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좋은 스피커에 대한 기준은 어쩌면 간단한 것인지 모른다. 예를 들어 음악을 듣다가 자꾸 볼륨을 올리고 싶어지면 된다. 됨됨이가 별로인 스피커는 볼륨을 올리고 싶어지기는커녕 본능적으로 소리를 얼른 줄이게 된다. 스피커가 신경질을 내고 비명을 지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런 스피커의 음은 대개 거칠고 시끄러우며 듣기에 괴롭다.

이에 비해 좋은 스피커는 볼륨을 높여도 앰프만 받쳐주면 대편성곡을 들으며 잠을 잘 잘 수가 있다. 실제 콘서트홀에 갔을 때 느끼는 그 편안함처럼 말이다. 이 밖에 아주 작은 볼륨에서도 소리가 어디에 파묻히지 않고 잘 들리는 것, 음악이 나올 때 옆 사람과 일상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 음끝이 보드랍고 매끈한 것도 좋은 스피커의 면모다. 

필자가 들어본 스피커 중에서 이렇게 ‘볼륨을 자꾸 올리고 싶어지는’ 스피커는 꽤 있었다. 소형 북쉘프 중에서는 하베스의 P3ESR과 KEF LS50, 키소 어쿠스틱의 HB-X1, B&W 805 D3가 압도적으로 좋았다. 플로어 스탠딩 스피커 중에서는 B&W 802 D3와 타이달의 Piano G2, 대구경 우퍼 스피커 중에서는 드보어 피델리티의 Orangutan O/96이 기억에 남는다. 이 밖에 YG 어쿠스틱스, 매지코, 락포트, TAD는 거의 전 라인업이 이런 황홀경을 선사했다.

그리고 최근 국산 브랜드 중에서 이런 볼륨업의 유혹을 느낀 스피커가 있으니 바로 이번 시청기인 J&A 어쿠스틱스(J&A Acoustics)의 R9이다. 전면 알루미늄 배플에 4개 유닛이 달린 플로어 스탠딩 스피커로, 대편성곡을 크게 틀어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 대단했다. 오히려 스피커가 그런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이 스피커는 앞서 하이파이클럽 시청회 때도 들었는데 참석한 애호가들도 소리에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J&A 어쿠스틱스와 R 시리즈의 탄생

지난 2017년 여름 독특한 형상을 지닌 국산 스피커가 출시됐다. 럭비공 혹은 커다란 타조알을 닮은 인클로저는 다름 아닌 청동. 에밀레종을 탄생시킨 바로 그 청동이다. 앞에 박힌 유닛은 독일 아큐톤의 6.5인치 세라믹 드라이버. 이 중저역 인클로저 위에는 ‘트위터 온 톱’ 형식으로 작은 인클로저가 붙어있었다. 역시 청동 인클로저에 아큐톤 트위터를 장착했다. 이 스탠드 일체형 스피커 이름은 Aero500이었고, 이 스피커를 데뷔작으로 내놓은 제작사가 J&A 어쿠스틱스였다.

J&A 어쿠스틱스는 모토로라 미국 본사에서 스마트폰 관련 제품개발 담당 부사장을 역임한 안민구 대표가 2017년 초 설립한 스피커 전문 제작사. 처음 2012년 한국에 돌아와 아마추어 연극배우 및 가구 작가의 길을 걷다가 스피커 제작에 뛰어들었다. 국제전자상가에서 우연히 들은 빈티지 AR 스피커에 감동의 눈물을 흘린 것이 계기였다. 사명 ‘J&A’는 공동 설립자인 장수홍 서울대 미대 명예교수와 안 대표의 영문 이니셜에서 따왔다.

J&A 어쿠스틱스는 2017년 가을 플로어 스탠딩 모델 Aero700을 내놓았다. Aero500이 날렵하게 생긴 알루미늄 스탠드 위에 붙박이로 장착된 스탠드 마운트 스피커인데 비해, Aero700은 자작나무 합판으로 짠 사각 인클로저에 10인치 우퍼와 아큐톤 트위터를 집어넣고 그 사각 인클로저 위에 Aero500의 청동 인클로저를 올려놓았다. Aero500에 있던 청동 인클로저의 베이스 리플렉스 포트를 없애 밀폐형으로 변신한 것이 큰 변화. 확실히 전작보다 에너지감이 높고, 아큐톤 유닛답게 일체의 색 번짐이 없는 소리였다.

