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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자택에서 사용중인 진공관 파워앰프의 300B가 사망했다. 전원을 켠 후 잠시 후에 보니 플레이트가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었다. 바이어스 전류 상태를 알려주는 미터기의 바늘은 사정없이 오른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과전류가 흐르고 있다는 얘기였다. 재빨리 전원을 끄고 잠시 기다렸다 다시 플레이시켰지만 이번에는 아예 바이어스 전류가 흐르지 않았다. 포텐션미터기를 돌려 바이어스 전류를 ‘강제로’ 흘려주고 있는데 이번에는 섬광이 번쩍. 퓨즈도 나갔고, 진공관도 진짜 사망했다. 몇개월 동안이나 맑고 투명한 사운드를 내주던 300B가 이렇게 허망하게 운명을 다하고 만 것이다.

‘사인’을 나름 추측해보건대, 진공관 자체의 내구성이 약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마 필자 개인의 부주의가 크지 않았나 싶다. 즉, 음악신호가 전혀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도 심한 경우 만 48시간 이상 전원을 켜놓은 상태가 부지기수였다. 클래스A로 증폭하는 필자의 파워앰프 속성상, 음악신호가 없을 경우에도 그리드에 바이어스 전류가 계속 흐르고 있기 때문에(필라멘트 전류는 말할 것도 없고!) 이 그리드 혹은 안쪽의 필라멘트가 바깥쪽의 플레이트에 붙어버린 게 아닐까 싶다. 사망 직전 한쪽 플레이트가 벌겋게 달아오른 것은 이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진공관을 다른 브랜드 제품으로 바꿨고, 이후 잠들기 직전에는 반드시 앰프 전원을 끄고 있다.

평탄한 리니어리티, 짝수차 배음, 리퀴드한 음색, 튜브 롤링의 취미성 같은 진공관 앰프의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일부 애호가들이 두려워하는 게 바로 ‘진공관의 내구성’ 문제다. 일단 진공관의 수명이 2만 시간 내외인데다, 쇼트나 바이어스 과전류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든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진공관의 안정성 문제만 확실히 해결되면 진공관 앰프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증폭시스템이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실제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20년 이상 된 진공관 앰프들이 훌륭한 사운드를 내주며 현역으로 활동중인 것을 수십번 봐왔다. 게다가 증폭소자를 유저가 직접 손쉽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솔리드 스테이트 앰프는 꿈도 꿀 수 없는 일 아닌가.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번 시청기인 독일 옥타브(Octave)의 플래그십 인티앰프 ‘V80 SE’를 이리저리 꼼꼼히 살펴보다, ‘전기’에 대한 이들의 유독 높은 관심과 ‘전기제품’에 대한 여러 배려가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평소 같았으면 증폭회로나 투입된 진공관, 그리고 수치로 나타나는 다양한 스펙에 집중했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결론부터 말하면, ’만에 하나’ 벌어질 사태라도 미리미리 치밀하게 준비하는 독일인 특유의 장인 정신과 엔지니어링 기술에 매우 감탄했다. 소리? 매칭한 소스기기 덕도 크게 봤겠지만, 진정 역대급이었다.

“옥타브, 전기와 트랜스포머, 진공관을 잘 아는 제작사”

옥타브는 안드레아스 호프만(Andreas Hofmann)이 1986년 독일 남부의 블랙 포레스트에 설립한 진공관 오디오 제작사다. 무엇보다 트랜스포머와 전원보호회로를 직접 설계하고 제작한다. 특히 쇼트가 났을 경우 주요 회로를 보호하고 진공관 수명도 보장해주는 전원보호회로에 많은 노하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안드레아스 호프만의 부친이 이미 1968년부터 ‘호프만 트랜스포머’라는 트랜스 제작사를 운영해왔고, 안드레아스 호프만은 젊은 시절부터 이 회사에서 일을 해오다 옥타브를 설립했기 때문이다.

