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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스위스 나그라(Nagra)의 플래그십 트리오를 한꺼번에 시청했다. 2019년에 나온 HD DAC X(DAC), 2017년에 나온 HD PREAMP(프리앰프), 2016년에 나온 HD AMP(모노블록 파워앰프)다. DAC과 프리앰프 모두 전원부가 분리됐기 때문에 모두 6덩이로 이뤄진 시스템이다. 물린 스피커는 포칼의 스텔라 유토피아 EM 에보. 첫 음부터 잘게 부서지는 입자감과 악기들의 오톨도톨한 질감, 밑으로 처박히는 저역에 침만 한없이 삼켰다. 넘사벽 가격대에서 넘사벽 사운드가 넘실거렸다.

이들 기기에 숨어있는 엔지니어링 역시 대단했다. 전면을 수놓은 모듈러미터(modulometer)와 화살촉 모양의 볼륨 노브는 보는 맛, 돌리는 맛이 최고였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딱 아귀가 맞게 조립된 섀시 품질에는 숨이 턱턱 막혔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DAC과 프리앰프, 파워앰프 속에 깃든 꼼꼼한 설계 디자인은 그야말로 스위스 엔지니어링의 결정체라 할 만했다. 인터넷에 공개된 내부 사진만 봐도 배가 불렀다. 이번 리뷰를 나그라 엔지니어링 위주로 풀어가려 작정한 이유다.

HD DAC X : 모든 입력신호를 DSD256으로 변환한 후 컨버팅

HD DAC X는 기본적으로 전원부 분리형 DAC이다. 전면에 ‘NAGRA’가 음각된 것이 전원부이고, 모듈러미터와 표시창 2개, 노브가 달린 게 본체다. 모듈러미터는 출력전압(0~3V)을 보여주고, 노브로는 입력(OFF, USB, AES, SPDIF1, SPDIF2, N-LINK1, N-LINK2, OPT)을 선택할 수 있다. 왼쪽 표시창은 입력신호 포맷(PCM, DSD), 오른쪽 표시창은 샘플링 레이트를 표시한다. 최대 지원 스펙은 PCM은 24비트/384kHz, DSD는 DSD256. 오른쪽 표시창 밑에는 2개의 토글스위치(뮤트, 위상)가 달렸다.

후면을 보면 전원부와 본체 연결이 2개 전원 케이블을 통해 이뤄지는 점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디지털 파트, 다른 하나는 아날로그 파트에 전원을 공급한다. 본체의 경우, 전면 입력 선택 노브에서 이미 짐작한 것이지만 후면 디지털 입력단자로 왼쪽부터 USB, 광, AES/EBU, N-LINK1,2, SPDIF1(동축 BNC), SPDIF2(동축 RCA)가 마련됐다. 아날로그 출력 단자는 채널별로 XLR과 RCA 단자를 1조씩 갖췄다. N-LINK 광 단자는 나그라 소스기기와 연결되는 입출력 인터페이스다.

디지털 신호를 아날로그 신호로 바꿔주는 DAC으로서 HD DAC X의 기술적 핵심은 PCM이든 DSD든 모든 입력신호를 DSD256, 그러니까 1비트 11.2MHz 신호로 바꿔준 후 본격 DA 컨버팅에 나선다는 것. 2014년에 나온 전작 HD DAC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도 이 입력신호 변환/업샘플링 스펙이 5.6MHz(DSD128. HD DAC)에서 11.2MHz(DSD256. HD DAC X)로 2배 늘어났다는 데 있다. 이렇게 DSD로 변환/업샘플링된 신호는 아날로그 로우패스 필터를 거쳐 아날로그 신호로 바꿔진다.

여기서 잠깐. 입력신호를 1비트 DSD로 변환한 뒤 컨버팅을 한다? 맞다. 이러한 설계는 이미 EMM랩스나 그 자회사인 마이트너, 그리고 플레이백 디자인 등에서도 채용한 것이다. HD DAC X의 경우, 전작 HD DAC과 마찬가지로 플레이백 디자인의 안드레아스 코흐(Andreas Koch)가 자일링스 FPGA로 설계한 1비트 변환/업샘플링 모듈을 커스텀으로 손을 봐 쓰고 있다. 이게 필자가 파악한 나그라 HD DAC X의 첫 번째 기술적 핵심이다. 참고로 EMM랩스는 DSD1024, 마이트너는 DSD512로 컨버팅한 후 DA 변환 작업에 들어간다.

