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급할수록 돌아가라'라는 말이 있다. 급박하게 빠른 결정을 해야 할 때일수록 서둘러 일을 처리하지 말고 느긋하게 방법을 모색하라는 말이다. 벼가 늦게 자라는 것 같다고 해서 벼의 순을 잡아 빼서 벼를 모두 말라 죽이게 만든다는 발묘조장[拔苗助長]이라는 말도 있다. 하이파이나 헤드파이 등을 즐기는 오디오파일도 이런 경우에 많이 직면하게 된다. 프리와 파워 사이의 임피던스, 게인 매칭, 스피커를 핸들링 하는 데 있어서 파워앰프와 스피커의 관계. 이 모든 것들을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기 위해 바꿈질이라는 함정에 빠진다. 엄격한 기준이나 회로에 대한 지식이 없이 오직 느낌과 귀에만 의지해 바꿈질로 해결하려한다. 하지만 아무런 기준이나 노하우 없는 바꿈질은 거짓말이 더 많은 거짓말을 낳듯 점점 더 블랙홀로 빠지는 오디오 시스템 앞에서 더 힘든 상황만 치닫게 만든다. 이럴 경우 가장 빠른 해결책은 다름 아닌 순정 매칭이다.

간략하게 HD800부터 살펴보면 우선 만듦새부터 마치 로보캅이나 터미네이터 등 헐리웃 SF 영화의 로봇 몸체를 감싸고 있는 메탈 갑옷을 연상시킨다. 독일 태생에 끈끈한 혈연관계로 묶여있는 이 분야의 대표적인 가족 기업 젠하이저. 그리고 창업자이자 과학자인 프리츠 젠하이저는 일반적인 메이커들과 비교를 거부한다. 트렌드에 편승한 스타일리시 디자인과 예쁜 외형이 아닌 사운드의 질적인 부분에 탐닉하는 이유도 창업자의 커리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묵직하고 세련된 메탈 느낌 덕에 육중에 보이는 것과 달리 무게는 300그램이 약간 넘는 수준으로 가벼운 동시에 단박에 눈을 사로잡는 디자인을 가졌다. 오픈형 타입으로 머리에 착용하고 있어도 소리가 밖으로 거의 모두 생생하게 새어 나오는 스타일이다. 따라서 독립적인 음악 감상이 가능한 실내에서의 사용을 염두에 둔 제품임을 알 수 있다. 

우선 헤드폰을 머리에 장착하면 귀를 감싸는 이어패드의 느낌이 마치 깨끗하게 세탁한 옷을 입는 듯 편안하고 산뜻하다. 일본산 고급 섬유 중 ‘Alcantara’라는 소재를 사용해 착용감을 높이는 한편 착용 시 이물감을 최소화한 덕분이다. 만일 요즘처럼 더운 날씨에 에어컨 없이 땀을 흘리는 경우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환경에서는 상당히 쾌적한 느낌을 주는 이어밴드다. 헤드밴드의 경우엔 10단계 정도로 부드럽게 움직이며 제법 세밀하게 조절이 가능하며 조작은 아주 편리한 편이다. 또한 내부에 댐핑재를 넣어 머리 상단 부분에도 신경 쓴 흔적이 역력하다.

가장 중요한 트랜스듀서는 다이내믹 스테레오 타입으로 내부에 무려 56mm 구경의 상당히 큰 드라이버가 사용되었다. 아마도 현존하는 가장 큰 크기일 듯 한데 코일 구경만 해도 40mm, 마그넷은 42mm 에 이른다. 타원 형태의 덮개형 이어컵 안에 마치 스피커를 내장하고 여기에 귀를 대고 듣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이러한 설계 덕분이다. HD800을 위해 완전히 새롭게 개발된 이 커다란 드라이버를 중심으로 모든 부분 소자들을 수공으로 제작한다고 하니 레퍼런스급 수공 명품답다. 하지만 수공 제조임에도 불구하고 독일 제품들이 그렇듯 정밀하고 까다로운 검수 시스템 덕분인지 마무리는 흠 잡을 데 없이 견고하다.

주파수 응답특성은 -10dB 조건에서 6Hz에서 51kHz 로 광대역이며 임피던스는 무려 300옴, 음압은 1kHz/1Vrms 조건에서 102dB 에 이른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전 대역을 평탄하게 고해상력으로 즐기려면 이에 걸맞은 레퍼런스급 헤드폰 앰프가 필수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6.3mm 스테레오 커넥터로 터미네이션된 케이블 또한 레퍼런스급 헤드폰에 어울리는 등급으로 OFC 소재에 은을 도금한 도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케이블은 케이블에서 유도될 수 있는 임피던스 왜곡을 최소화하기 위해 커패시턴스가 아주 낮게 제작되었다. 또한 HD800 헤드폰과 HDVD800 및 HDVA600 헤드폰 앰프에 최적화되었음은 물론이다.

