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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듀서의 소명

창조적 영감은 가장 멀리 떨어진 분야가 이합집산하면서 태어난다. 순간적인 번뜩임의 순간은 어쩌면 가장 일상적인 작업들로부터 시야를 떨어트리고 멍 때리듯 놀이를 즐길 때 찾아온다. 마치 뺑소니 자동차에 들이받은 듯한 충격은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며 변주 이상의 창조적 물꼬를 튼다. 항공 우주, 군사, 의료 등 여러 분야에서 종사했던 엔지니어들이 자신의 음악, 음향적 목적을 위해 하이엔드 오디오 분야에 뛰어들어 만들어낸 성과는 이제 놀랄 일도 아니다. 항공기용 알루미늄 빌렛이나 크루즈 미사일의 엔지니어링 기술, 비행기의 전원 장치, 사람의 생명을 다투는 의료 계측 장비 등을 다루었던 엔지니어가 고전적인 음향기기를 몰아내고 혁신을 이루어왔다.

소재 부분에서도 하이엔드 오디오는 여타 신소재 부문의 각축장이다. 카본은 물론 나노 그래핀이 사용되고 루비듐 클럭을 가정용 디지털 장비에 사용하기도 한다. 카메라 등에서 사용하던 마그네슘의 사용은 이제 보편적이며 세라믹, 다이아몬드, 베릴륨 등 고가의 소재들이 다양한 하이엔드 오디오에 쓰이고 있다. 그 구조에 있어서도 대단히 독창적인 형태가 사용된다. 과거 보편적인 위상 반전형 로딩 방식에서 나아가 트랜스미션라인의 변형, 평판형의 변종이 시도되기도 한다. 코일과 마그넷 그리고 진동판에서 출발한 주파수는 배플로 그리고 공기 중으로 흘러가 우리의 귀와 몸으로 전달된다. 

윌슨이나 아발론, 틸 같은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의 초석을 만든 스피커가 오디오파일의 귀를 강타했을 때 사람들은 한마디씩 했다. “스피커가 사라졌다.” 그렇다. 전기적 신호를 실제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물리적 사운드로 변환해주는 트랜스듀서의 절대적 이데아는 트랜스듀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다.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정의된바, 자신의 정체성을 마스터 음원의 정확한 재생이라고 확인한 뒤 그 소명과 목적을 달성함과 동시에 사라져 소멸하는 것. 아마도 트랜스듀서의 이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Courante”

16세기에 발생한 춤곡 “쿠랑트”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이 특이한 모양의 스피커. 스피커라는 정체성을 확인하기 전까지 쿠랑트는 일종의 조형물을 연상시킨다. 유럽의 어느 갤러리 어디엔가 커다란 홀에서 대리석 위에 자리 잡고 방문객이 눈을 치켜떠야 볼 수 있을 법한 모습.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상상할 필요가 없고 단지 기하학적 패턴과 소재, 그리고 작가가 이 조형적 형태에 투영한 의도에 대해 각자 다른 시각으로 한참 의미부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조형물의 목적이 음악을 재생한다는 정체성과 함께 그것도 매우 정교하고 깨끗하게 음악을 재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소명이 따라올 때 쿠랑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진다.

처음 쿠랑트를 들었을 때 스피커는 완벽히 사라졌다. 아마 눈을 감고 들었다면 스피커가 나를 향해 계속해서 쫓아오는 듯 들려 음악의 유령이 찾아온 것이 아닐까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존의 세계에서 쿠랑트는 두 지점에서 좌/우 채널을 담당하고 바닥 위에 꼼짝없이 붙어있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로부터 날아온 쿠랑트의 만남은 트랜스듀서, 즉 스피커로서 바라볼 때 대단히 많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Bayz Audio”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베이즈 오디오는 졸탄 베이(Zoltan Bay)가 설립한 스피커 메이커다. 졸탄 베이가 혹시 아마데우스 Philharmonia를 디자인한 장 누벨 같은 건축가거나 혹은 조각 등 미술계 출신이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단히 다양한 오디오의 설계와 제작에 참여했던 인물로 하이엔드 앰프와 미디어 플레이어, 스피커, 케이블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인물이다. 그래서 그가 ALMA가 주최하는 인터네셔널 심포지엄 & 엑스포(AISE)에서 스피커 이론을 설명했을 때 그리고 2018년 5월 독일 뮌헨에서 열린 하이엔드 오디오쇼에서 그의 스피커를 처음 내놓았을 때 사람들은 뭔가 기이한 스피커 설계가 하나 탄생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베이즈 오디오의 쿠랑트가 한국에 상륙했다. 실제 마주친 쿠랑트는 말 그대로 기이했다. 조형적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과연 어떤 사운드 철학을 위해 이런 스피커 디자인이 탄생했는지 논리적 설명이 필요했다. 그러나 직접 졸탄 베이와 인터뷰할 시간은 없었고 본사에서 발표한 자료를 검토했다. 우선, 이 스피커는 ‘Omni Directional’, 즉 무지향 스피커다. 이들이 별도로 정리한 이론에 의하며 ‘BRS’, 즉 ‘Bayz Radial Speaker’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일종의무지향 방식으로 보편적인 트위터에 비해 거리에 따른 시간차가 극도로 낮고 위치에 따른 위상 변이와 그로 인한 디스토션이 거의 없다는 설명이다. 위아래로 움직이며 실린더 형식의 멤브레인은 초경량 재질로 만들어져 신속, 정밀하게 반응하며 360도 전방위로 주파수를 방사한다. 