옥타브의 캐치프레이즈는 ‘안전한 진공관 앰프, 다루기 쉬운 진공관 앰프’다. “안전하고 다루기 쉽다면 진공관 앰프는 솔리드 앰프보다 훨씬 내추럴하고 세련된 사운드를 들려줄 수 있다”는 게 이 회사 지론이다. 일단 옥타브의 모든 진공관 앰프는 처음 전원을 켜면 4분 동안 음악이 나오지 않는다. ‘ISO9001’ 품질인증 테스트를 통과한 전류안정화 회로에서 이를 제어하기 때문이다. 또한 ‘에코 모드’(Eco Mode)라 해서, 10분 동안 음악 입력신호가 없다면 자동으로 스탠바이 모드로 변환된다. 옥타브에 따르면 이를 통해 불필요한 전력소모를 줄이고 진공관의 수명을 늘릴 수 있다고 하는데, 필자는 이 대목에서 뒤늦게 무릎을 치고야 말았다.

각 모델에 투입된 부품에 대한 이력과 성능을 데이터베이스화해 10년, 20년 이상 된 제품들도 바로 A/S가 가능하다. 내구성과 반영구 사용이라는 맥락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미리 진공관을 일정 시간 에이징 해 제품을 출시하는 것도 이들의 집요하리만치 꼼꼼한 ‘품질관리’(QC)의 일환. 이밖에 인티나 파워앰프의 경우 출력관에 따라 게인을 달리 설정할 수 있게끔 했다. 즉, EL34, 6CA7, 6L6, 6550, KT88은 ‘로우’(LOW), KT120, KT150은 ‘하이’(HIGH) 게인에 놓고 사용케 한 것. 이 역시 각 진공관에 대한 오랜 노하우를 바탕으로 사용자 편의성과 앰프 보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보여진다.  

전원트랜스, 입출력 트랜스를 직접 설계해서 감고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옥타브의 장점이다. 전원트랜스야 앰프 전 회로에 안정적인 전기를 공급한다는 점에서 핵심 부품이지만, 일부 내부 전선의 경우 음악신호도 같이 흐르기 때문에 사운드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앰프의 음색과 스피드, 주파수 응답특성을 좌지우지하는 출력트랜스 역시 진공관 플레이트에 B전압을 가하고, 푸쉬풀 앰프의 경우 서로 다른 위상의 증폭신호를 합쳐주기 때문에 역시 진공관 앰프의 명줄을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블랙박스’(Black Box)와 ‘슈퍼블랙박스’(Super Black Box)라는 별도의 외장 전원공급 캐패시턴스 모듈을 마련, 각 모델의 전원 상황을 유저가 직접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점도 옥타브만의 특징이다. 비슷한 개념의 외부전원장치를 내놓고 있는 일부 브랜드의 경우 각 모델마다 매칭할 수 있는 외부전원장치가 서로 달랐던 것에 비해, 옥타브는 전 모델에 모두 연결시킬 수 있다. 어쨌든 앰프에 내장된 파워서플라이보다 훨씬 비싼 캐패시터 등을 투입, 다이나믹과 스테이징, 저역의 탄력과 스피커 드라이빙 능력을 높였다고 한다. 이는 실제로 많은 유저들이 입을 모아 증언하고 있는 내용이다. 물론 비싼 ‘슈퍼블랙박스’ 성능이 더 좋다. 이밖에 포노 모듈용 블랙박스도 있다.

“플래그십 인티앰프 ‘V80 SE’의 설계디자인”

시청기인 ‘V80 SE’는 출력관에 현행 최고 스펙의 빔관인 KT150을 채널당 2개씩 써서 푸쉬풀 구동하는 인티앰프다. 출력은 120W(연속), 150W(최고). 초단관에는 쌍삼극관인 12AT7을 1개, 위상반전 및 드라이브관에는 역시 쌍삼극관인 12AU7을 2개(채널당 1개) 썼다. 물론 출력트랜스가 채널당 1개씩 뒷쪽 커버 안에 장착됐다. 본격 탐미에 앞서 ‘V80 SE’가 옥타브 라인업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짚어봤다. 아래 표는 필자가 직접 만들어본 2017년 2월 현재 ‘옥타브 앰프 라인업’이다.