그리고 올해 3월 하이파이클럽이 주최한 2019 서울국제오디오쇼에서 J&A 어쿠스틱스의 새 R 시리즈 스피커 3종이 선보였다. 이번 시청기인 플로어 스탠딩 R9과 스탠드 마운트 R5, R3였다. 베이스 리플렉스형 R9은 스캔스픽 베릴륨 돔 트위터와 스카닝 5인치 미드레인지, 6.5인치 우퍼 2발 조합이고, 밀폐형 R5와 R3는 모두 스캔스픽 트위터와 미드우퍼(R5는 6.5인치, R3은 4.5인치)를 썼다. 세 모델 모두 전면의 통 알루미늄 배플의 두께가 25mm에 달할 만큼 진동제어에 큰 신경을 썼다.

R9 기본 팩트 체크

R9 스피커는 기본적으로 4유닛, 3.5웨이 플로어 스탠딩 스피커로, 트위터는 덴마크 스캔스픽(Scanspeak)의 베릴륨 돔 트위터, 다른 유닛들은 덴마크 오디오 테크놀로지 스카닝(Audio Technology Skaaning) 유닛을 썼다. 위부터 5.5인치 미드레인지, 1인치 트위터, 6.5인치 우퍼 2발 구성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R9에 투입된 각종 제진 대책. 제작 단계 때부터 바닥면의 스파이크와 슈즈를 각종 제진 액세서리로 유명한 하이파이스테이(Hifistay) 제품으로 특주했다. 4개 유닛이 두께 25mm의 알루미늄 배플에 장착된 것도 이러한 제진 대책의 일환. MDF 재질의 인클로저 두께가 30mm에 달하는 데다 여기에 두터운 알루미늄 배플을 붙인 후 4개 유닛을 장착, 쓸데없는 인클로저 진동이 유닛에 섞이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다.

4개 유닛이 모두 각각의 챔버에 수납된 점도 눈길을 끈다. 미드레인지, 트위터, 어퍼 우퍼(upper woofer)는 밀폐형 챔버에 수납됐고, 로우어 우퍼(lower woofer)는 베이스 리플렉스형 챔버에 붙었다. 포트는 후면 바이와이어링 터미널 위에 나 있다. 이러한 독립 챔버 설계는 각 유닛 후면파에 의해 다른 유닛 진동판의 움직임이 교란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R9의 공칭 임피던스는 4옴, 감도는 87dB인데, Aero700(6옴, 88dB)보다 임피던스와 감도가 낮아진 것은 유닛 변경과 3개 유닛의 밀폐형 설계 때문으로 보인다. 주파수 응답 특성은 30Hz~40kHz, 크로스오버 주파수는 70Hz, 700Hz, 2700Hz. 전기적으로 어퍼 우퍼가 700Hz 이하 전 대역, 로우어 우퍼가 70Hz 이하 대역만을 커버하는 3.5웨이 구성이지만, 어퍼 우퍼를 수납한 챔버가 일종의 어쿠스틱 밴드위쓰(bandwidth. 700Hz~70Hz) 필터 역할을 해 사실상 4웨이로 작동한다는 게 안 대표의 설명이다.

R9 키워드 ‘넷’ = 스캔스픽 베릴륨 트위터, 스카닝 미드/우퍼,

하이파이스테이 슈즈, 문도르프 네트워크 튜닝

R9을 좀 더 파고 들어가 봤다. 우선 유닛이다. 1인치 스캔스픽 베릴륨 돔 트위터는 D3004/664000 유닛으로, 베릴륨 진동판답게 40kHz까지 평탄하게 뻗는 주파수 응답 특성과 스위트 스폿을 벗어나도 소리가 잘 들리는, 이른바 오프 액시스(off-axis) 응답 특성이 돋보이는 유닛이다. 보이스코일의 균질한 피스톤 운동을 위해 후면에 둥근 마그넷이 6개 꽃잎 모양으로 붙어있는 점(AirCirc Motor Design)이 눈길을 끈다.

