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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요즘엔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도쿄로 간다. 바로 도쿄 오디오 쇼 참관 때문이다. 하지만 매년 방문하다 보니 새로운 브랜드나 제품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대신 도쿄 관광 내지는 맛집 투어가 메인이 되어버렸다. 바로 작년의 일이다.

마침 지인 몇과 어울리게 되어, 전시장 근처에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실 수 있는 곳이 없을까 찾아봤다. 그러다 어떤 건물 지하에 가보니 꽤 많은 음식점이 성업중이었다. 그중 한 군데는 꽤 오래되어 보였다.

과연 들어가 보니 직장인이 가득한 가운데 겨우 자리 하나가 보였다. 주문하는 분은 60대의 아주머니였고, 안쪽 주방을 보니 흰머리의 아저씨가 땀을 흘리며 요리중이었다. 꽤 연조가 있어 보이는 곳으로, 절대로 실패 확률이 높지 않다.

그래서 자리에 앉자마자 요리 몇 가지 시킨 후, 시원하게 하이볼을 시켰다. 하이볼은 일종의 생맥주 대용으로, 시원하면서 쌉싸름하고 또 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최근에 국내에도 하이볼 열풍이 불고 있지만, 내 경우엔 비교적 일찍 접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동서추리 문고를 보면, 마쓰모토 세이초나 모리무라 세이치의 추리소설에 하이볼이 단골로 등장한다. 박봉에 시달리는 형사들이 업무 후에 한잔 하거나 혹은 출장을 갔을 때 어김없이 반주로 하이볼을 마시는 것이다. 그중 어느 대사 하나가 기억난다.

“우리가 기껏 먹어봐야 오므라이스나 돈가스 정도인데, 지방마다 가게마다 맛이 다르니 참 희한하죠?”

하긴 우리의 대표 음식인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희한하게도 하이볼 맛은 비슷비슷하다. 이 술이 널리 알려진 것은, 위스키를 널리 알리고 싶은 산토리의 욕망에서 시작했다. 비싼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마셔댔다간 주머니에 돈이 남아날 일이 없다. 또 위스키 자체가 알코올 도수가 높아, 진정한 술꾼이 아니면 접근이 힘들다. 그래서 개발한 것이다.

기본 제조법은 간단하다. 위스키에 탄산수를 섞는 것이다. 그 탄산수로 말하면, 진저에일 이나 토닉 워터 등이면 무난하다. 여기에 얼음을 넣고, 레몬즙을 짜 넣으면 끝. 네이버나 유튜브를 검색해서 실제로 만들어보면 꽤 맛이 난다. 그러나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로 제맛 내기는 만만치 않다.

나는 바로 이 작은 가게에서, 하이볼의 원형이랄까, 스탠다드를 발견했다.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아, 그래 바로 이 맛이야, 감이 왔다. 이때 필을 받아, 이후 어떤 음식점에 가던 하이볼을 시켜봤다. 대부분 일정한 기준치를 통과하고 있었다. 과연 오랜 기간 만들어본 솜씨로구나, 탄복하고 말았다.

그런데 하이볼로 말하면, 기본적으로 저가의 위스키를 베이스로 한다. 산토리의 경우, 가쿠빈을 쓰는데, 그리 비싼 위스키가 아니다. 오히려 히비키나 야마자키 등 고급에 밀려도 한참 밀린다. 이 정도 위스키들은 스트레이트나 온 더 락이 어울린다.

다시 말해, 하이볼을 즐기려면 저가의 위스키, 그러니까 12년산 아래가 맞는다는 것이다. 참 희한한 일이다. 아무튼, 요즘 가쿠빈의 인기가 높다고 한다. 이제야 한국에서도 하이볼이 제 대접을 받는 모양이다.

왜 하이볼 이야기를 난데없이 하는가 하면, 이번에 만난 매칭이 바로 하이볼과 같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분명 개개의 제품들은 가격도 높지 않고, 사이즈도 작으며, 볼품도 없다. 왜 굳이 이런 초라한(?) 세트를 매칭이라고 내놨을까, 싶을 것이다. 기사의 사진만 보고 그냥 패스하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아마 그런 분들이라면 나중에 하이볼을 마셔보고, 본 세트의 가지를 재고했으면 싶다.

사실 오디오에서 알파요 오메가가 매칭이다. 정말 매칭에서 시작해서 매칭으로 끝난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절묘한 블랜딩으로 일종의 매직을 선사하는 칵테일의 세계와 같다. 바텐더의 실력에 따라, 똑같은 재료를 갖고 무궁무진한 맛이 나온다. 하긴 최근에 우리나라에서도 소주 칵테일이 유행하고, 무려 250여 개가 넘는 레시피가 나왔다고 한다. 그럴 만하다고 본다.

