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예전 KEF ‘LS50 Anniversary’ 스피커를 개봉했을 때가 떠오른다. 미국 스테레오파일에서 2012 올해의 제품으로 선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생각보다 덩치가 크고 무거운 데다, ‘Uni-Q’(유니큐) 동축유닛이 탐스러운 오렌지 빛깔이어서 놀랐다. 이 스피커가 펼쳐낸 음에는 더 놀랐다. 마치 슬라이스 햄이 캔에서 빠져나오듯 음들이 쑥쑥 아무 저항 없이 유닛에서 이탈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이후에도 KEF 스피커는 계속해서 접할 수 있었다. 2011년에 출시된 날개 모양의 플래그십 ‘Blade’(블레이드)에서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섬세하고 소프트한 음이 스르륵 펼쳐졌고, 2014년에 나온 ‘The Reference’(더 레퍼런스) 시리즈는 어디 한 곳 빈틈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폭신폭신한 음을 선사했다. 2015년 독일 뮌헨오디오쇼에서는 ‘Blade 2’(블레이드2)의 시연 현장을 지켜보기도 했다.

이런 필자에게도 최근 접한 ‘New R Series’는 신천지였다. 지난달 하이파이클럽 시청회에서 플로어스탠딩 R11, 리뷰용으로 스탠드 마운트 R3를 들었는데 청감상 거의 더 레퍼런스 시리즈에 필적할 만했다. 특히 새 유니큐 동축유닛 밑에 6.5인치 우퍼를 단 3웨이 R3는 북쉘프 특유의 정교한 음상과 사운드스테이지까지 보태져 시청 내내 감탄, 또 감탄했다.

New R Series의 탄생

조금 찬찬히 따져보자. KEF를 상징하는 가장 강렬한 키워드는 역시 1988년 탄생한 유니큐 드라이버다. 미드레인지 유닛의 중심에 트위터를 박아넣음으로써 방사음의 중심축을 일치시킨 동축 유닛인데, LS50은 물론 블레이드, 블레이드2, 더 레퍼런스 시리즈, 기존 R 시리즈, Q 시리즈에 모두 이 유니큐 드라이버가 장착됐다. 트위터 앞쪽에 케이크 꽃장식처럼 생긴 탠저린(Tangerine) 웨이브 가이드가 있는 점이 특징이다.

오리지널 R 시리즈는 KEF 창립 50주년 기념모델이었던 LS50에 앞서 2011년에 출시됐다. ‘R’은 ‘혁명적인’이라는 뜻의 영어단어 ‘Revolutionary’의 약자다. 라인업은 2개의 북쉘프(R100, R300), 3개의 플로어 스탠딩(R500, R700, R900), 2개의 센터(R200c, R600c), 1개의 다이폴(R800ds), 1개의 서브우퍼(R400b)로 짜여졌다. R 시리즈는 하위 Q 시리즈와 상위 레퍼런스 시리즈 사이에 포지셔닝됐고 이후 여러 매체에서 수상하며 국내외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새 R 시리즈는 2018년에 나왔다. 꼭 7년 만에 이뤄진 업그레이드다. 따라서 새 R 시리즈에는 그사이에 나왔던 상위 모델들(더 레퍼런스, 블레이드2)의 기술들이 트리클 다운됐다. 방한한 KEF 브랜드 앰배서더 벤 하겐스(Ben Hagens) 씨에 따르면 “이름만 빼고 다 바꿨다”고 한다. 무려 1000여개 항목에 걸쳐 개선이 되었다. 라인업은 1개의 북쉘프(R3), 3개의 플로어 스탠딩(R5, R7, R11), 1개의 센터(R2c), 1개의 하이트(R8a)로 구성됐다.

KEF R3 유닛 분해도

새 R 시리즈는 무엇보다 12세대로 진화한 유니큐가 가장 큰 특징이다. 참고로 현재 더 레퍼런스 시리즈는 10세대 버전이다. 여섯 모델 모두에 똑같이 투입되는 유니큐 유닛은 125mm(5인치) 알루미늄 미드레인지 드라이버와 25mm(1인치) 알루미늄 돔 트위터의 결합으로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중역과 고역을 선사한다. 12세대가 되면서 미드레인지 유닛의 콘과 서라운드가 새로 바뀌었고, 모터 시스템(보이스코일+폴피스+마그넷)도 대폭 개량됐다.

