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극과 극

LP의 시대가 역사 속으로 자리를 감추고 CD가 출현해 모든 포맷을 집어삼켰을 때 사람들은 쾌재를 불렀다. LP를 듣기 위해 판을 뒤집지 않아도 되었고 카트리지, 포노 앰프, 승압 트랜스 외에 자잘한 액세서리를 구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채 반세기도 견디지 못하고 음원에 포맷의 왕좌 자리를 빼앗기자 사람들은 다시 한번 쾌재를 질렀다. 고가의 시디피 대신 DAC 하나만 갖추면 CD보다 더 높은 다이내믹 레인지와 샘플링 레이트의 고해상도 음원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해상도 스펙과 갈수록 편리해지는 편의성 그리고 축소 지향의 음원 재생은 오히려 과거의 것을 유령처럼 차례대로 소환하고 있다. 적어도 최고 수준의 고품질 사운드를 최대 목표로 지향하는 오디오파일들은 고해상도 음원의 극단은 결국 최고 수준의 아날로그 음질의 구현과 맞닿는다는 사실을 처절하고 깨닫고 있는 중이다. 창고에 처박아두었던 먼지 쌓인 CD를 다시 꺼내는가 하면 과거에 컬렉션 했다가 처분해버린 LP를 아쉬워하며 다시 그 불편한 턴테이블을 다시 운용하기도 한다. 고해상도의 극단에서 다시 아날로그의 본질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결국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이다.

해체와 분리

기존에 디지털의 편의성은 아주 단순한 하드웨어로 연결되었다. PC에 저장한 음원을 DAC로 재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이엔드 오디오 분야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축소와 편의주의에 반기를 들고 모든 디지털 프로세싱을 해체, 분리하면서 CD 시대엔 문제되지 않았던 또 다른 문제점을 해결해나가기 시작했다. 비근한 예로 USB, 이더넷 플랫폼을 통해 들어오는 노이즈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솔레이터, 리클러커를 개발해 내놓았다. 점점 더 높은 정밀도를 가진 클럭을 별도로 개발해 출시하기도 하며 덩어리는 점점 더 증가해나갔다. DAC 한 대면 시디를 능가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은 점점 멀어져 갔다.

결국 많은 오디오파일은 PC로부터 격리된 전용 뮤직 서버나 스트리머를 사용하고 있으며 DAC를 위시로 클럭, USB, 이더넷 허브나 아이솔레이터 등 다양한 보조 수단을 함께 운용하고 있다. 결국 CD 시대 dCS 등의 하이엔드 디지털 메이커들이 트랜스포트, DAC 및 업샘플러, 클럭 등을 따로 분리해 개발했던 것처럼 고해상도 음원에 대응하는 방식은 또 다른 해체와 분리를 거듭하고 있다.

CH 프레시전의 반격

여기서 CH 프레시전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이들도 단품 DAC로 시작했다. 애너그램 테크놀로지를 이끌었으며 스위스 하이엔드 오디오의 심장에 진입한 이들은 거칠 것 없이 기존 고전적 디지털 기기의 담론을 뒤흔들었다. DAC C1으로 히트를 친 CH 프레시전은 D1이라는 트랜스포트뿐만 아니라 앰프에 이르기까지 여러 출중한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CH 프레시전의 본령은 디지털이다. 그리고 드디어 이들은 고해상도 음원에 최적화된 완벽에 가까운 초하이엔드 디지털 플레이백 시스템을 완성했다. 총 여덟 개로 이루어진 풀 시스템이 그 주인공이다.

C1 모노

여덟 개의 메뉴 중 핵심은 C1 모노로서 기존의 C1 DAC의 확장 버전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하지만 그리 간단히 좌/우 채널로 나눈 제품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C1은 기본 디지털 입력단 외에 USB, 이더넷 보드 등을 모듈화해 옵션으로 장착하면 DAC는 물론 프리앰프 기능까지 모두 포괄하는 종합 디지털 컨트롤러였다. CH 프레시전은 여기서 C1 모노 버전을 통해 여러 기능을 각각의 섀시에 분리하고 있다. 이는 기존에 L1이라는 좌/우 채널 분리형이 출시되었을 때부터 결국 예견되었던 일이지만 직접 보니 CH 프레시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온 하나의 거대한 디지털 세계를 C1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우선 여러 입력단 및 컨트롤 부분을 C1.d라는 제품에 모두 분리시켜놓았다. 기본적으로 S/PDIF, AES/EBU, Toslink, CH Link HD 등의 입력을 통해 최대 32bit/768kHz까지 처리가 가능하며 DSD도 최대 DSD128까지 대응한다. 여기에 USB 및 이더넷 입력단 등을 추가할 수 있도록 옵션으로 마련해놓고 있다. 이번엔 ROON 등에 대응하는 스트리밍 모듈이 새로 출시된 것도 이슈가 되고 있는데 기능은 물론 음질적으로도 상당한 향상이 있다.