두 번째 핵심은 DA 컨버팅을 끝낸 아날로그 신호가 인터스테이지 트랜스포머와 쌍 3극관인 JAN5963(12AU7)을 차례대로 거친다는 것. 인터스테이지 트랜스는 흔히 사용되는 커플링 커패시터 대신에 투입된 것으로, 커플링 커패시터에 비해 반응속도가 빠르고 광대역 커버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권선비에 따라 입력신호를 증폭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HD DAC X에서는 인터스테이지 트랜스가 증폭까지 담당한다. 증폭이 어느 정도로 이뤄지는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HD DAC 때는 1V 출력 시 +7dB, 2.5V 출력 시 +11dB였다. 한편 내부 사진을 보면 인터스테이지 트랜스가 2개인데, 이는 HD DAC X가 아날로그 좌우 채널을 철저히 독립시킨 듀얼 모노 구조이기 때문이다.

HD DAC X에 투입된 NOS(New Old Stock) 쌍 3극관 JAN5963 역시 채널별로 1개씩 투입됐다(HD DAC은 1개만 투입). 무엇보다 캐소드 팔로워 방식(cathodyne output design)으로 출력 신호를 끄집어내는 것이 특징. 잘 아시는 대로 진공관은 음극인 캐소드(cathode)에서 양극인 플레이트(plate)를 향해 이동하는 전자(-)의 양으로 그리드(grid)에 입력된 신호를 증폭한다. 진공관 출력은 플레이트 또는 캐소드에서 끄집어낼 수 있지만 대부분이 플레이트 출력이다. 캐소드에서 출력을 끄집어낼 경우(캐소드 팔로워), 게인은 1이 안 되지만 플레이트 팔로워보다 임피던스 값이 낮다는 장점이 있다. HD DAC X의 출력 임피던스는 200옴 미만을 보인다.

필자가 파악한 HD DAC X의 기술적 핵심은 DSD256 변환, 인터스테지 트랜스, 쌍 3극관 버퍼 회로, 이렇게 3가지다. 이 밖에 별도 전원부는 1) HD DAC보다 3배나 용량이 큰 슈퍼 커패시터를 투입해 사실상 배터리처럼 본체에 전원을 공급하고, 2) 정류회로에 실리콘 카바이드 다이오드를 썼으며, 3) 정전압 회로에 초저잡음 전압 레귤레이터를 투입했다. 디지털 파트와 아날로그 파트로 나눠진 본체의 경우, 1) 디지털 파트에 16개 파워서플라이, 아날로그 파트에 21개 파워서플라이가 투입됐고(총 37개. HD DAC은 25개), 2) 아날로그 파트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철저한 듀얼 모노 구조인 점이 특징이다. USB 입력단은 8 코어 XMOS 칩을 썼다(HD DAC은 아마네로 칩 사용).

2014년에 나온 HD DAC과 2019년에 나온 HD DAC X를 간략히 표로 비교해봤다. 참조하시기 바란다.

HD PREAMP : 트랜스포머를 이용한 전압 증폭과 볼륨 컨트롤

전원부와 본체를 분리한 HD PREAMP는 2017년에 나왔다. 나그라의 홈오디오 진출을 본격적으로 알린 프리앰프 PL-P(1997년)가 나온 지 꼭 20년 만이다. 포노를 내장한 PL-P는 모듈러미터, 입력 선택 노브를 비롯해 화살촉 모양의 볼륨 노브 등 현 나그라 디자인의 원형이 모두 담긴 제품이다. PL-P 이후 나그라 제품 출시 연표는 다음과 같다.

