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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초상”

수많은 철학가와 아포리스트가 남긴 격언과 잠언들이 있으나 대게 무의미할 정도로 짧은 호흡을 갖기도 한다. 어떤 단어 하나가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무게와 깊이가 제한적이다. 그러나 적어도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의 책 ‘우상의 황혼’에서 쏟은 아포리즘은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다. “음악이 없다면 삶은 하나의 오류일 것이다”. 자칫 관습적 아포리즘으로 비칠 수 있으나 다시 곱씹어볼만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다시 접한 건 예상 밖으로 하이파이 오디오 메이커 피에가의 화이트페이퍼에서다.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하이파이 스피커를 설계하고 제작해온 굴지의 스위스 메이커 피에가. 그들은 단지 음향을 재생하는 스피커를 만드는 메이커가 아니라 자신들의 철학을 양질의 음향에 담아 음악을 재생하는 도구로서 스피커 제작에 매진해왔다.

복잡한 도시, 초고층 빌딩숲, 그 사이로 질주하는 고급 세단만 가득해 숨이 막힐 듯한 그곳으로부터 음악은 종종 우리를 해방시킨다. 오염된 환경, 하루라도 공사를 하지 않으면 이상한, 개발에 여념이 없는 도시는 살풍경하다. 사진과 회화, 영화와 필름 예술 등 모든 대중 예술이 그렇듯 음악은 메마른 시멘트 위에 내리는 촉촉한 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종종 강철의 차가운 감촉, 로봇 같은 우악스러운 오디오를 통해 음악을 섭취한다. 피에가는 오히려 럭셔리한 그 무엇과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갖는다.

때로 하이엔드 오디오는 비싸니까 럭셔리해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종종 딜러는 물론 평론가까지 동원되어 럭셔리 스위스 오디오의 우수성을 설파하기 바쁘다. 하지만 일반 컨슈머 오디오 제작자가 절대 따라할 수 없는 독보적인 성능과 음악성을 지녔기에 비싼 것이지 비싸기 때문에 럭셔리할 필요는 없다. 본말이 전도되면 진실은 왜곡되고 오히려 제품의 가치는 거짓으로 읽힐 위험이 있다. 피에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스위스’ 태생이라는 관념에 갇혀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알 것 같다. 피에가는 태생부터 럭셔리 따위가 아니라 음악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발가벗겨진 음악의 초상을 떠올린다.

“Coax 311”

‘Coax’라는 의미는 ‘Coaxial’로 이해할 수 있다. 다름 아닌 동축 형태라는 의미다. 피에가의 문은 ‘Classci’ 시리즈에서 열려 ‘Premium’과 ‘Coax’를 거쳐 ‘Master’까지 도착하는 경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경로 안에서 피에가가 설치해놓은 몇 가지 중요 테크놀로지가 차곡차곡 더해진다. 피에가의 스피커 설계는 Kurt Scheuch 가 마련한 문법 아래 한 치 오차 없이 상승 계단을 밟아나간다. 일단 기본 구성은 리본 트위터와 다이내믹 미드/베이스 우퍼의 조합이다. ‘Classic’과 ‘Premium’에서 일단 리본과 다이내믹 우퍼의 함수관계 위에 서 움직인다. 그러나 본류는 ‘Coax’부터다.

이유는 피에가 전체 라인업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클로저 로딩 방식이나 트위터 및 미드레인지 구경 및 설계 방식의 차이 등은 있으나 최상위 라인업가지 중/고역은 실상 동축 구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피에가가 동축 유닛을 고집하는 이유는 주파수 대역간 위차 오차와 이로 인한 위상 왜곡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이는 맑고 선명한 중, 고역 주파수 이음매를 만들어내고 거부감이나 스트레스 없이, 일렉트로닉, 록, 재즈에서 클래식 음악까지 맑고 선명하며 코히어런스 충만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핵심 설계다.