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V80 SE’는 옥타브 인티앰프 라인업중 최상위 플래그쉽 모델이다. 숫자는 ‘V110 SE’가 더 크지만, ‘V110 SE’는 출력과 주파수응답특성에서 ‘V80 SE’의 동생이다. 출력을 기준으로 하면 ‘V80 SE’(120W), ‘ V110 SE’(110W), ‘V70 SE’(70W), ‘V40 SE’(40W) 순이다. 현행 빔관 중 최대 출력과 안정성을 자랑하는 KT150을 푸쉬풀로 출력관에 투입한 점은 파워앰프 ‘RE320’과 마찬가지. KT150을 상위 기종에 투입하고 있는 추세를 감안할 때 모노블럭 파워앰프(MRE 시리즈)에도 이 진공관을 쓴 상위 모델이 조만간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면 ‘V80 SE’와 이전 모델인 ‘V80’은 무엇이 다를까. ‘SE’(Special Edition) 버전에서는 무엇이 업그레이드됐을까. 이 역시 직접 표로 만들어 알기쉽게 비교해봤다.

일단 두 모델 모두 ‘초단관-위상반전 및 드라이브관-푸쉬풀 출력관’ 구성이다. 초단관으로 쓰인 쌍삼극관 내부의 2개 삼극관 플레이트에서 좌우 신호가 1차 전압증폭돼 각각 빠져나온 후, 위상반전관을 통해 정위상과 역위상으로 쪼개져 출력관 1개씩을 각각 드라이빙하는 구조다. 위상반전관이 쌍삼극관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두 캐소드에 공통 저항을 묶어 위상을 분리시키는 ‘리크 뮬라드’(차동증폭) 위상반전방식을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밖에 제품 뒷면에 6.3mm 헤드폰 출력단자를 마련한 점, 포노스테이지를 옵션으로 선택할 있는 점, 신호대잡음비가 진공관 앰프로는 이례적인 100dB를 기록하고 있는 점 등은 동일하다. 특히 옥타브 전체 라인업 중 유일하게 장착된 헤드폰 앰프의 경우, 솔리드 스테이트 구성인 점이 눈길을 끈다. 후면의 토글 스위치로 라인아웃과 헤드폰 아웃을 선택할 수 있다. 대응 헤드폰 임피던스는 30옴에서 200옴까지다. 200옴 연결시 왜곡율은 0.008%에 그친다.

두 모델의 가장 큰 차이점은 출력관 변경에 따른 출력의 향상이다. ‘V80 SE’가 KT150을 푸쉬풀 구동해, 전작보다 40W가 많은 채널당 연속출력 120W를 뽑아낸다. 초단관(입력관)이 12AY7에서 12AT7으로 바뀐 점도 눈길을 끈다. 출력관 교체에 따른 설계회로 변경 혹은 진공관 수급환경 등에 따른 선택으로 보여진다. 주파수응답특성이 전작에 비해 보다 광대역으로 늘어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무엇보다 자사 출력트랜스를 대폭 업그레이드했음이 분명해보인다.

실제로 옥타브는 ‘V80 SE’ 뿐만 아니라 전 모델이 ‘SE’ 버전이 되면서 드라이브단의 설계 개선과 출력트랜스 및 전원트랜스 업그레이드가 이뤄졌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함께 안정적인 구동을 위해 피드백 회로를 완전히 새로 손을 본 점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유저 입장에서 본다면 출력관의 바이어스 조정을 매우 정교하게 할 수 있어 다양한 빔관과 5극관을 선택해 장착할 수 있는 점이 가장 흥미롭고 취미성이 높다.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전면 패널은 왼쪽부터 셀렉터 노브, 서브 셀렉터 노브, 바이어스 세팅 노브, 볼륨 노브로 구성돼 있는데, 바이어스 조정은 표시창을 보면서 표시창 하단에 붙은 포테션미터를 소형 일자 드라이버로 들려가며 조정하면 된다. 즉, 바이어스 세팅 노브를 ‘바이어스’ 위치에 둔 뒤, ‘초록색+빨간색’ 불빛(KT150, KT120, KT88, 6550의 경우) 혹은 ‘노란색+초록색’ 불빛(EL34, 6CA7, KT77)이 들어올 때까지 미터를 돌려주면 된다. 물론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바이어스 전류가 증가하는 구조다. 이렇게 출력관에 따라 최적의 바이어스 전류를 흐르게 해준 뒤, 아까 언급한 뒷면의 토글 스위치로 ‘LOW’ 게인(EL34, 6CA7, KT77, 6L6, 6550, KT88, KT100)과 ‘HIGH’ 게인(KT120, KT150)을 선택하면 된다.