1997 PL-P : 포노스테이지 내장 진공관 프리앰프

1998 VPA : 타워형 모노블록 진공관 파워앰프

1999 MPA : 스테레오 솔리드 파워앰프

2001 PL-L : 라인 전용 진공관 프리앰프

2003 NAGRA DAC : DAC

2005 PSA : 스테레오 솔리드 파워앰프. 피라미드 모양

2005 PMA : 모노블록 솔리드 파워앰프. 피라미드 모양

2006 NAGRA CDP, CDT : CDT, CDT

2007 VPS : 포노스테이지 내장 진공관 프리앰프

2010 MSA : 모노블록 솔리드 파워앰프. 위쪽에 방열판

2011 300i : 진공관 인티앰프

2012 JAZZ : 라인 전용 진공관 프리앰프

2012 MELODY : 라인 전용 솔리드 프리앰프

2014 HD DAC : DAC

2015 CLASSIC AMP : 스테레오 솔리드 파워앰프

2016 CLASSIC DAC : DAC

2016 HD AMP : 타워형 모노블록 솔리드 파워앰프

2016 CLASSIC INT : 솔리드 인티앰프

2017 HD PREAMP : 전원부 분리 라인 전용 진공관 프리앰프

2019 HD DAC X : 전원부 분리 DAC

HD PREAMP는 기본적으로 전원부 분리형 진공관 프리앰프이며, 완벽한 듀얼 모노 구조의 본체에는 입출력 단자가 모두 XLR 2조, RCA 3조씩 달렸다. 본체 전면을 보면 왼쪽에 출력전압을 알 수 있는 모듈러미터와 좌우 볼륨 조절 노브, 3개 토글 스위치(리셋, 뮤트, XLR/RCA), 입력 선택 노브(OFF, XLR1, XLR2, RCA1, RCA2, RCA3/Bypass)가 달렸다. 한쪽 볼륨 노브를 돌리면 내장된 모터에 의해 다른 쪽 볼륨 노브도 동시에 움직인다. 물론 채널별로 각각 볼륨을 조절할 수도 있다.

입력 임피던스는 50k옴, 출력 임피던스는 0dB 볼륨 시 40옴, -15dB 볼륨 시 0.2옴이라는 놀라운 수치를 보인다. 이 밖에 주파수 응답 특성(10Hz~100kHz +,-0.1dB), 다이내믹 레인지(150dB), 크로스토크(-130dB, 1Vrms, 1kHz), 16kHz 방형파 구현 등 다른 스펙 또한 진공관 프리앰프로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대단하다. 특히 SNR이 160dB나 되는데, 이는 통상의 진공관 앰프보다는 60dB, 솔리드 프리앰프에 비해서도 20~30dB 높은 수치다. 독립된 전원부는 HD DAC X 전원부와 마찬가지로, 50F 용량의 슈퍼 커패시터를 투입해 사실상 배터리처럼 본체에 전원을 공급한다.

설계 디자인 역시 독특하다. 입력신호 흐름으로 보면, 입력단에는 NOS 쌍 3극관인 뮬라드의 E88CC(6DJ9)가 채널별로 1개씩 투입됐고, 전압 증폭단에는 출력 트랜스가 역시 채널별로 1개씩 투입돼 볼륨 조절에 따라 게인 값(-15dB~0dB)을 변화시키는 구조로 돼 있다. 필자가 보기에 HD PREAMP의 가장 두드러지는 설계 디자인은 바로 이 출력 트랜스를 이용한 볼륨 조절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입력신호 일부를 열로 바꿈으로써 감쇄시키는 포텐셔미터나 스위치 저항과 달리, 입력신호를 일절 감쇄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트랜스 2차 권선의 탭(tap) 변화로만 증폭 게인과 볼륨 조절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입력신호의 음질과 에너지를 보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득이 많다. HD PREAMP의 출력 임피던스가 최저 0.2옴까지 떨어지는 것도 이 출력 트랜스 덕분이다.

HD AMP : MOSFET 푸시풀 구동으로 2옴에서 1000W 출력

HD AMP는 타워형 모노블록 솔리드 파워앰프다. 생김새로만 봐서는 1998년에 출시됐던 타워형 모노블록 진공관 파워앰프 VPA(클래스 A 50W)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나그라에서는 HD AMP 디자인은 타워형 VPA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높이는 64.4cm, 가로폭은 23.8cm, 안길이는 54.2cm, 무게는 개당 56kg. 전면에는 출력을 알 수 있는 모듈러미터와 그 밑에 전원 스위치(OFF, 뮤트, ON)가 달렸고, 후면에는 위부터 통풍 그릴, XLR/RCA 입력단자, 싱글와이어링 스피커케이블 커넥터, 전원 인렛 단자가 배치됐다.