Coax 311은 무려 16년간 피에가가 지속, 유지해온 Coax 시리즈 변혁의 신호탄이다. 기존 Coax 리본 사운드를 계승하되 더 나은 성능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새로운 플랫폼 위에 서 있다. 진화의 핵심은 전방위에 걸쳐 드러난다. 일단 TIM, 즉 “Tension Improve Modules”라는 개념이 적용된다. 기존 Coax 시리즈에서도 알루미늄을 통째로 사출시켜 만든 고강도 인클로저 안에 진동 제어를 위한 소재로 목재를 사용했다. 그러나 이번엔 목제가 아니라 금속 보강으로 선회했다. 캐비닛의 팽팽한 장력을 유지하기 위해 볼트로 단단히 조여져 있으며 이는 부가적으로 아주 작은 진동까지도 억제해준다. 더불어 내부엔 점성을 가진 댐핑 필름을 사용해 마이크로 레조넌스까지도 제거하고 있는 모습이다.

두 번째는 리본 필름을 사용한 동축 유닛의 혁신이다. 피에가는 리본 유닛이 빠른 반응 속도 및 정교한 다이내믹 콘트라스트 확보에 유리하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했다. 동시에 그 제작 방식은 까다롭고 정밀한 수작업과 비경제적인 채산성을 수반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돔 형태 진동판이 갖는 방사각과 거리에 따른 불균일한 음압 감쇄 특성과 타협하지 않았다. 이번엔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결론은 소재와 구조 양 쪽에서 모두 새로운 모습으로 도출되었다.

일단 네오디뮴 마그넷을 사용하되 그 자력을 더 높였다. 기존의 굉장히 높은 자력을 자랑했던 피에가 유닛을 생각해볼 때 어느 정도 일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또 하나는 세심하게 제작된 고강도 강철로 폴 플레이트(Pole Plate)와 페라이트 구조를 만들어냈다. 이런 설계 목적은 더욱 더 정교하고 세밀한 사운드 표현력은 물론 효율을 높였다. 더불어 포일 다이어프램 아래 위치한 플랫 코일의 레이아웃 그리고 다이어프램의 댐핑도 모두 새로운 스피커 Coax 311 에 최적화시켰다. 겉으로 보이는 외관 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새로운 점은 우퍼 유닛이다. 이는 UHQD(Ultra High Quality Driver) 라고 명명된 신형 미드/베이스 우퍼로서 티타늄을 사용한 보이스코일을 사용하고 서스펜션 구조 등 모든 것이 새롭다. 예를 들어 독보적인 방식으로 제작된 고강도 알루미늄 다이어프램을 장착하고 있고 서라운드 엣지 부분엔 사선 물결무늬를 볼 수 있다. 아무튼 기존 모델과는 판이하게 다른 우퍼 유닛 또한 동축 리본과 함께 신형 Coax 의 진화를 대표하고 있다.

“새로운 사운드로 도약”

“공간을 수놓는 보석 같은 음표들의 향연”. 과거 피에가를 접한 후 내가 얼마간의 생각 끝에 피력한 언어 표현이다. 하지만 이번 Coax 311에서는 이 표현을 거두어들여야 할 것 같다. 단지 이 같은 표현으로는 조금 부족하기 때문이다. 함께 시청한 시스템은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리뷰 했던 웨이버사 AMP 2.5 인티앰프와 WNAS3 였기에 정확한 청음 테스트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아니 꼭 웨이버사 시스템이 아니더라도 Coax 311의 변화를 알아채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다. 그만큼 음질적 변화 폭은 크며 이는 사실 Classic 시리즈를 론칭할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Suzanne Vega - Tom’s Dinner

Solitude Standing

시치미 뚝 떼고 얇은 스탠드 위에 서있는 Coax 311, 만듦새와 표정마저도 그 외관에서는 절대 과거의 그것과 이별하지 않았으나 음질적 표정은 굉장한 폭의 변화가 명확히 포착된다. 우선 전반적인 대역 밸런스 자체가 저역 쪽으로 내려왔다. 대역 폭은 35Hz에서 50kHz 까지 광대역으로 상쾌하고 예쁜 보석 같은 고역을 가졌지만 중, 저역의 양감이 보강되어 더 풍부하고 포만감 있는 하단 대역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수잔 베가의 ‘Tom’s dinner’나 레베카 피전의 ‘Spanish harlem’ 같은 단출한 보컬 레코딩에서 더블 베이스는 살집이 통통하게 붙었고 더 심지 높은 저역을 투영해준다. 마치 B&W 나 PMC 등 스튜디오 모니터 계열 스피커의 플랫한 대역 밸런스는 놀라울 정도의 변화다.

