔고 이유에 상관없이 시청 곡목이 늘어감에 따라 본 제품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다.

칼리오페 파워를 중심으로 변형설계한 개념의 본 제품의 출력관은 최근 다양한 진공관앰프 브랜드들에서 발견되는 KT120을 사용해서 UL접속시 60와트를 최적의 출력으로 설정했으며 프리앰프단의 초단과 드라이브에는 고성능관인 6SN7을 사용한 모습도 시선을 끈다. 

UL접속과 3극 접속을 전환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고, 최근의 진공관앰프에서는 흔치 않은 레벨미터를 전면패널에 배치시켰다. 이미지로만 보았지만 제품의 내부를 보면 말단까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 제작자의 스타일이 잘 짐작되며 동일한 컨셉이 제품의 사운드에까지 연장되어 있어 보인다. 

 

본 제품을 통한 소리는 전형적인 진공관의 퍼포먼스나 음색과는 거리가 있다. 고전진공관에서 막연히 연상되는 회고조의 분위기나 질감이 풍성한 스타일도 아니고 감성에 호소하는 쪽도 아니다. 다만 진공관적으로 보자면 투명하고 대역이 넓은 진공관 특유의 음색특성을, 제작자의 경험적 스킬을 동원해서 하이엔드적으로 잘 추출해 냈다는 생각이 든다. 

기본적으로 솔리드 앰프의 드라이브와 스피디하고 순도높은 진공관앰프의 포맷을 따르고 있어 보인다. 동일하다고 할 수는 물론 없겠지만 시청을 하다 보니 기존 제품 중에서 BAT의 초기 OTL제품들이 떠올랐다. 음색은 다르지만 스피디한 드라이브 스타일과 섬세한 입자의 표현 등의 스타일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발트시타인’에서의 타건은 모니터적으로 들린다. 소리를 가공하거나 심지어 증폭해서 들려주고 있다는 인상이 거의 없고 스피커를 통해 대상을 왜곡없이 전송하는 ‘트랜스듀싱’이라고나 할까? 그런 인상을 받았다. 진공관 앰프라고 느끼기 어려운, 개성을 최대한 억제한 피아노음으로서 울림이 풍성하게 만들지 않고 소스에 있는 정보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하모닉스의 느낌이다. 

Minesota Orchestra - Pictures at an Exhibition
Tutti: Orchestral Sampler 
‘전람회의 그림’에서의 슬램은 과하거나 약하지 않고 딱 소스에서 만큼이라고 느껴진다. 기본적으로 슬램의 순간에서는 위력적이지만, 육중한 슬램의 느낌이 확장된 느낌없이 그대로 잘 실려있다고 생각되었다. 또한 굼뜨거나 머뭇거리는 경우가 없이 시종 스피디하고 정확한 위상에 따라 각 대역을 분명히 들려준다.

‘파르티타’에서의 바이올린에서는 비로소 레트로 스타일의 음색이 느껴진다. 소스에서 울림의 반경이 커지자 이런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울림이나 물리적인 특성은 상당히 정직하고 곧이 곧대로 들려주고 있지만 마치 노이만 마이크로 녹음한 LP를 시청하는 듯, 중역대에서 느껴지는 독특한 음색에서 본 제품이 진공관으로 증폭하고 출력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잘 정제되어 있지만 역시 아름다운 음색으로서 시청곡 중에서 본 제품의 개성을 가장 잘 표현했다.

‘피에 예수’는 어떤 면에서는 밋밋한 느낌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자세히 들어보면 실제 연주의 하모닉스에 역시 장식과 울림을 추가하지 않은 소스 그대로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굳이 어느 부분이 건조하다거나 평탄하고 듣기 좋은 상태로 들려준다. 스테이징이 그리 크지 않지만 컴팩트한 음상과 입체적인 전후 레이어링이 만족스럽게 연출되어 좋았다. 

‘케이스 오브 유’의 경우도 동일한 사운드컨셉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이 곡을 시청하면서 본 제품이 정돈해서 보여주는 무대가 매우 차분함을 알게되었다. 다만, 음색적인 매력을 강조해서 연출하는 일보다는 모니터적인 소리로 들렸다. 도입부의 피아노는 발트시타인에서보다 더해진 윤기와 사이즈를 들려주지만 여전히 단정하다. 악기수가 늘어나도 다이아나 크롤의 목소리가 차분하면서 또박 또박 들려온다. 약음이 되면서 길게 끌리는 부분도 음이 멈출 때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국내에선 유독 진공관 앰프 제작자가 많지만 사실 시장에서 브랜드로서 성공한 예는 그리 흔치 않다. 대부분 과거의 명기를 복각하거나 재해석 하는 정도 아니면 공개된 유명 회로를 가지고 diy 형태로 제작, 판매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독보적인 회로 설계와 파인튜닝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서병익오디오의 정체성은 뚜렷하다. 과거의 명기를 흉내 내거나 또는 고가의 부품만으로 승부하지 않겠다는 철학은 두 손 들어 환영할만하다. Calliope 는 과거 명기의 카피가 아니라 독보적인 회로 구성과 노하우로 빚어낸 인티앰프다.