스카닝 유닛은 폴리프로필렌 콘에 더스트 캡이 일체형으로 성형된 C-Quenze 드라이버로, 스카닝에 따르면 Flex Unit보다 주파수 응답 특성이 개선됐다. 바스킷은 다이캐스트 알루미늄, 보이스코일은 알루미늄 재질. 콘 재질로 폴리프로필렌을 쓴 것은 Q 값이 낮아 그만큼 댐핑력이 높고 자연스러운 음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5.5인치 미드레인지는 15H52 유닛(Qts 0.33, 공진 주파수 48Hz), 6.5인치 우퍼는 18H52 유닛(Qts 0.32, 공진 주파수 40Hz)을 썼다.

개인적으로 R9 외관에서 눈길을 끈 것은 스피커 발밑에 있었다. 국내외에서 평판이 높은 하이파이스테이(Hifistay)의 스파이크와 슈즈를 투입, 제진 대책에 만전을 기한 것. 슈즈의 경우 다이아몬드 바이트로 두랄루민을 절삭 가공한 Flat Shoes 60으로, 스파이크가 놓이는 중앙은 스테인리스 스틸을 써서 뾰족한 스파이크 긁힘 따위는 걱정 안 해도 될 듯싶다. AB 테스트는 못해봤지만, R9이 들려준 단단하고 명료한 소리는 이 하이파이스테이 슈즈 덕을 크게 봤을 것으로 보인다.

크로스오버 네트워크 회로에도 큰 공을 들였다. 지난해 여름 경기 판교의 J&A 어쿠스틱스 본사를 방문, R 시리즈 프로토타입 네트워크 튜닝 과정을 지켜본 적이 있는데 안 대표의 꼼꼼함이 거의 결벽증적 수준이었다. 문도르프 오일 커패시터 등을 호화롭게 투입한 것은 기본이고, 자신이 원하는 음을 얻기 위해 특히 3.5웨이 R9의 경우 네트워크 튜닝 작업에만 꼬박 1년이 걸렸다.

셋업 및 시청

R9을 하파이클럽 제 1 시청실에서 찬찬히 들어봤다. 시청에는 마이트너의 MA-1 DAC, 일렉트로콤파니에의 프리앰프 EC4.8, 스테레오 파워앰프 AW250R을 동원했다. 웨이버사의 W Core와 W Router를 활용해 주로 룬(Roon)의 타이달 음원과 NAS 음원을 들었다. AW250R 파워앰프의 경우 8옴에서 250W, 4옴에서 380W, 2옴에서 625W를 내는 대출력 앰프로, 채널당 2조씩 마련된 스피커 터미널을 통해 바이와이어링(더블런)이 가능한 점이 돋보인다. 실제 시청시에도 스피커케이블 2조를 활용, R9을 바이와이어링으로 접속했다.

Andris Nelsons, Boston Symphony Orchestra

Shostakovich Symphony No.5

Shostakovich Under Satlin’s Shadow

4악장이 시작되자마자 보무 당당한 음이 펼쳐지며 스피커가 사라진다. 시청실에 퍼진 음들 중에서 그 어느 것도 스피커 유닛에 달라붙지 않았다. 예전 동축 KEF LS50을 들으며 감탄했던, 음들이 아주 얇게 슬라이스 되어 나오는 모습이 이 4개 유닛 스피커에서 다시 재현될 줄은 예상도 못 했다. 각 악기의 음상은 또렷한 상태. 소릿결 자체는 락포트나 YG 어쿠스틱스 스피커처럼 아주 부드럽거나 고운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폴리프로필렌 유닛들로 이런 매끄러운 음을 탄생시켰다는 게 놀랍다. 하지만 R9에서 가장 감탄한 것은 팀파니가 휘몰아칠 때에도 전혀 허둥지둥 대거나 힘들어하지 않는다는 것. 특히 막판 2분 총주 파트에서는 마치 밤하늘의 불꽃놀이처럼 음들이 확 터지는 모습이 대단했다. 소형 스피커는 흉내조차 내지 못할 풍성한 저역의 양감과 밀도감, 펀치력이라 할 만하다. 스카닝 유닛의 타악 사운드 질감은 역시 발군이다.