이밖에 ‘V80 SE’의 볼륨은 모터로 작동하는 가변저항식 볼륨을 썼으며 입력단자는 RCA 5조, XLR 1조를 갖췄다. 입력감도는 RCA, XLR 모두 300mV, 입력임피던스는 40k옴(RCA), 25k옴(XLR), 프리아웃시 게인은 6dB를 보이고 있다.

“셋업 및 리스닝”

소스기기는 린의 네트워크 플레이어 DAC인 ‘Klimax DS/3’, 스피커는 소너스 파베르의 3웨이 플로어 스탠딩 ‘Olympica III’를 동원했다. ‘Olympica III’는 감도 90dB에 임피던스 4옴, 35Hz~30kHz라는 광대역 주파수응답특성을 가진 베이스 리플렉스형 스피커다.

Anne Sofie Von Otter - Baby Plays Around

안네 소피 폰 오토의 여유와 호흡, 기척이 생생히 느껴진다. 그녀의 컨디션은 지금까지 수십번은 들어봤을 이 곡의 재생 중에서 최고조다. 기타 소리는 적당히 포실하고 양감있게 울려퍼진다. 체감상 SNR이 무척 높은데도 원곡 녹음에 들어간 노이즈까지 다 잡아낸다. 보컬의 중앙 포커싱, 피아노의 풍부한 배음, 청명하고 시원하면서 달콤하게 잘 뻗는 트럼펫의 고역 등 그야말로 역대급 재생이다. 보컬곡으로 다이애나 크롤의 ‘All or Nothing At All’(The Very Best of Diana Krall 앨범)도 들어봤는데, 크롤의 목소리는 촉촉하며 베이스 저역은 탄탄하다. 음들의 뉘앙스가 잘 전해진다.

Pazil Say - Paganini Jazz

누가 진공관 앰프를 ‘음색은 따스하지만 스피드는 좀 떨어진다’고 했나. VT-25나 6V6 같은 고전관 싱글 구동의 경우 그런 점이 매력이기는 하지만, 요즘 하이엔드 진공관 앰프는 오히려 서늘하면서도 빠릿빠릿한 스피드 특성을 보인다. 특히 이 곡에서는 숨돌릴 틈조차 주지않는 파질 세이의 빠른 피아노 타건을 실시간으로 잡아내주고 있어 정말 감탄했다. 타건의 강력함은 기본이고 놀림이나 터치감 같은 디테일한 항목들이 일제히 쉽게쉽게 관찰된다. 음끝은 지저분하지 않고 예리하며, 명확하고 선명하다. 그러면서 음들이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울리고 있다. 풍성하면서도 깨끗한 음. 이것이 바로 KT150이라는 신형관의 탁월한 물성이자 잘 설계된 진공관 앰프만이 전해줄 수 있는 ‘리니어한’ 재생의 세계라는 것이다.

Chet Atkins - Up in My Treehouse

각 악기의 이미징과 사운드 스테이징 실력을 체크하기 위해 자주 듣는 곡이다. 가장 놀란 것은 적막감. 피아노 건반을 꾹꾹 누르는 페달 밟는 소리(이것은 음이라기보다 압력이라 표현해야 옳다)까지 모조리 잡아낸다. ‘V80 SE’의 신호대잡음비가 100dB 이상이라는 것은 괜한 수치가 아니다. 무대는 광활할 정도로 넓게 펼쳐지며, 각종 퍼커션들이 빚어내는 음에서는 광채가 난다. 특히 밴조 음의 윤곽이 확연해 듣는 맛이 아주 좋다. 무대의 좌우 펼침도 대단하며, ‘V80 SE’ 파워단의 바로미터라 할 드럼의 저역 한방도 통쾌하게 터져나온다. 묵직하고 경쾌하다. 이 이율배반적인 덕목이 동시에 구현된 것이다. 퍼커션들은 저마다의 음색과 뉘앙스를 남김없이 전해준다. 소스기기로 쓰인 ‘Klimax DS/3’와 인티앰프의 프리단이 협공한 결과임이 분명하다.