2.4GFLOPS DSP 엔진

여기에 연결되는 DAC는 총 두 대로서 좌/우 채널을 각각 따로 도맡고 있다. 알다시피 CH 프레시전은 버브라운 PCM1704를 사용해왔고 이번 C1 모노 DAC에서는 레퍼런스 모델답게 채널당 PCM1704를 네 개씩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DAC 칩셋 자체보다 C1 계열 DAC는 2.4GFLOPS DSP로 작동하는 독보적인 디지털 프로세싱에 있다. 최적화된 CH-PEtER 프로세싱에 의해 모든 데이터는 705.6kHz/768kHz로 변환되어 처리한다. 게다가 24비트 미만의 음원은 독자적인 알고리즘에 의해 아날로그 신호에 가까운 파형으로 변화시켜주는 필터가 내장되어 있다.

이 외에 클럭의 경우 VCXO 두 발을 사용해 정밀도를 높였으며 볼륨 컨트롤 또한 아날로그와 디지털 볼륨 기술을 혼합해 웬만한 독립형 프리앰프를 뛰어넘는 성능을 보여준다. 한편 아날로그 출력단은 글로벌 네거티브 피드백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퓨어 A 클래스 상태로 작동하도록 설계해 DA 변환 이후 최소의 신호 전송 구간을 통하면서도 커패시터 등을 통해 음질 변이를 최소화했다.

셋업

하지만 이번 시청에선 단순히 C1 모노 및 컨트롤러 C1.d로만 이루어진 시스템이 아니라 각각의 기기에 X1 전원부를 적용하는 등 풀 CH 프레시전 디지털 시스템을 셋업해 진행했다. 셋업한 기기를 열거하자면 C1 좌/우 채널 및 C1.d 그리고 각각의 전원부가 함께하며 CH 프레시전의 T1 클럭을 붙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D1 SACD 트랜스포트도 합세했다. 결과적으로 디지털 플레이백 시스템은 총 여덟 대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더해 프리앰프는 L1 모노 그리고 파워앰프 또한 M1 모노블록을 매칭해 열한 대의 CH 프레시전을 쌓아놓는 장관이 펼쳐졌다. 이번 테스트에 사용한 스피커는 스웨덴 출신의 세계적 하이엔드 스피커 메이커 마르텐의 콜트레인 테너2 스테이트먼트 에디션이다. 케이블은 모두 쿠발라 소스나를 사용했고 시청 공간은 가로 5미터, 세로로 7미터가량으로 청담동 HZ 오디오 메인 시청실에서 진행했다.

퍼포먼스

이번 시청의 의미는 마르텐이라는 스피커를 감안하고 이해해야 한다. 마르텐 스피커는 틸&파트너의 아큐톤 유닛을 사용하는 스피커로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미국이나 영국 하이엔드 스피커들과 다른 세계의 소리 형태를 가진다. 게다가 주파수 응답 범위가 24Hz 초저역은 놀랍지 않으나 고역이 무려 80kHz까지 치솟는 초광대역 스피커다. 거의 박쥐나 들을 수 있는 대역이다. 이 때문에 보편적인 우리 인간의 가청 대역 끝단까지 매우 선형적으로 들려주는 스피커다. 처음 들으면 놀라울 정도의 해상력과 디테일에 소름이 돋는 상황이 자주 빚어진다.

게다가 풀 CH 프레시전을 대동한 테너2 스피커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쳐 보였다. 쿠발라 소스나 케이블로 어느 정도 숨을 죽이고 두께와 표면 질감을 살렸지만 도무지 사그라들지 않는 미세 약음의 엄청난 해상도는 현미경으로 인체를 관찰하는 듯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Diana Krall - A Case Of You (Live)

Live In Paris

일단 리스닝 룸의 후면 벽으로부터 약 1/3 지점까지 빼낸 스피커에서 다이애나 크롤의 ‘A Case Of You’(16/44.1, Flac) 같은 익숙한 곡을 재생했다. 하지만 전혀 익숙하지 않을 정도로 마치 현장과 유사한 생생한 앰비언스가 청음실을 가득 메웠다. 타이달 MQA 포맷으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스의 정보량을 극한으로 끌어내는 모습이다. 특히 보컬과 피아노의 분리도가 인상적이었고 보컬과 관중의 거리까지도 더 멀리 느껴져 시종일관 눈앞에서 무대가 아른거렸다.