이런 형태의 유닛을 간단히 개발했을 리 만무하다. 졸탄 메이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했으리라. 그는 수년에 걸쳐 이 디자인을 연구해왔다. 기존의 스피커들보다 훨씬 빠른 반응 속도는 물론이며 정확한 위상과 낮은 링잉을 얻기 위해 다방면의 연구를 거친 끝에 이런 방식을 완성했다. 실제 그의 꿈을 물리적으로 실현시킨 조력자는 우리에겐 SB 어쿠스틱스의 프랭크 닐센(Frank Nielsen)이다. 이들의 연구와 노력으로 완성된 유닛은 정면과 측면 어느 곳에서도 동일한 주파수 반응 특성을 갖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360도 각도에서 선형적인 사운드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캐비닛은 보편적인 스피커처럼 상단에 중, 고역 드라이버 그리고 하단에 저역 드라이버를 탑재하는 방식이 아니다. 고역부터 저역에 이르기까지 마치 무한 배플 같은 형태로 이어져 있다. 조형적 측면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에 의해 의도된 것으로 졸탄 베이의 설계 자료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지는 부분이다. 한편 소재는 모두 고강도에 낮은 질량으로 매지코, 윌슨 베네시 등 여러 하이엔드 스피커 메이커들 활용하는 카본을 사용했다. 다양한 형태의 가공이 가능한 카본을 선택했지만 실제 제작 난이도는 상당히 높은 노하우를 요구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 부문엔 데네시안 오디오(Danesian Audio)의 András Voloscsuk이 직접 제조 팀을 이끌고 쿠랑트 스피커 디자인에 힘을 보탰다. 참고로 András Voloscsuk가 이끄는 팀은 오디오 분야가 아닌 레드불 에어레이스 월드 챔비언십을 위한 비행기 또는 F1 모노코크를 위해 새로운 카본 소재를 개발해낸 이 분야 전문가 집단이다. 

셋업 & 리스닝 테스트

베이즈 오디오의 첫 번째 도전 쿠랑트에 대해 그들이 내놓은 스펙은 우선 주파수 응답 특성이 28Hz에서 22kHz라는 사실이다. 초저역을 20Hz에서 40Hz라고 할 때 초저역 하한에 거의 가까운 풀레인지급 스피커라고 볼 수 있다. 후방에 포트를 마련하고 있고 두 개의 유닛을 움직여 중앙의 넓은 트위터로 주파수를 방사하는 풀레인지 무지향 스피커임을 감안하면 충격적인 저역 하강 능력이다. 

한편 공칭 임피던스는 4옴에 능률은 2.83V/m 기준 90dB로 낮지도 높지도 않은 수준이다. 흥미로운 것은 제조사에서 최고 앰프 출력은 50와트 수준으로 추천하고 있다는 것. D 클래스보단 진공관 또는 A, AB 클래스 트랜지스터 앰프 중 중출력 이상의 제품과 좋은 매칭을 이룰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 테스트에서 앰프는 매킨토시 C1100 프리앰프에 매킨토시 MC611을 사용해 충분한 출력과 저역 제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참고로 소스기기는 W 라우터/W 코어 콤비에 린 클라이맥스 DS/3를 사용했고 청담동 하이파이클럽 메인 홀에서 테스트했음을 밝힌다.

Kat Edmonson - Lucky

Way Dowon Low

최근 몇 년간 필자는 무척 다양한 신제품들을 다루어오고 테스트했다. 매지코, 윌슨, YG 어쿠스틱스 및 비비드 오디오 등 메이저 하이엔드 스피커에서부터 정전형과 평판형 및 혼 타입 스피커까지 셀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캣 에드몬슨의 ‘Lucky’를 재생하자 기존에 들었던 사운드는 모두 잊게 만들 만큼 독특한 사운드 스펙트럼에 놀랐다. 보컬과 실제 물리적 거리는 공간의 제약을 벗어던지고 훌훌 공기 중으로 떠올라 저 깊은 곳에서 들려온다. 저만치 깊고 높은 곳에서 마치 수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한 보컬 음상이 손에 잡힐 듯 일렁인다. 타악은 어떤 노이즈도 없이 맑고 깨끗하게 닦은 듯한 표면 질감을 선보이며 보편적인 로딩 방식 및 캐비닛 구조에선 절대 표현할 수 없는 맑은소리를 들려준다. 