HD AMP의 출력은 클래스 AB 증폭, 푸시풀 구동으로 8옴에서 250W, 2옴에서 1000W를 내며 30W까지는 클래스 A로 작동한다. 출력 수치에서 알 수 있듯이 HD AMP는 나그라 파워앰프 특유의 투명도를 간직하면서도 대형 스피커를 구동하기 위해 개발됐다. 전원부 역시 내부 사진을 보면 1600VA 용량의 대형 토로이달 트랜스와 264mF 용량의 커스텀 문도르프 커패시터 뱅크(8개) 등이 호화롭게 투입됐다. 출력단 증폭 소자는 푸시풀 구성의 MOSFET. 나그라에서 더 구체적인 설명을 안 하고 있지만, CLASSIC AMP에서는 커먼 소스(common-source) 구성의 푸시풀 MOSFET을 페어로, 즉 밸런스로 배치했었다.

시청

나그라 HD 시리즈 3기종 시청에는 소스기기로 TAD의 SACD/CD 플레이어 D600, 스피커로 포칼의 Stella Utopia EM EVO(스텔라 유토피아 EM 에보)를 동원했다. D600과 HD DAC X는 AES/EBU 케이블로, HD 제품끼리는 XLR 케이블로 연결해 주로 CD를 들었다. 

Gary Karr - Prayer From "Sketch From Jewish Life" 

Kol Nidrei

잘게 부서지는 입자감이 대단하다. 이러한 고운 입자감이야말로 오디오가 하이엔드급으로 올라갔을 때 가장 절실하게 체감하는 대목. 필자 경험상 하이엔드 오디오 중에서 입자감이 거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러한 매끄러운 감촉은 HD DAC X가 CD 입력신호, 그러니까 16비트/44.1kHz PCM 신호를 1비트/11.2MHz DSD 신호로 변환한 후 아날로그 신호로 컨버팅한 설계 덕분일 것이다. 녹음이 잘 된 LP를 잘 만든 포노에 물려 듣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해상력과 무대의 깊이감, 거침없이 오르내리는 다이내믹 레인지가 과연 명불허전이다. 이 밖에 더블베이스의 깊게 떨어지는 저역은 2옴에서 1000W까지 떨어지는 HD AMP와 전자석 우퍼를 채용한 스텔라 유토피아 EM 에보의 협공. HD AMP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파워가 철철 넘쳐나는 가운데, 음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 담은 듯한 밀도감이 돋보인다. 베이스가 이렇게나 선율감이 뛰어난 악기였나 싶다. 막판, 모든 음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는 귀가 먹먹해지기까지 했다. 놀라운 적막감이다. 

Nils Lofgren - Keith Don't Go

Acoustic Live

일렉 기타 음이 살아있다. 특히 평소 퍼석하게 들리던 음들이 이날따라 무척이나 촉촉한 느낌을 선사한 점이 놀랍다. 먼지도 없고 메마른 구석도 없다. 역시 하이엔드로 가면 음이 촉촉하고 소프트해진다. 정위감 역시 발군. 보컬의 입과 기타 현의 높낮이 차이가 소름 끼칠 만큼 생생히 구분됐다. 보컬은 깨끗하게 그리고 플랫하게 쭉쭉 뻗고, 일렉 기타는 한 겨울 처마 밑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범접할 수 없는 순수함과 순결함이다. 전체적으로 선도가 높은 음이 계속되어 감탄이 끊이질 않았다. 관객의 환호 소리가 둥글게 원호를 그리며 들리는 것은 역시 음악 신호의 마이크로 디테일을 손상시키지 않고 볼륨단을 거치게 한 HD PREAMP의 공이 크다. 이어 'Wonderland'까지 내리 들었는데, 기타 저역이 내어주는 음의 압력이 하도 대단해서 '나는 지금까지 이러한 음의 압력을 느껴본 적이 있나?' 자문했을 정도다. 이때 비로소 느껴지는 진공관 특유의 기분 좋은 배음. 필자를 향해 엄습해오던 그 수많은 음들의 기저에 HD DAC X와 HD PREAMP의 진공관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HD AMP의 출력석으로 쓰인 MOSFET 역시 따지고 보면 진공관에 가장 가까운 솔리드 증폭 소자다.   