John Surman - Portrait Of A Romantic

Private City

순수 다이아몬드 진동판을 채용한 테너2는 소스 기기가 변환한 소리의 모든 정보를 낱낱이 벗겨 들려준다. 이 때문에 아마도 중, 저가의 애매한 성능의 소스 기기라면 장점은커녕 오히려 단점만 부각시켜줄 가능성이 농후하다. CH 시스템으로 들어보면 존 서먼의 ‘Portrait Of A Romantic’(16/44.1, Flac)을 역시 타이달 MQA로 들어보았다. 일체의 노이즈가 없으며 엄청난 광대역에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음원 정보를 고운 실타래처럼 뽑아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메인 악기인 바리톤 색소폰 외엔 평소에 잘 들리지 않거나 뿌옇게 처리되던 소리까지 모두 검은 배경 속에서 길어 올린 듯 또렷한 실체를 드러낸다.

필자 또한 타이달 MQA을 사용하고 있지만 나를 포함해서 타이달 사용자들은 이런 얼티밋 하이엔드 시스템에서 좌절하게 될 것이다. 오리지널 음원 재생과 네트워크 스트리밍 음원의 사운드 차이가 너무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소스 기기로 멜코 N10이라는 출중한 오디오파일용 NAS를 사용했기도 했지만 역시 스트리밍의 열세가 드러난다.

Larry Coryell - Morning Of The Carnival

Spaces Revisited

한편 래리 코리엘의 ‘Morning Of The Carnival’(16/44.1, Flac)을 들어보면 존 서먼의 ‘Portrait of romantic’에서의 바리톤 색소폰의 하모닉스 구조가 낱낱이 발가벗겨지는 듯 이전에 듣기 힘들었던 미세 약음들이 일제히 쏟아져 놀라움을 주었다. 예를 들어 인트로 부분에서 일렉트릭 베이스 사운드는 청음실 바닥을 그르렁거리며 짐승의 혀처럼 날름거렸다. 전체적으로 두터운 소리는 아니며 선예도가 매우 높지만 소노리티가 무척 섬세하게 살아있는 소리다. 테너2의 영향도 있으나 만일 CH C1 모노가 아니었다면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일종의 성벽이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하다.

Dave Grusin - Water To Drink (Agua De Beber)

A Twist Of Jobim

R2R 래더 DAC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표면 질감 표현이 좋고 온도감이 더 올라가며 두텁고 묵직한 소리를 연상한다. 하지만 R2R DAC로 브랜드마다 다르며 진정 제대로 만든 R2R 래더 DAC는 해상력이나 시간축 특성이 절대 떨어지지 않으며 온도감이 질감 표현만으로 승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리 릿나워와 데이브 그루신이 함께한 ‘Water To Drink’(16/44.1, Flac)에서 웬만한 델타 시그마 DAC의 해상력, 분해도를 너끈히 뛰어넘는다. 아주 차갑진 않고 중립적인 온도감에 어택에서 디케이, 서스테인까지 정밀시계처럼 정확하게 집고 넘어가며 무척 자연스러운 리듬감을 들려준다.

Manfred Honeck, Pittburgh Symphony Orchestra

Beethoven: Symphony No. 3

Beethoven: Symphony No. 3 “Eroica”; Strauss: Horn Concerto No. 1

CH C1 모노는 스위스 출신답게 매우 첨예한 해상력과 분해도를 가졌으나 무척 고급스럽고 유려한 소릿결을 만들어낸다. 겉으로 보기엔 매우 차갑게 깎아지른 알루미늄 섀시나 디자인 등 한 치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 차가운 느낌. 그러나 실제 음악을 들어보면 이런 특성을 기반으로 음악을 매우 얇은 두께의 슬라이스처럼 요리해 내놓는다. 예를 들어 맨프레드 호넥 지휘,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베토벤 3번 교향곡(24/192, Flac)을 들어보면 게인은 낮아지지만 볼륨을 조금만 높이면 미세한 완급 조절과 에너지 대비가 아주 좁은 간격으로 표현되어 지루할 틈이 없다. 공격적으로 밀고 나오지 않으며 전망을 깊게 표현해주어 엄청난 해상력과 분해력에도 불구하고 피곤하다는 느낌보다 개운하다는 느낌을 준다.

총평

우리는 각자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각자의 후각을 통해 냄새를 맡는다. 그리고 각각의 청각을 통해 음악을 듣는다. 그러나 실시간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깝고 그저 그리워하기엔 너무나 소중해 녹음하고 그것을 되새김질하며 즐긴다. 시각 쪽에선 카메라가 있고 청각 쪽에선 오디오라는 하드웨어가 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는 어쨌든 한정된 유리창을 통해 보고 있는 세상의 모습과 같다. 그래서 가끔은 다른 창을 통해 극단적으로 다른 소리 풍경을 바라보면 소리에 대한 인식의 틀이 확장되는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된다. 테너2가 그 창틀이라면 CH 모노 DAC는 그 창 자체다. 소리를 보는 더 넓고 맑은 스펙트럼이 바로 CH 모노 DAC이다. 현존하는 가정용 하이엔드 DAC 중 이를 넘어설 DAC는 당장 생각나지 않는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