Gidon Kremer - Oblivion

Hommage a' Piazzolla

피아노나 보컬 레코딩에서 이미 스피커는 손쉽게 사라져버렸다. 특히 어떤 가상공간에 직접 청취자를 인입시킬 듯한 홀로그래픽 음장감은 쿠랑트의 설계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인클로저의 불규칙한 반사와 회절을 막기 위한 여러 방법들이 수많은 엔지니어들에 의해 개발되었지만 쿠랑트는 마법처럼 인클로저의 울림은 물론 캐비닛의 존재 자체를 소멸해버린 소릴 표현한다. 예를 들어 기돈 크래머의 ‘Oblivion’을 들어보면 노이즈와 잡음에 민감한 피아노 사운드에 캐비닛을 인한 어떤 잡음이나 내부의 브레이크 모드가 감지되지 않는다. 마치 정전형 스피커의 빠른 반응 속도와 핀포인트 포커싱을 상상하게 만든다. 

Brian Bromberg - The saga of harrison crabfeathers

Wood

그러나 무엇보다 쿠랑트에 대해 의심했던 점은 저역 하강 능력 및 적절한 양감 표현이다. 정전형같은 모습이라면 실망했을 것이다. 쿠랑트를 통해 브라이언 브롬버그의 ‘The saga of harrison crabfeathers’를 재생하자 역시 저역 양감은 보편적으로 이 정도 내부 용적을 가진 스피커에 비하면 양감은 약간 적은 편이다. 대신 무지향 설계의 트위터의 그것처럼 투명도와 해상도는 어떤 스피커보다 더 뛰어나다. 묵직하고 과장된 저역 대신 약간 슬림하지만 후방에서 명료하고 깨끗하게 바닥을 두드리는 저역은 오히려 현장의 그것처럼 자연스럽다. 더불어 더블 베이스가 휘몰아칠 때도 부산스럽게 들썩이지 않으며 미동도 없이 정확한 옥타브를 오르내린다. 

Gardiner - Cum sancto spiritu

Bach Mass in Bminor

쿠랑트는 스피드가 매우 빠른 편으로 속사포처럼 빠른 잽으로 공격하는 타격음들도 매우 민첩하게 끊어내며 어떤 마스킹도 느낄 수 없다. 빠르게 서스테인에 이르고 릴리즈되며 지저분한 잔상 없이 빠르게 다음 음으로 바통을 이어준다. 이런 스피드, 엔벨로프 특성 덕분에 리듬감과 추진력도 상당히 훌륭한 편이며 무대 표현은 윌슨이나 오디오피직 등 음장감 좋기로 소문난 스피커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빼어나다. 가디너의 바흐 ‘Cum sancto spiritu’를 들어보면 특히 깊이 부분에서 전례 없이 높은 심도를 보여주어 실제 물리적 거리를 넘어 녹음된 콘서트홀로 확장시켜 준다. MBL 같은 무지향 스피커처럼 넓은 스윗스팟을 갖진 않지만, 청취 위치에 따른 정위감 왜곡은 매우 낮은 편이다.

총평

리스닝 테스트 동안 이 스피커를 만들어낸 졸탄 베이의 음향학적 접근과 디자인에 놀랐다. 또한 매칭 면에서도 그리 까다롭지 않다. 매킨토시 MC611로도 충분히 제동이 가능했으며 저음반사형임에도 웬만한 공간에선 저역 부스팅이 없어 공간으로 인한 부밍 걱정은 없을 듯하다. 더불어 증폭 효율이 좋고 출력 수치가 높은 앰프보단 순도가 뛰어난 하이엔드 앰프가 제격일 것으로 예상한다. 다만 제 실력을 충분히 펼쳐 보일 수 있도록 넉넉한 후방 거리와 공간을 요구한다. 

만일 스피커의 소명이 소리를 방사하고 소멸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사라지는 것이라면 쿠랑트는 모든 것을 해냈다. 소리의 출발 지점은 주파수와 관계없이 동일한 지점이며 우리는 자유롭게 공간에 뿌려진 소리를 듣고 즐긴다. 스피커가 어디에 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스피커는 사라졌지만, 음악은 끊임없이 우리를 감동의 음악 세계로 인도해줄 뿐이다. 쿠랑트는 끝없이 음악을 생성해내고 끝없이 공간 속으로 소멸을 반복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면 트랜스듀서로서의 소명은 충분히 다했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