Claudio Abbado,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Tuba Mirum

Mozart Requiem

아바도의 모차르트 레퀴엠, 그중에서도 ‘Tuba Mirum’(기적의 나팔소리)을 골랐다. 앨범 표지에 나온 4명의 성악가 순서 그대로 음상이 정확히 제자리에 맺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물론 소스기기의 해상력이 받쳐줘야 하지만 무대와 이미지를 그려내는 스피커의 능력이 모자라면 4명의 음상이 중첩되기 일쑤다. 곡이 시작하자 오른쪽 R9 스피커 앞쪽에 바리톤이 서 있다. 바리톤이 이렇게나 오른쪽에 등장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 이어 테너와 메조 소프라노, 소프라노가 차례대로 성큼성큼 안쪽으로 들어온다. 좌우 스피커의 밸런스가 기본적으로 잘 잡혀있다는 반증이다. 소프라노의 고음에는 홀톤이 가득 베어 있어, 아주 약간의 시차를 두고 찾아온 잔향음에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났다. 4명이 함께 노래를 부를 때는 진짜 4명이 한자리에서 부르는 것 같다. 이게 당연한 것 같지만 이 같은 소위 ‘오가닉’(organic) 사운드는 좀체 도달하기 힘든 경지다.

나윤선 - Mystic River

Immersion

이 곡은 타이달에는 아직 없는 상태여서 코부즈(Qobuz) 24비트 음원으로 들었다. 필자 바로 앞에 등장한 드럼의 실체감과 탄력감, 펀치감이 대단하다. 지난 4월에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기도 했던 나윤선이 다시 하이파이클럽 시청실을 찾은 듯, 그 음상이 또렷하게 맺힌다. 실제 들었던 나윤선의 목소리가 이 재생음에서 생생히 느껴진다. 그만큼 중역대에 착색이 없는 소리다. 이 밖에 별의별 소리가 다 들리는 점에도 감탄했는데, 마이트너 DAC과 일렉트로콤파니에 프리앰프 공이 크긴 하지만 R9은 해상력에서도 어디에 꿇리지 않을 스피커다. 한 음 한 음 분명한 저역, 단단하게 조여진 저역도 이러한 해상력 덕분이다. 악기들이 전후좌우, 위아래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것 같으면서도 일종의 일사불란한 기운이 느껴진 것은 그만큼 음악에 대한 이 스피커의 이해도가 높다는 반증이다.

Fazil Say - Paganini Jazz

Say Plays Say

처음부터 그랜드 피아노가 등장했다. 미니어처도 아니고 빅마우스도 아니다. 배음은 풍부하고, 여린 음은 어디 하나 다치지 않았으며, 음이 앞으로 치고 나가는 과정에는 일체의 잔상이나 머뭇거림이 없다. 한마디로 쏜살같이 내빼는 음들. 그러니 이토록 음이 깨끗하게 들릴 수밖에. 이는 3개 유닛의 챔버를 밀폐형으로 설계한 덕을 크게 본 것으로 보인다. 이 곡 특유의 무시무시한 저역이 제대로 터져 나온 것은 물론이다. 사실 이 곡은 볼륨을 높여 한 번 더 들었는데, 볼륨을 높여도 스피커 유닛이 ‘나, 여기 있어요’ 식으로 아우성치지 않아 감탄했다. 볼륨을 높여도 스피커가 여전히 자신의 존재를 감춘다는 것, 음악을 들을수록 이 점이 R9의 최대 매력이다. 앞서 하이파이클럽 시청회 때보다 고역이 더욱 매끄러워진 것을 보면 그 사이 스피커가 더욱 에이징이 된 듯하다.

총평

이제야 J&A 어쿠스틱스가 추구했던 음이 R9에서 나온 것 같다. 단단하고 명료한 음, 풍성하고 보드라운 음이다. 미드와 우퍼 2발을 모두 스카닝 유닛으로 통일한 점, 트위터를 포함해 위쪽 3개 유닛 챔버를 밀폐형으로 설계한 점, 두터운 알루미늄 배플을 보강한 점, 하이파이스테이 슈즈로 받친 점이 이같은 음 만들기에 일조를 했을 것이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베릴륨 트위터와 나머지 유닛의 밸런스 면에서 트위터가 조금 튀는 것 같지만 이는 에이징의 문제일 수도 있다. 볼륨을 자꾸만 높이게 되는 '메이드 인 코리아' 스피커를 만나 반갑다. 

by 김편 오디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