새 유니큐에 투입된 신기술 중에서는 두 중고역 유닛의 중첩영역에서 발생하는 공진을 최소화하는 ‘콘 넥 디커플러’(Cone Neck Decoupler), 소리가 빠져나가는 틈새를 만들어 트위터의 치찰음을 제거하는 ‘트위터 갭 댐퍼’(Tweeter Gap Damper)가 돋보인다. 더 레퍼런스 시리즈에서 파생된 ‘쉐도우 플레어’(Shadow Flare)는 웨이브 가이드 효과를 확장, 트윈 링 구조를 통해 캐비넷의 회절을 감소시키는 기술이다.

KEF R3 플랙시블 포트 테크놀러지

이 밖에 베이스 리플 렉스 포트 중간에 탄성체를 집어넣어 저역 공진이 중역대를 컬러링하는 것을 막는 ‘플렉시블 포트 테크놀로지’(Flexible Port Technology)도 새롭게 투입됐다. 또한 새 R 시리즈에는 전작에 비해 보다 가벼워진 새 베이스 드라이버가 장착됐고, 캐비넷 내부구조도 보강했으며, 네트워크 설계도 크로스오버 주파수 부근의 왜곡을 최소화하는 쪽으로 변경됐다.

R3, 새 R 시리즈의 유일한 스탠드 마운트

시청기인 R3는 새 R 시리즈의 유일한 스탠드 마운트 스피커다. 그럼에도 엄연한 3웨이 스피커다. 배플 위쪽에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12세대로 진화한 유니큐, 바로 아래에는 6.5인치 하이브리드 알루미늄 우퍼가 달렸다. 우퍼 직경은 오히려 바로 위의 플로어 스탠딩 R5(5.25인치)보다 더 크다. 우퍼는 얕고 오목한 알루미늄 스킨이 페이퍼 콘을 덮고 있는 구조다.

외관상으로는 오리지널 R 시리즈에 비해 배플이 슬림해진 점이 눈길을 끈다. 이는 새 R 시리즈 모두에 공통되는 것으로, 넓은 배플면으로 인한 음의 회절 영향을 최대한 줄이려는 요즘 스피커디자인과 궤를 같이한다. 실제로 기존 3웨이 북쉘프였던 R300과 비교해보면, R300은 배플 폭이 21cm였는데 비해, 새 R3는 배플 폭이 19.9cm로 줄어들었다. R11의 경우 그 슬림화 정도가 더 심한데 이는 기존 R900의 8인치 우퍼 2발을 6.25인치 우퍼 4발로 변화시킨 이유가 가장 크다.

유닛과 인클로저 색상이 깔 맞춤된 것도 큰 차이다. 유니큐 및 우퍼의 콘과 서라운드 색상을 인클로저 색상과 톤 매칭을 시킨 것이다. 각 유닛을 둘러싸고 있던 금속링도 없앴다. 전작들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세련돼 보이는 가장 큰 이유다. 색상은 전 모델 모두 블랙 글로스, 화이트 글로스, 월넛, 3가지가 마련됐다. 13겹 극세사로 이뤄진 자석식 그릴도 인클로저 색상에 맞게끔 특별 제작된다.

스펙을 따져보면 R3는 기본적으로 공칭 임피던스 8옴(최저 3.2옴) 스피커이며 감도는 87dB, 주파수응답특성은 58Hz~28kHz(-3dB)를 보인다. 크로스오버 주파수는 400Hz와 2.9kHz에서 이뤄진다. 중고역 크로스오버 주파수가 핵심 중역대를 건드리지 않는 점, 유니큐의 미드레인지 유닛이 핸들링하는 주파수가 무척 넓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무게는 13.5kg(R300은 12kg)이다.

시청

시청에는 오렌더의 네트워크 플레이어 ‘N100C’와 심오디오의 DAC 내장 인티앰프 ‘Moon 240i’를 동원, 오렌더 앱으로 주로 타이달(Tidal) 음원을 들었다. ‘Moon 240i’는 8옴에서 50W를 낸다. KEF에서 권장하는 R3의 앰프 출력은 15~180W다.

