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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앰프의 증폭 소자로 진공관만 존재했을 때는 진공관이 왜 좋은가에 대해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앰프 설계자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을 테니. 하지만 진공관의 뒤를 이어 등장한 반도체가 시장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진공관과 비교하여 확실하게 좋은 점이 있어야만 했다. 물론 반도체는 진공관을 시장에서 몰아 낼 당당한 자격을 갖고 있었고 시장을 석권하게 되었다.

우선 반도체 소자는 상대적으로 무척 크기가 작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는 여러 개의 소자를 병렬 연결함으로써 큰 전류를 흘리면서도 그리 크지 않은 사이즈의 앰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출력 임피던스가 작아서 스피커를 직결할 수 있으므로 거추장스러웠던 출력 트랜스를 생략시킬 수도 있었고 소자를 동작시키기 위한 별도의 전원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에서 전원 회로도 간략화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진공관 앰프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대출력 앰프들이 아무렇지 않은 크기로 생산될 수 있었고, 같은 크기의 앰프라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복잡한 회로를 실장할 수가 있었다. 즉 반도체로 인하여 왜곡과 주파수 특성과 같은 물리적인 스펙이 현저하게 개선된 앰프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것이다. 그것은 혁명과도 같았다. 진공관은 보수였고 구식이었으며, 시장에서 내몰려 자취를 감추는 듯 보였다.

하지만 진공관 앰프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근근이 버티어 왔다. 버티기보다는 오디오 기기의 한 종류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이며, 오히려 새로운 붐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렇게 현대의 진공관 앰프가 애호가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진공관이 반도체에 비해 어떤 면에서 더 나은가 하는 것을 분명히 설명해야 했다.

첫 번째 요인은 노스탤지어. 많은 이들이 진공관의 아련한 불빛과 함께 따듯한 음색을 그리워했으니까. 하지만 물리적으로도 진공관은 반도체에 비해 분명한 장점을 갖고 있다. 진공관의 왜곡 성분은 짝수차이기 때문에 소리가 따듯하게 들리고, 따라서 전기적인 출력에 비해 청감상 훨씬 더 큰 출력을 가진 듯 힘이 좋은 느낌이며, 설계자의 입장에서는 진공관에 가해지는 B전압이 무척 높기 때문에 소자의 선형성이 가장 좋은 부분을 택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출력트랜스로 인하여 출력소자가 더 안정된 동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었다.

한편 진공관 앰프는 시대에 맞추어 진화하게 했다. 전원부에는 반도체 다이오드를 도입하여 강력한 힘을 갖추었고, 새로 개발된 우수한 부품들과 새로운 회로가 도입되었으며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도록 사용자 인터페이스에도 개선을 꾀하고 있으므로, 물리적인 스펙을 보고 진공관 앰프와 반도체 앰프를 분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진공관의 좋은 점과 반도체의 좋은 점만을 갖춘 앰프를 만들자.

이 욕심 많은 시도가 언제부터,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애호가의 입장에서는 예컨대 프리앰프를 진공관으로, 파워 앰프를 반도체 앰프로 조합함으로써 원하는 음색을 얻는다는 다양한 시도가 있을 수 있겠지만, 메이커에서 한 새시 안에 진공관과 반도체를 섞어 쓰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문 편이다. 카운터포인트, 유니슨리서치, 최근에는 DK와 램 또는 어쿠스틱 플랜 정도.

이탈리아의 패토스는 이 무리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다. 그들은 한결 같이 하이브리드를 고집하고 있으며, 그들의 INPOL 회로는 진공관과 반도체를 단순히 ‘섞어’ 음색을 조정하는 수준이 아닌 진공관과 반도체의 장점을 살릴 수 있도록 철저한 역할 분담을 시킨다는 점에서 매우 독창적이다.

진공관은 전술한대로 B전압이 높아 전압 증폭에 유리하고, 반도체는 전류를 크게 흘릴 수 있다는 장점을 각각 살린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진공관 하나로 전압 증폭을 하므로 싱글 엔디드 순A급 증폭. 한편 왜율은 0.5%라는 상당히 큰(?) 값인데, 네거티브 피드백을 전혀 걸지 않은 설계자의 고집에 기인한다. 한편 필자가 지금까지 들어 온 패토스 - INPOL 회로의 소리는 중역이 충실한 낭랑한 음. 섬세하고 부드러운 다소 연한 톤이 인상적이었다. 투명한 수채화의 질감처럼 가볍고 산뜻해서 매우 매력적이었는데, 다만 싱글 엔디드 소출력 A급 증폭답게 구동하는 스피커에 따라 출력이 작고 힘이 부치는 듯 여겨질 때가 가끔 있었다.

INPOL2는 이러한 애호가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저부하 구동력을 강화한 패토스의 최신, 최고급 인티 앰프이다. 패토스의 해답은 의외로 간결했다. 새로운 회로를 개발하는 쪽보다 전원부를 더욱 강력하게 증강시켰고, 지금도 스스로 최고라고 생각하는 INPOL 회로를 채널당 두 개씩 써서 풀밸런스화시킨 것이다(그래서 모델의 이름도 INPOL2라고 지었는데, 위첨자 2는 차세대(2nd Generation)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INPOL2에서 새롭게 도입된 강력한 전원부는 PHYSICS(Pathos Hybrid Stabilized Independent Current Supply)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전류 소모량이 적은 진공관 쪽은 기존의(아날로그식) 전원부를 사용하며 스피커를 구동하기 위한 반도체 쪽의 전원은 대용량의 스위칭 전원부를 쓰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진공관의 안정된 동작과 함께 임피던스가 낮거나 변동이 큰 다양한 스피커들을 쉽게 구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 증폭부와 함께 전원부도 하이브리드 타입을 사용하는 시도가 재미있다.