HD800 및 젠하이저 HD600, 650 등을 위해 젠하이저에서 직접 제작한 헤드폰앰프 HDVD800 은 그 외관부터 범상치 않다. 매끈하게 절삭된 케이스에 필요한 단자와 노브만을 심플하게 장착한 모습이다. 호사스러운 장식이나 천박한 로고를 그들은 용납하지 않는다. 전면 우측엔 알프스 볼륨을 장착해 볼륨 스텝 이동에 따른 왜곡을 최소화했으며 심플한 셀렉터 노브가 그 곁에 위치한다. 그 옆으로는 XLR-4 소켓 및 6.25mm 잭 소켓이 마련되어 있다. 

시메트리컬 신호 전송에 기초한 HDVD800 의 헤드폰 앰프 섹션은 전 대역에 걸쳐 손실 없는 최고 수준의 정확도와 낮은 하모닉 디스토션을 추구하고 있다. 또한 비교적 임피던스가 높아 핸들링이 까다로운 헤드폰을 수월하게 드라이빙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신호 전송 구간은 최단 거리로 설계했고 이런 자신감은 상단 디자인에서도 발견된다. 투명 패털을 통해 내부 PCB 디자인 일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설계한 것. 알프스 볼륨은 150mm 정도로 긴 샤프트로 노브와 연결해 전기적 신호 간섭을 최소화했으며 릴레이와 냉각판 등 모든 소자는 자체적인 선별과정을 거쳐 투입되었다.

HD800 테스트는 당연히 HDVD800 과 함께 이루어졌다. 마치 바늘과 실 같은 관계의 두 젠하이저 제품은 한 몸처럼 잘 어울렸다. 디자인 또한 조화로운 나머지 서로 떼어놓고 생각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물론 가격을 생각한다면 당연한건지도 모르겠지만 한 회사 제품 커플링이 이렇게 조화로운 경우도 그리 많지는 않다. HD800 의 헤드폰 케이블은 순정이지만 케이블은 수입사에서 제공한 별도의 AC 전원 케이블을 사용해 테스트했다. 윈도우 용 USB 드라이버 및 펌웨어 업그레이드 파일을 젠하이저 사이트에서 직접 다운로드 받아 설치했고 그 과정은 아주 수월한 편. 푸바 2000 플레이어를 사용해 일련의 셋업 과정을 마친 후 테스트해 들어갔다. 

고음질 레코딩으로 유명한 체스키 레코드에서 출시한 [Dr. Chesky's Sensational, Fantastic, and Simply Amazing Binaural Sound Show] (24bit/96kHz, Flac) 를 들어보면 헤드폰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스테이징을 체험할 수 있다. 체스키 박사가 녹음한 방식은 사람의 머리 모양을 한 더미 헤드폰의 양 귀에 마이크를 장착해 녹음하는 바이노럴 레코딩이다. 

이 곡 뿐만 아니라 같은 앨범의 Sukoon 의 ‘Sami Bayyati’같은 곡을 재생하면 채널 간 분리도가 굉장히 선명하며 아주 작은 신호도 놓치지 않고 들려준다. 아주 작은 악기 소리의 움직임도 그 위치가 선명하며 섬세하게 표현해주어 생생한 녹음현장을 그대로 머릿속에 떠올려준다. 각 악기의 거리를 통한 원근, 좌/우 위치 감각 등이 마치 3D 입체 영상처럼 머릿속에 그려진다. 전체적인 토널 밸런스는 밝고 화사한 편으로 두텁고 깊고 밀도 높은 남성적인 성향이라기보다는 섬세하고 화사한 느낌의 선면한 자연색의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타입이다. 

마지막으로 The Brooklyn Funk Band 의 ‘Pamafunk’ 같은 펑키 재즈 락을 들어보니 리듬감이 제법이다. 하모닉스가 자연스럽지만 지저분한 잔상이 없고 음의 진행이 빠르다보니 군더더기 없고 산뜻하며 상쾌한 느낌을 선사한다. 선이 굵은 편은 아니며 밸런스는 몇 개 구역 외에는 상당히 플랫한 편으로 모니터용으로 사용해도 발군의 정확도를 선사할 듯하다. 스피디하고 날렵하며 머리를 중심으로 마치 우주 공간 같은 입체적인 무대 공간을 연출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