Andris Nelsons, Boston Symphony Orchestra - Shostakovich Symphony No. 5

Shostakovich Under Stalin’s Shadow

금방 판가름이 날 것이라는 생각에 일부러 자주 듣는 대편성곡으로 시작했다. 우선 뒤쪽으로 넓게 무대가 펼쳐진다. 배플이 좁은 스탠드 마운트 스피커의 가장 큰 매력일 것이다. 또한 쓱,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유닛에서 음들이 퐁퐁 뛰쳐나온다. 음이 1도 유닛에 안 달라붙는다. 세 유닛의 대역간 이음매에서 일체의 요철 느낌이 없는 점이 눈에 띈다. 일단 첫 곡 일감은 저역대를 포함해 해상력과 디테일이 좋은 스피커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탄복한 것은 부드러운 음의 촉감이었다. 이처럼 알루미늄이라는 메탈 유닛의 선입견을 뛰어넘는 모습은 예전 R300도 마찬가지였으나, 지금은 그 음의 결이 보다 매끄럽고 고우며 화사하다. 두꺼운 질감의 유화 계열은 아니고, 그렇다고 흐릿하고 얇은 수채화도 아니다. 선은 얇지만 선명하게 윤곽선을 그린 세밀화 느낌이다. 여러 악기가 한꺼번에 울려도 혼탁한 구석이 없다. 이 가격대 북쉘프에서 이러면 사실 반칙이다. 풍성한 음의 파티를 처음부터 즐겼다.

Marcus Miller - Trip Trap

Laid Black

사뿐하고 경쾌한 음이다. 유니큐 유닛 특유의 음들을 잘게 슬라이스해서 토해내는 이 느낌이 좋다. 둔한 것과는 거리가 먼, 예리하게 예각으로 파고드는 음이다. 하지만 역시 이 곡 재생에서는 저음의 만족도가 기대에 약간 못 미쳤다. 인클로저 용적과 우퍼 크기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뭔가 경천동지할 만한 일이 일어나길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요컨대, R3의 저역은 에너지감이나 다이내믹스가 두드러지는 타입이 아니라 발랄하고 탄력감이 높은 쪽으로 승부를 거는 스타일이다. 이에 비해 동축 유니큐 특유의 핀포인트로 맺히는 음상은 확실히 예전보다 업그레이드됐다. 전체적으로 거칠 거나 우악스럽지 않은 음, 그래서 예쁜 음이다.

Rage Against The Machine - Take The Power Back

Rage Against The Machine

역시 쓰나미나 야생마 같은 저역이 아니라 정리정돈이 잘 된, 컨트롤이 잘 된 저역이다. 우퍼가 큰일을 하고 있지만 역시 더 돋보이는 것은 유니큐다. 시청을 하면서 R3 6.5인치 우퍼가 좀더 오버하기를 바라기도 했지만 이러한 컬러는 KEF 유니큐 자체의 성정인 것 같다. 디테일이 돋보이는 해상력, 정교하고 또렷하지만 약간 작게 맺혀지는 음상, 깊숙하고 넓은 사운드스테이지, 색 번짐이 없고 빠른 저역, 이런 것들이다. 확실히 R3는 입자가 거칠거나 저역이 느리고 답답한 스타일이 아니다. 이밖에 숨어 있는 소리, 들려야 할 소리를 많이 까발려주는 능력도 대단하다. 무엇보다 어떤 경우에도 음들이 싱싱하게 살아있는 점이 놀랍다.

Kat Edmonson - Lucky

Way Down Low

너무 센 곡들만 들은 것 같아 여성 보컬 곡을 연이어 들었다. 캣 에드몬슨의 ‘Lucky’에서는 ‘최고’라는 감탄부터 나왔다. 처음 등장하는 미디음의 영롱함과 깊이감, 무대의 공간감이 기대 이상이었던 것이다. 보컬의 빅마우스 현상이 없는 점도 유니큐의 특징이다. 그만큼 크로스오버 설계가 잘 돼 있다는 반증이다. 보컬과 코러스의 앞뒤 레이어감도 좋다. 순진하고 깨끗한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기대치 않았던 요염함이 베어져 있다. 이어 노라 존스의 ‘And Then There Was You’를 들어보면 그냥 라이브 무대가 펼쳐진다. 곡이 시작되고 음이 나오기 전에 이미 공기감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라이브 현장의 미세한 노이즈까지 남김없이 전해진다. 섬세하고 투명하며 깨끗한 재생음이다.

총평

최근 들었던 북쉘프 타입의 스피커들은 기대 이상으로 선전했다. 지금 리뷰하는 스피커만이 최고라는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실제 LS50을 즐겁게 사용했던 유저로서 KEF의 유니큐 동축 유닛이 점점 진화하는 것을 보는 일은 즐겁다. 플로어 스탠딩 R11이 넉넉하며 스케일 큰 음도 좋았지만 보다 미시한 세계를 아기자기하게 만끽할 수 있는 이 R3도 마음에 든다. 스피커에 좀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는 만큼 음의 결을 만지듯 들을 수 있는 것도 북쉘프 R3만의 매력일 것이다. R3의 무대는 정교했고 음은 예뻤다.

김편 오디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