Andris Nelsons - Shostakovich Symphony No.5

Boston Symphony Orchestra

처음 듣는 순간 이번이 또 한번의 역대급 재생임을 직감했다. 초반 팀파니 연타의 박력이 장난이 아니다. 금관은 맑고 빛나며 선명하고 투명하다. 쉽지 않은 체험이다. 정숙도는 청감상 파악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초저노이즈를 보이고 있다. 오케스트라의 무대는 청음실 바닥쪽으로 잘 깔리고, 스피커는 진작에 완전히 사라졌다. 이것이 과연 진공관 인티앰프로 울리는 사운드일까 의심이 갈 정도다. 프리앰프가 따로 없는 상태인데도 음색이라든가 무대감, 색조, 디테일이 너무나 잘 살아났다. 구동력 역시 지금의 스피커를 울리기에 조금치의 모자람이 없다. 그야말로 하이엔드 앰프라 이름붙이기에 손색이 없다. 오케스트라의 바디감까지, 이 곡에서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오디오적 쾌감이 쉽게 느껴졌다. 음의 윤기와 찰기, 배경의 잡스러운 보푸라기가 일체 없다.  

“총평”

사실 이들 곡 말고도 몇 곡을 ‘사심’을 담아 ‘즐겼다’. 제니퍼 원스의 ‘Famous Blue Raincoat’에서는 입술의 파찰음이 자극적이며 음 외에는 다른 것들이 전혀 없는 적막 같은 배경의 세계를 즐겼다. 평소 벙벙한 술빵만 먹다가 입자감이 보드랍고 빼곡한 고급 카스테라를 먹는 느낌이다. 브라이언 브롬버그의 우드 베이스 연주곡 ‘Come Together’에서는 저절로 “그럼 이 곡은 이렇게 나와야지” 찬탄이 터져나온다. 윤곽선이 분명한 저음, 쫄깃쫄깃해 탄력감이 느껴지는 저음이 이 곡에서는 응당 이렇게 나와줘야 하는 것이다. 솔티가 지휘하고 시카고심포니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말러 교향곡 2번 1악장’에서는 초반부 음상이 포말처럼 작고 부드러우며 정교하게 맺히는 모습이 참으로 관능적이다.

옥타브의 ‘V80 SE’는 어떻게 이런 궁극의 사운드를 들려줬을까. 일단 진공관 앰프의 시작이자 끝이라 할 트랜스포머를 인하우스 제작하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제작사는 필자가 아는 한 옥타브와 매킨토시, 그리고 대한민국의 올닉 정도뿐이다. 여기에 푸쉬풀 구동한 KT150의 스피커 드라이빙 능력과, ‘12AT7-12AU7’으로 이어진 입력단 및 드라이단의 탄탄한 전압증폭 과정도 크게 한몫했을 것이다. 내부 파워서플라이 파트의 정전압 능력도 재생 퍼포먼스에 크게 일조했음이 틀림없다.

맞다. ‘V80 SE’는 진공관이든 솔리드 스테이트든, 애호가들이 하이엔드 앰프에서 기대하는 사운드를 그대로 들려줬다. 게다가 최근 필자가 낭패를 본, ‘만에 하나’ 사태에 대한 전기적 보호장치까지 철저히 마련돼 있다. 정교한 바이어스 조정과 자동 스탠바이 모드 등으로 아무 근심없이 진공관 앰프를 즐길 수 있다는 이 심리적 안정감은 참으로 소중하다. 왜 그동안 외국 유명 오디오쇼에서 옥타브 앰프가 즐겨 매칭돼 왔는지 그 이유를 비로소 알겠다. 그런데 더 욕심을 내 ‘블랙박스’나 ‘슈퍼블랙박스’를 추가 연결한다면? 벌써부터 호기심이 발동한다.

by 김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