Gilbert Kaplan, Wiener Philharmoniker - Mahler Symphony No.2

Mahler Symphony No.2

1악장이 시작되자마자 첼로와 베이스가 일궈내는 잔향음이 장난이 아니다. 노이즈는 이미 한 톨도 남김없이 증발되었고, 스피커를 통해 전해지는 음은 한없이 정갈했다. 다시 한번 놀란 것은 낮은 음량에서도 오케스트라 악기들의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는 것. 표정이 흐릿해지거나 어디 뒤로 숨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자신의 존재를 당당히 드러내는 것이다. 여린 음일수록 더 또렷이 보이는 것 같은 악기들의 모습에서는 일종의 귀기마저 느꼈다. 그러고 보니 스피커에서 음들이 수평방향으로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시청실 바닥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 같다. 마치 선풍기 바람이 아니라 절벽 밑에서 거대한 음들이 솟구쳐 올라오는 듯했다. 이것이 바로 하이엔드의 힘이자, 그 끝을 알 수 없는 앰프의 깊이일 것이다. 총주에서는 모든 음들이 불꽃놀이처럼 팍팍 작렬했다.  

Jacinth - Moon River

Autumn Leaves

먼저 같은 CD에 있는 'Somethin's Gotta Give'부터 들었다. 색채감과 윤곽선이 또렷한 음에, 저역 악기들은 묵직하고 단단한 에너지감을 인정사정 없이 던져준다. 이때 필자 바로 앞에 나타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야신타. 드럼, 트럼펫, 피아노, 베이스 등 정말 많은 악기들이 저마다 감칠맛 나는 소리를 들려준다. 야신타가 이날따라 매우 젊은 목소리를 들려준 점도 마음에 든다. 'Moon River'에서는 SNR이 정말 높은 시스템임을 절감했다. 야신타가 숨을 들이마실 때는 필자도 함께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한마디로 무서운 적막감이다. 야신타의 목소리에서는 엠보싱 휴지를 만지는 듯한 오톨도톨한 질감마저 느껴진다. 지금까지 수십 번 들었던 곡인데 호소력이 거의 역대급이다. 피아노의 경우 그냥 현장에서 실물 피아노가 자신의 음을 360도로 방사시키는 것 같다. 단아하고 정갈한 음, 어디 하나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CD나 DAC, 앰프, 스피커가 만들어낸 음이 아니다. 그냥 연주음이고 그냥 보컬음이다. 사실, 이러면 더 들어볼 필요도 없이 게임 끝이다. 

총평

개인적으로는 나그라 CLASSIC 시리즈가 보다 나그라답다고 생각한다. 보면 만지고 싶고, 만지다 보면 소리까지 저절로 듣게 되는 묘한 시각, 촉각, 청각의 매력이 나그라의 전매특허인데, 이 점만 놓고 보면 HD 시리즈보다 클래식 시리즈가 더 우위에 있는 것 같다. 하지만 HD DAC X, HD PREAMP, HD AMP가 들려준 소리는 클래식 DAC, 프리, 파워를 압도했다. HD DAC X의 경우 전작인 HD DAC보다 대역감이 넓어지고 음들을 좀 더 잘 정리해서 들려준다는 인상. 처음 들어본 모노블록 파워앰프 HD AMP는 MOSFET 특유의 온기와 스피드를 밑에 깐 찰진 구동력이 일품이었다. 스텔라 유토피아 EM 에보를 너끈히 구동한 점이 이를 증명한다. HD PREAMP는 입력신호를 훼손시키지 않고 볼륨단을 설계한 나그라의 섬세한 배려에 탄복했다. 나그라 HD 시리즈에 온 마음을 빼앗긴 시청이었다. 

by 김편 오디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