Gaia Quartet - Borodin String Quartet No.2

Gaia Quartet

다소 밋밋한 재생음을 들려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알고 있다. 피에가는 중, 저역에서 약간 얇더라도 정확한 음정 표현이 가능했고 무엇보다 정갈하고 청아한 고역에서 매력이 빛나는 스피커라는 것을. 가이아 쿼텟의 보로딘 사중주를 들어보면 동축 리본 트위터에서만 맛볼 수 있는, 소리의 물리적 촉감이 손에 잡힐 듯하다. 다만 중저역 쪽이 보강되면서 좀 더 담백한 쪽으로 슬쩍 변화했다. 물론 그 안에는 여전히 싱그럽고 고운 촉감이 숨어있다. 특히 이론적으로 50kHz까지 뻗어나가는 리본의 선형적인 고역과 그로 인한 개방감이 바이올린 연주에서 드러난다.

Red Hot Chili Peppers - The Getaway

The Getaway

좀 더 리듬감 넘치며 동적인 표현이 돋보이는 레코딩을 찾다가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The Getaway’를 들어보니 역동적인 동적 구조 표현이 흥을 돋운다. 이 외에도 RATM, 마이클 잭슨, 에드 시런 등 팝, 록 음악에서도 한 자리에 주저앉아 정적이며 밋밋한 표현이 아니라 전진하려는 추진력이 붙었다. 전체적으로 번개처럼 빠른 순발력에 저역은 타이트하게 당겨진 소리. 더불어 대역이 겹치는 베이스와 드럼의 분리도가 높으면서도 일체화된 음악으로서 실체감이 높다. 순간적인 타격감은 포만감 넘치는 대형기 수준은 아니나 기존 피에가를 기반으로 예상했던 레벨보다 더 높은 쪽으로 드러났다.

Tutti - Bruckner Symphony No.9

Tutti Orchestral Sampler

[Tutti] 샘플러에서 브루크너 9번 교향곡 중 ‘Scherzo’를 통해 보여주는 Coax 311 사운드의 혁신은 명확하다. 고유의 착색이나 중, 고역대 피크 또는 시간축 위상 특성에 대한 진지하고 다각적인 고민이 만들어낸 정숙함. 그리고 전 대역에 걸쳐 마치 모니터 스피커처럼 균질하게 갈아낸 대역 밸런스. 이런 특성들은 피에가 북셀프의 청아하고 반짝이는 고역을 넘어 전대역에 걸친 스케일의 향상과 다이내믹스 향상으로 이어졌다. 기존 모델에 비해 중,고역 특색은 조금 감쇄되었을지 몰라도 전반적으로 객관적 특성 자체가 드라마틱하게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스테이징은 원근감, 심도가 일취월장했음을 알 수 있다.

“총평”

피에가 Coax 311은 기존에 머릿속에 있는 수많은 소리의 서랍들 중 하나, 피에가 사운드의 서랍을 열었다가 다시 닫게 만들었다. 조금은 당황스러울만큼 새로운 피에가 사운드의 혁신과 마주쳤다. 90dB 로 향상된 능률 덕분에 저역 드라이빙은 더욱 쉬워졌고 긴장된 저역 골격이 조금 느슨해지면서 양감과 굵직한 탄력은 오히려 증대시켰다. 50kHz 까지 뻗어나가는 광대역 리본의 성능은 그대로나 더 플랫한 주파수 특성은 안정감 넘치는 대역 밸런스와 정돈된 무대를 얻었다. 하이파이클럽의 작은 시청실에서 싱싱하고 활달한 특성을 가진 체르노프 일색 케이블 매칭에서도 얻을 수 있었던 특성이어서 그 변화가 더 놀랍다. 리본 트위터의 상큼한 고역에 B&W 등 스튜디오 모니터 계열의 안정감을 품고 싶다면 일청을 권한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