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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상당히 의외의 회사가 평판형 헤드폰을 선보였다. 미국의 JPS Labs는 원래 하이엔드 케이블 전문 회사이다. 그런 JPS Labs에서 2013년에 Abyss AB-1266이라는 평판형 헤드폰을 $5,495라는 초고가에 선보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이 헤드폰의 등장에 많은 애호가들은 혼란에 빠졌다.

  

  

  

  

일단 디자인부터가 대단히 파격적이다. 요즘의 다른 헤드폰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함마저 느껴지는 디자인이다. 사실 이런 극단적인 ㄷ자 헤드밴드 형상은 헤드폰이라는 제품군이 아직 완전히 정립되기 이전인 80년대 이전 시절 나온 제품에서나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역사를 굳이 모르더라도 디자인에서 상당히 올드한 향수가 느껴진다. 케이블 전문 회사가 개발한 헤드폰이어서일까. 기존의 통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디자인이다.

  

헤드폰의 외관의 대부분은 알루미늄을 비롯한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다. 금속이 아닌 부분을 찾자면 이어패드와 해드패드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철저하게 메탈 베이스 디자인이다. 그러다 보니 정체 무게가 620g로 상당해서 착용감이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지만, 막상 착용을 해 보면 무게감은 2차적인 문제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헤드밴드의 기구부가 상당히 단순해서 착용 가능한 폭이 크게 제한되기 때문이다. 밴드에서 조절이 가능한 부분은 정수리 부분에 위치한 헤드밴드 각도 조절부 뿐이다. 그나마도 조절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다 보니 제대로 착용하기 위해서는 '연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헤드폰 유닛부가 거의 직각으로 곧추서있기 때문에 귀 밑의 아래턱 주변을 제대로 밀폐해 주지 못한다. 그래서 착용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그나마 자유롭게 위치를 조절할 수 있는 이어패드의 각도 조절이 중요하다. 이어패드가 자석으로 붙는 방식이고 홈에 맞춰서 일정 각도로 회전해서 쉽게 탈부착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이어패드를 옆에서 보면 한쪽이 두툼하고 반대쪽이 얇아지도록 약간 경사진 형상을 띈다. 원래대로라면 두툼한 쪽이 귀 뒤로 가도록 해서 헤드폰 드라이버를 앞으로 기울이도록 하는 의도의 설계이겠지만, 그렇게 착용하면 아래턱 쪽이 완전히 뚫려있는 상태로 착용될 가능성이 높다.1

  

이어패드가 머리에 전체적으로 밀착되지 않으면 저음이 새어나가서 사운드 밸런스가 무너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어패드를 전체가 완전히 밀착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두상이 크고 아래턱이 각진 형상을 띈 청취자라면 이어패드의 두툼한 쪽을 귀 뒤로 가게 착용해도 밀폐도가 충분하게 나올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은 청취자들은 AB-1266에서 이어패드의 밀착감을 높이기 위해서는 앞서 설명한 이어패드의 두툼한 쪽을 귀 뒤가 아니라 오히려 밑으로 오도록 돌려서 부착하는 것이 유리하다. 이어패드의 두툼한 쪽을 아래 쪽으로 가도록 해서 본인의 두상에 맞게 각도를 조금씩 돌려 가면서 착용을 시도해 보는 것이 좋다. 

 

이어패드를 잘 조절해서 밀폐도를 충분히 확보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헤드밴드에 높이 조절 기능이 없어서 두상에 대한 대응력이 상당히 떨어진다. 헤드패드는 단순히 고무밴드에 의해 둥글게 늘어나는 기구 구조만 있을 뿐이며 높이가 단단히 고정되지는 않는다. 그야말로 '선택받은' 두상을 가진 청취자만이 어비스 AB-1266의 사운드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셈이다. 

  

  

  

  

AB-1266은 기본적으로 밸런스드 구동 방식으로 와이어링된다. 본체와는 미니 XLR 단자와 연결되며 앰프와 연결하는 측의 단자는 각 채널별로 일반 XLR 단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기본 제공 케이블의 구성에 따라서 일반 버전과 Lite 버전으로 구분된다.