소리 소문 없이 동호인들로부터 인기를 얻어가고 있는 서병익오디오의 새로운 인티앰프 Calliope 는 그래서 더욱 반갑다. 대게 소출력 싱글 구성과 분리형 앰프가 아닌 비교적 고출력에 심플한 인티앰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병익오디오의 설계 철학에서도 볼 수 있듯 해외 진공관 앰프와 비슷한 그저 그런 형태의 인티앰프가 아니다. 우선 5극 빔관 중에서도 플레이트 전력이 가장 높은 KT120을 사용하고 있다. 해외 하이엔드 진공관 메이커에서 앞 다투어 채용하기 시작한 진공관이다. 진공관 치고는 대출력으로 설계할 수 있지만 Calliope 는 최대 플레이트 손실의 60% 이내에서만 동작하도록 설계했다. 전류 값을 충분히 유지하는 선에서 전압을 확보해 음질적인 손해를 최소화했다.

6SN7 초단과 6SN7 GTB 드라이브관으로 작동하며 KT120을 사용해 증폭하는 Calliope 는 푸시풀 구동 방식으로 두 가지 증폭 모드를 갖는다. 하나는 울트라리니어, 트라이오드, 각각 채널당 60와트, 32와트 출력을 내주는 기능으로 동일한 앰프에서 두 가지의 다른 음질을 들을 수 있어 많은 메이커들이 채용하고 있는 기능이다. 첫 인상은 확고한 설계철학에 어울리는 늠름함이 돋보인다. 상당히 공들여 제작한 수공 공예품 같은 느낌으로 커다란 트랜드와 진공관, 전면 V.U 메터와 노브 등 심혈을 기울인 만듦새다. 

소리에서도 제작자의 성품과 굳건한 장인정신이 그대로 묻어난다. 심지가 곧고 깊으며 중후 장대한 드라이빙 능력을 모두 갖추었다. 예를 들어 Eugene Istomin이 연주한 [Bethoven : Sonatas] 중 ‘Waldstein’을 들어보면 피아노 타건이 굵고 명확하며 중, 저역 대역에서 단단히 받쳐주는 강건한 사운드를 만들어낸다. 세팅 자체를 울트라 리니어 모드 60와트로 설정했을 경우 아발론 Transcendent 의 전 대역을 장악하는 모습이다. 전체적인 토널 밸런스는 중,저역 쪽으로 약간 낮게 형성되어 중후하고 중량감 넘치며 수준급의 저역 펀치력을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특성 때문에 진공관의 풍윤하고 윤기있는 사운드 텍스처는 아니었다. 번인타임과 울트라리니어 모드를 감안해야 하지만 풀 진공관 앰프 사운드에서는 약간 비껴가 있다. 전통적인 설계를 그대로 이어받지 않고 나름대로 독자적인 설계를 고집한 서병익오디오는 Calliope 는 마치 하이브리드 진공관 앰프와 유사한 소리를 내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새로운 진공관 앰프 무브먼트를 이끌었던 BAT 같은 앰프의 사운드 스케이프를 떠올리게 한다. 

장담하건데 협대역에 좁은 스테이징을 보이지만 음색(timbre) 적 매력으로 어필하는 고전적인 앰프들과는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다소 고전적인 앰프 디자인을 보고 마란츠 8B 등 과거 고전의 리바이벌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물론 현대 하이엔드 진공관 앰프처럼 뎁스가 깊고 입체적인 사운드 스테이징까지 펼쳐내진 않는다. 보다 직선적이고 우렁찬 소리며 세부묘사보다는 커다란 매크로 다이내믹스가 돋보이는 남성적인 소리를 내준다.

KT120 이라는 고출력의 출력관을 사용하고 적절한 네거티브 피드백을 건 다소 레트로 지향의 현대적 재해석처럼 보이지만 실상 음악 표현력의 범위가 상당히 넓다. 진공관의 특성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솔리드스테이트에 버금가는 레퍼런스 모니터 앰프로 환생한 듯한 모습이다. 진공관 치고는 대출력에 울트라리니어, 트라이오드 등 두 가지 모드를 지원하므로 스피커 커버리지는 상당히 넓다. KT120에서 끌어낼 수 있는 최대의 에너지와 열기는 대출력 하이엔드 솔리드스테이트만큼이나 강력하고 당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