이제 앰프를 보자. 전작 로고스와 유사한 외관. 아무런 설명도 써 있지 않은 버튼 네 개의 리모컨도 동일하다. 'PATHOS'라는 글자 모양의 방열판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고, 살짝 경사진 순백색 고급 알루미늄 패널과 목재의 절묘한 조화는 늘 찬탄의 대상이다. 로고스에 비해 진공관이 네 개가 되었고 앰프 중앙에 긴 홈을 주어 빨간색 대용량 전해 커패시터 세 개가 눈에 확 띄는 점이 다른 점.

커패시터가 노출된 것은 패토스의 데뷔작 트윈 타워즈를 연상케 하는데, 트윈타워즈와 로고스의 디자인을 적절하게 섞어 놓았다는 인상이다. 보기 드물게 빼어난 디자인이지만 중앙 홈의 바닥을 목재로 처리한 것은 불만이다. 홈의 옆 벽처럼 바닥을 번쩍거리는 크롬을 썼더라면 커패시터의 ‘이탈리안 레드’가 더 잘 살아났을 것 같다. 더구나 전면 패널의 목재부와 홈의 바닥부의 색감이 다른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디자인을 보고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자처럼 이탈리아 디자인의 멋을 모르는 사람은 예외로 하자.

앰프에서 핵심 부품인 볼륨은 릴레이 어레이로 저항들의 배합을 바꾸는 타입. 오래 사용해도 잡음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저항들은 모두 1% 오차의 정밀 금속 피막 저항이고 릴레이는 완전 밀폐형에 내열성이 매우 뛰어나고 오염에 강한 토리움 전극을 가진 고신뢰형이어서 내구성은 물론이고 음색의 열화까지 최소화한다. 다만 볼륨을 조작할 때, 가스레인지를 연상케 하는 ‘따다다닥’ 릴레이 소리는 어떻게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런 바람은 하이엔드 오디오에서는 음질을 우선한다는 설계자의 고집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입력으로는 밸런스 두 조와 언밸런스 다섯 조. 출력 단자는 바이와이어링 지원. 출력은 8옴 기준에 순 A급 45W.

시청은 같은 이탈리아제인 오디아플라이트 CD1을 INPOL2가 풀밸런스인 것을 고려하여 요르마의 No.1 밸런스 선으로 연결하고 스피커로는 다이아몬드 트위터를 사용하여 고역 특성이 출중한 마르텐의 버드를 듣는다. 첫 음을 들을 때부터 중역이 충실하며 따듯한 음색으로 특히 고음의 결이 아주 곱다. 하늘하늘한 고역의 섬세함은 리스닝 공간이 밝아진 느낌이 들 정도로 단연 발군이다. 오케스트라 대편성에서 예컨대 멕베드 서곡과 같은 금관악기의 총주부에서도 자극적으로 뭉치는 부분이 전혀 없고 오로지 산뜻하고 섬세하게 펼쳐내어 금세 듣는 이의 기분을 좋아지게 한다. 어깨에 힘이 전혀 실리지 않은 상쾌한 스윙.

예전 패토스의 인티 앰프들이 넓은 공간에서 다이내믹하게 듣기에는 조금 약했던 인상인 데 반하여 이 앰프에서는 볼륨을 조금씩 조금씩 올려도 스케일이 시원하게 커져 확실히 개선된 것을 느낄 수 있다. 저역은 단정하고 차분하며 필요한 부분만 깔끔하게 내는 느낌. 하지만 깊게 떨어지는 묵직한 맛도 겸비하고 있다. 다만 정밀 사진보다는 파스텔화, 유화보다는 수채화의 질감으로 애호가 중에서는 즐겨 듣는 음악 장르에 따라 음색이 조금 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 점을 의식하여 CDP를 노스스타의 192CDT/익스트리모 DAC 세트로 바꾸니 아름다운 고역의 결은 선명하고 명쾌한 쪽으로 급선회. 지극히 섬세하고 화사한 느낌은 오디아플라이트의 CD1도 단단히 한 몫을 했다는 것인데, 앰프가 무척 예민한 것 같다. 케이블이나 소스기기에 따라 느낌이 크게 바뀌는 것은 섬세하고 해상도가 높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노스스타와의 매칭에서는 곱고 화사한 맛은 좀 떨어지지만 중역 쪽에 에너지가 실리는 다이내믹한 음이라서 재즈의 나팔이 더 ‘혼’답다. 만약 이 앰프를 쓰면서 하드 밥의 화끈한 ‘땀 냄새’라던가 ‘연주할 때의 먼지’ 또는 말러의 ‘독’ 같은 것을 원하는 분이 있다면 CDP를 와디아와 같이 개성이 강한 것을 적절하게 매칭함으로써 충분히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취향을 담은 의견으로는 이 앰프가 갖고 있는 투명함과 섬세함 그리고 유연한 질감을 잘 살려 내는 쪽이 이 앰프만이 가진 미점을 극대화한다는 점에 있어서 더욱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멋진 디자인에 잘 어울리는 섬세하고 고운 음. 이 앰프는 분명히 개선된, 과연 차세대의 INPOL이다. 위첨자 2가 차세대를 의미한다는 점에서도 INPOL2라는 이름은 꽤 잘 지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