  

일반 버전은 기본 케이블이 각 채널별로 2개의 일반 XLR 3핀 단자를 사용한다. 이를 단일 XLR 4핀 밸런스드 단자나 6.3mm 스테레오 싱글엔드 단자로 변환시켜 주는 케이블도 각각 기본 제공된다. Lite 버전은 기본 케이블이 처음부터 단일 4핀 XLR 단자이다. 이를 6.3mm 스테레오 싱글엔드 단자로 변환시켜 주는 케이블이 기본 제공된다. 이외에도 전용 파우치가 일반 버전은 가죽 재질이고 Lite 버전은 스웨이드 재질이며, 일반 버전에만 전용 스텐드가 제공되는 등의 차이가 있다.

  

원래 하이엔드 케이블 전문 회사의 헤드폰답게 기본 케이블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선재의 내부 도체는 알루미로이(Alumiloy)라는 소재로서 JPS Labs에서 독자 개발한 구리-알루미늄 합금이다. 외부 피복 역시 의료용 등급의 캡톤(Kapton) 소재를 사용하여 안정성이 높다. 이 선재는 JPS Labs의 최상위 라인업인 Aluminata 시리즈에서 사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마무리로 단자류는 신뢰도와 범용성이 높은 뉴트릭 사의 단자를 사용한다. 하나 아쉬운 점은 케이블이 처음부터 끝까지 양 채널이 갈라져 있어서 케이블의 관리가 약간 불편하게 느껴진다.

  

  

  

JPS Labs가 원래 헤드폰 전문 회사가 아니기에 처음 어비스 AB-1266이 출시되었을 때의 사운드는 그야말로 미지수였다. 하지만 출시 이후 그러한 물음표는 AB-1266을 경험해본 애호가들 사이에서 완전히 지워진 상태이다.

  

우선 대구경 평판형 드라이버를 탑재한 헤드폰답게 가청주파수 전 대역에 걸쳐서 매우 우수한 응답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초저음과 초고음에서도 전혀 힘을 잃지 않는 응답이 매우 인상적이다. 물론 AB-1266에서 본연의 초저음 재생 성능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앞서서 설명한 대로 주의깊은 착용이 필수이며, 사용자에 따라서는 어떻게 해도 AB-1266에서 초저음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제대로 착용에 성공하기만 하면 압도적인 초저음 재생 성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특히 저음이 들어오고 나가는 공기의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묵직한 타격감이 발군이다.

  

기본적인 저-고음의 밸런스도 상당히 우수하다. 인도어에서 듣기에 매우 적합한 밸런스를 가지고 있으며, 초고음의 에너지가 충분하면서도 지나치게 앞서는 일이 없다. 저음 역시 중저음 대역의 양감이 아니라 본질적인 초저음의 에너지로 가득하기에 저음이 웅장하면서도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드라이버의 질적인 음질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우수한 밸런스를 보여준다.

  

드라이버의 구경이 크기 때문에 착용 위치에 따라 고음의 느낌이 달라지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귀의 외이도에 드라이버의 중앙을 정확히 맞추었을 때가 고음이 가장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드라이버의 위치가 중앙을 벗어날수록 부드러워지는 경향이 있다. 물론 최적의 착용감을 얻기 위한 위치가 극히 제한적인 헤드폰이니만큼 고음의 느낌까지 조절할 여유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본인이 느끼기에 가장 좋은 고음 느낌을 얻기 위해 위치 조절을 시도해 볼 만 하다.

  

중고음 대역이 특별히 강조되어 앞으로 나서는 느낌은 없지만 과하게 물러서지도 않기에 이런 점에서도 밸런스의 우수함이 감지된다. 만약 고음이 받쳐주지 못하면 다소 과한 부드러움으로 느껴지겠지만, 선명한 고음이 받쳐주는 부드러운 중고음은 대편성 음악에서 상당히 매력적이다. 또한 어떤 장르의 음악을 감상하더라도 자극적인 느낌 없이 음악의 분위기를 듣기 좋게 잘 재생해 낸다. 중고음에서 고음으로 넘어가는 대역이 부드럽게 느껴지는 특징은 초고음 재생 성능이 우수하면서도 지나치게 강조되지 않는 특징과 맞물려, 마치 스피커로 음악을 듣듯한 자연스러움으로 이어진다. 