매칭

이번 매칭의 주인공은 와피데일에서 나온 주먹만 한 스피커 덴톤에다가 레가에서 나온 영한사전 크기의 인티 앰프와 CDP가 주인공이다. 정말 작고, 볼품이 없다. 주로 하이엔드 기기를 다루는 본 웹진에서 이렇게 저가의 기기를 추천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이례적이다. 

처음에 나는 두 브랜드의 수입상이 같은 곳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와피데일과 레가의 수입상은 완전히 다르다. 오로지 본 웹진의 결정에 따른 매칭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 정도로 자신이 있다는 뜻이 된다. 정말 그럴까?

그래서 착석을 하고, 일단 CD를 걸어봤다. 듣자마자 깜짝 놀랐다. 과연 이게 이런 조합에서 가능이나 한 일인가? 특히, 박력 넘치는 저역에 놀랐다. 가끔 어느 한구석에 서브우퍼를 숨겨놨나, 하는 표현을 쓰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혹, 담당자가 실수로 다른 스피커를 물려놓은 것도 아니다. 덴톤에다 바싹 귀를 갖다 대면 음이 쏟아져 나왔다.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Denton 85th Anniversary Speaker

일단 덴톤(Denton)에 대해 알아보자. 그 뒤로 85주년 기념작이란 말이 나온다. 여기서 한 가지 혼동할 수 있는 것은, 무려 85년 동안 덴톤이 만들어졌구나, 라는 부분이다.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여기서 85년은 워피데일의 창립 85주년을 말한다. 처음 길버트 브릭스가 스피커에 관심을 가진 것이 1932년이고, 정식으로 회사를 창업한 것이 1934년이다. 그러므로 올해에 나온 덴톤인 만큼, 85라는 숫자를 달고 나온 것이다. 덴톤 자체는 북셀프 스피커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1967년에 나왔다. 

당시 이 사이즈의 스피커는 이례적이었다. 과연 주먹만큼 작은 제품에서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올까? 의구심을 품기에 좋았다. 그런 선입견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요 작은 사이즈로 엄청난 퍼포먼스를 발휘했으므로, 발매 당시부터 명기로 취급받았다. 에어데일과 같은 거창한 대형기로 유명한 와피데일이지만, 오히려 그 정반대에 있는 덴톤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명기인 것이다.

일단 제품의 스펙을 보면, 커버하는 주파수 대역이 45Hz~20kHz로 되어 있다. 가만, 이게 맞는 내용인가, 확인이 필요해서 여러 자료를 뒤져봤는데, 모두 똑같다. 사실 그릴을 열고 전면 드라이버를 살펴보면 좀 수긍이 간다. 적은 면적 가득 드라이버가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미드베이스를 보면, 6.5인치, 이른바 육반 구경이다. 정통적인 풀레인지 드라이버가 이 사이즈로 제작이 된다. 그래서 대략 55Hz 내지 50Hz에 이르는 저역 리스폰스를 낸다. 그러므로 오로지 미드베이스 대역만 담당하니, 보다 더 밑으로 내일 수 있다는 말이다.

한편 트위터는 1인치 소프트 돔. 그러므로 정확히 20kHz까지 커버한다. 1인치 돔의 사이즈를 좀 더 키우면, 25kHz 내지는 30kHz도 가능하지만, 본 기의 컨셉으로는 이 정도가 적당하다. 오히려 에너지와 직진성이 뛰어나서, 이게 정말 소프트 돔이 맞나 싶을 정도다.

감도는 88dB. 약간 아쉬운 감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4옴이며, 어떤 음성 신호가 와도 3.8옴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앰프는 20~120W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보다 무척 앰프 친화적인 스피커인 것이다.

Brio integrated amplifier

이와 커플링되는 레가의 앰프는 브리오(Brio)라는 모델이다. 동사의 인티 앰프중 막내에 속한다. 출력도 8옴에 50W에 그치고 있다. 몸체도 작고, 전면의 폭도 좁아 무척 왜소해 보인다. 무게도 5kg 정도. 자고로 앰프는 크고 무거울수록 좋다는 속설에 따르면, 절대로 눈길을 주면 안 되는 제품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레가는 각종 소스기기부터 스피커까지 모든 제품을 아우르며, 해당 제품의 핵심을 꿰뚫고 정확한 설계와 레이아웃으로 극단적인 가성비를 추구하는 브랜드다. 그러므로 아무 제품이나 허투루 내놓지 않는다. 