  

중고음이 부드러운 대신 고음에서는 살짝의 피크 특성이 느껴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자극적으로 느껴질 정도는 아닌 미세한 수준이다. 치찰음과 드럼 심벌즈 등의 미묘한 사운드에서 살짝 착색이 느껴지면서도 전체적인 관점에서는 충분히 조화롭게 어울리는 분위기이다. 고음의 잔향 특성도 재미있는데, 마치 스피커 시스템과도 같은 약간의 울림이 느껴진다. 그래서 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정지를 시켜 보면 미세한 울림이 리스닝 룸의 잔향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울림은 설계 오류에 의한 공진으로 치부되지만, AB-1266은 공진은 존재하되 그 레벨이 매우 낮아서 주파수응답에 크게 영향이 없는 선에서 현장감의 증가라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러한 현장감은 오픈형 하우징 설계에 의해 외부 소음까지 고스란히 느껴지는 개방감과 더해져 보다 극대화된다.

  

그러한 고음 대역의 공진 특성과 일맥상통하는 또다른 특징은 바로 하모닉스 특성이다. AB-1266은 평판형 드라이버를 사용한 것치고는 객관적인 하모닉스 특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이 역시 과하지 않은 선에서 적절하게 음악의 하모닉스를 보강해 주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는 수준이다. AB-1266으로 어느 음악을 듣더라도 음역대가 꽉 찬 느낌이 드는 이유가 이 하모닉스 특성 덕분이다. 흔히 평판형 드라이버의 특징은 사운드의 객관성이라고 일컬어지지만, AB-1266은 오히려 적극적인 음악성을 다방면으로 가지고 있다. 이 점이 바로 일반적인 평판형 헤드폰들과 명확히 구별되는 AB-1266의 최대 강점이자 매력이다.

  

음장감 면에서는 폭넓은 재생 대역을 바탕으로 하여 좌우상하 방향으로 공간이 넓게 확장되면서 큰 공간을 가득 메우는 느낌을 준다. 반면에 중고음 대역의 에너지가 강하지는 않다 보니 전후는 다소 좁게 느껴지는 편이다. 그럼에도 보컬이 중심을 차지하는 느낌이 명확하여 충분히 좋은 입체감을 가지고 있다. 소편성과 대편성을 가리지 않고 음장감을 잘 살려준다.

  

한편, AB-1266이 감도가 낮은 헤드폰이기는 하나 음원의 미세한 노이즈까지 선명하게 잡아내는 높은 다이나믹 레인지 재생 성능을 가지고 있다. AB-1266을 제대로 재생해 내기 위해서는 앰프 역시 나이나믹 레인지가 여유롭고 최대 출력 역시 충분한 양질의 앰프를 요구한다. 평판형 드라이버의 특성상 임피던스는 가청주파수 전 대역에 걸쳐 거의 일정하므로 앰프 측의 출력 임피던스에 의한 매칭은 영향이 제한적이다.

  

  

  

  

어비스 AB-1266은 처음 접했을 때의 디자인에서 놀라고, 그리고 청음했을 때의 사운드에서 다시 한번 놀라게 되는 헤드폰이다. 디자인과 사운드 안팎으로 기존의 헤드폰에 대한 통념이 통하지 않는 다양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결정적으로 AB-1266은 그 놀라운 사운드를 그야말로 선택받은 두상을 가진 사용자에게만 허용한다. 일반적인 대중 시장 지향의 헤드폰이라면 그저 결함기에 불과하겠지만, 하이엔드 헤드폰으로서는 이 또한 하나의 개성으로 인정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 케이블 전문 회사가 개발한, 기존의 통념에서 벗어난 하이엔드 평판형 헤드폰

2. 폭넓은 주파수 대역폭과 자연스러운 음색, 그리고 미세한 왜율 특성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부한 현장감

3. 선택받은 두상이 아니면 쉽게 정착용하기 힘든 기구부 설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