실제로 50W라는 출력은 가정용으로 큰 무리가 없으며, 어지간한 북셀프 정도는 충분히 아우른다. 실속파 애호가들에게 요긴한 제품인 것이다. 하긴 사이러스나 네임만 해도 50~60W 출력의 인티가 주류를 이룬다. 그런 브리티쉬 앰프들의 전통을 생각하면, 그냥 숫자만 보고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실제로 덴톤의 경우, 완전히 장악하고 뒤흔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Apollo CDP

마지막으로 아폴로(Apollo)라는 CDP 역시 동사의 CDP 중에 제일 작으며, 사이즈로 보면 브리와 대동소이하다. DAC 칩은 볼프슨의 WM 8742를 썼다. 어마무시한 스펙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음질을 위한 몇 가지 기술이 투입되었다.

일단 CD 프로세서와 레이저 다이오드 등엔 디지털 앰프를 투입했다. 정확함과 신속성을 생명으로 하는 부분은 과감하게 이런 전원부로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대신 아날로그 출력단은 디스크리트 회로로 제대로 꾸미고 있다. 역시 오랜 기간 다양한 제품을 만들면서 쌓아온 노하우가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합한 시스템은, 정말로 매칭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한다. 저가 위스키로 서민들의 갈증을 풀어준 하이볼과 다르지 않다. 최근에 어느 잡지 편집자는 하이볼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이볼은 부잣집 셋째 아들을 닮은 것 같다. 위스키라는 출신은 훌륭하지만, 탄산수와 레몬 가끔 진저에일과 놀고 있으니, 어딘가 방탕한 모습도 있다.”

시청

본 조합이 방탕한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브리티쉬 사운드의 전통을 이어가는 브랜드의 막내들이 모여서, 형들 못지않은 실력을 뽐내고 있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이다. 지금부터 시청평을 통해 그 내용을 전달하도록 하겠다. 참고로 시청 트랙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Anne Sophie Mutter - Zigeunerweisen

Symphonie espagnole

첫 곡을 들으면, 강직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단호한 무터를 만난다. 두툼하고 밀도감이 높은 중역을 바탕으로, 카리스마가 가득한 바이올린이 전면을 장식한다. 그리고 호쾌하게 악단을 끌고 가는 여제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울림이나 배음이 적절하고, 약음 시에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일체 애매한 표정이 없으며, 곡 자체가 주는 비극적이며, 애잔한 느낌도 잘 살리고 있다. 강하게 그었다가 약하게 마무리하고 중간에 현을 뜯고 하는 다채로운 기교가 여축없이 드러나고 있다.

Schubert - Arpeggione Sonata 

이어서 슈베르트를 들으면, 불과 두 개의 악기에 불과하지만, 무대를 가득 채우는 모습을 발견한다. 전성기 데카의 아날로그 녹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본 세트에서 파악할 수 있다. 적절하게 히쓰 음이 나고, 약간 고답적인 느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싱싱하고, 활기차다. 특히, 이 비루투오조가 연주하는 첼로의 깊고, 농밀한 음향은 듣는 내내 집중하게 만든다. 노래하듯 연주하라는 이야기가 과연 뭔지 이런 연주를 들으면 알게 된다. 배후의 은은한 피아노 음향도 무척 정감이 간다. CD로 듣지만, 이상하게도 LP로 듣는 듯한 자연스러움이 인상적이다.

Bill Evans - My Foolish Heart

Waltz for Debby

빌 에반스의 연주는 전설적인 빌리지 뱅가드의 공연 실황이다. 왼쪽 채널을 장악하는 드럼, 그중에서도 브러쉬로 스네어를 긁는 대목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다. 과연 이 가격대에서 이런 디테일 묘사가 가능한 것일까? 물론 케이블이나 전원 등 세심한 보강이 이뤄져야겠지만, 컴포넌트 자체의 퀄리티가 떨어지면 절대로 불가능하다. 한편 서정적이며, 고상한 피아노의 음향은 무척이나 매혹적이고, 깊이 떨어지는 베이스의 존재감도 강력하다. 객석의 기척이나 숨소리까지 모두 포착되어, 마치 클럽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

Queen - Bohemian Rhapsody

Bohemian Rhapsody

마지막으로 퀸의 노래. 동명의 영화를 보면 이 곡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특히, 중간에 나오는 합창 부분, 수없는 오버더빙을 통해 거대한 합창단이 부르는 듯한 효과를 내는 부분이 잘 묘사되고 있다. 킥 드럼의 어택이나 기타 솔로의 화려한 질주 등, 숨 쉴 틈도 없이 몰아치고 있다. 게다가 신이 내린 보컬 머큐리의 노래를 들으면, 영화의 감동까지 곁들여져서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계속 되뇌인다. 과연 이 조합에서 나오는 소리가 맞아?

                                            이 종학(Johnny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