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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사는 법

1980년대 한 남자는 지상 최고의 앰프를 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풍운의 꿈을 안고 시작한 회사 이름은 말 그대로 크렐 공업(Krell Industries). KSA, KSA-S 시리즈, FPB 등 우리가 알고 있는 크렐은 그랬다. 대전류를 다루며 어린아이 머리만 한 전원 트랜스와 수북이 양옆으로 자리 잡은 트랜지스터와 뜨거운 방열반, 손을 대면 온몸이 감전될 듯한 전기의 화신이었다. 그는 잘 나가는 듯했다. 하이엔드 스피커 설계자들이 저능률에 소름 돋을 만큼 세밀한 다이내믹스와 해상력, 꽉 짜인 사운드스테이징을 원했고 당시 이런 대출력 앰프들이 필요했다. 시대의 흐름은 이 천재 엔지니어에겐 기회의 시간을 제공했다.

이 시간 동안 이 남자는 자신의 능력을 뽐내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나 재무 사정은 점점 안 좋아졌다. 한창때 크렐이라는 브랜드로 Master Reference Amplifier 같은 천 와트짜리 거함을 취미생활처럼 만들어내고 또 팔아 재끼던 그. 그러나 재무 투자자와 그의 관계엔 조금씩 균열의 조짐이 나타났다. 그리고 FPB 시리즈의 성공을 기반으로 LAT 및 에볼루션 시리즈를 위시로 멀티채널까지 겁 없이 덤비던 그에게 투자자의 눈빛은 심상치 않았다. 앞만 보고 뛰어가던 그의 엑셀레이터에서 발을 떼고 브레이크를 밟았던 건 투자자만은 아니었다. 바로 그의 와이프 론디와의 관계에서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남자. 댄의 폭주기관차는 멈추는 듯했다. 그리고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던 어느 날, 돌연 그는 크렐에서 쫓겨나다시피 짐을 꾸려 나왔다. 마크 레빈슨 같은 길을 걷지 않을까 우려가 들려왔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데이브 윌슨처럼 와이프와 단란한 삶을 꾸려나가며 자신의 아들에게 대를 이어 윌슨 오디오를 경영할 수 있는 척도를 마련해놓지도 못했다. 그의 폭주기관차를 움직일 엔진은 오직 그뿐이었다. 크렐은 에볼루션 E 시리즈를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그는 이젠 크렐을 떠났다. 마치 자신이 창립한 애플에서 쫓겨난 스티브 잡스의 심정을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뼈저리게 이해했을지도 모를 이 남자. 댄 다고스티노. 진짜 오디오에 미친 남자가 사는 법이다.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앞으로, 앞으로. 그의 열정은 절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보기보다 그의 열정과 패기는 오롯이 가슴에 남았고 이젠 인생의 마지막 장을 멋지게 장식하고 싶었을 것이다. 가족과 사업 그리고 무릇 투자자의 입김에서도 자유롭게 필생의 작업을 해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마인드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댄 다고스티노의 출범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시작은 모멘텀이었다. 모노블럭 형태의 모멘텀은 초창기 뜨거운 반응을 얻었으나 저역이 허약하다는 평가가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중, 고역은 어떤 앰프보다 훌륭했다. 이어 모멘텀은 M400 등 후계기로 발전하면서 급속하게 댄 다고스티노의 능력을 인정받는다. 인티앰프는 물론 프로그레션이라는 대출력 모노블럭 파워앰프는 댄 다고스티노가 여전히 대출력 앰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내비쳤다.

결국, 댄 다고스티노는 숨겨놓고 있던 발톱을 드러냈다. 순타니파타의 ‘무쏘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처럼 옹고집으로 정진한 그는 필생의 이상에 다가갔다. 크렐 시절 천 와트짜리 Master Reference Amplifier 이후 다시 한 번 초대형 모노블럭 파워앰프에 도전했다. 이름은 ‘Reletless’. 궁극의 파워앰프에 대한 그의 ‘끈질긴’ 열정은 절대 ‘수그러들지’ 않았다. 본작은 8옴 기준 무려 1500와트 출력의 거함이다. 출력 스테이지에 무려 100개의 트랜지스터를 투입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출력선에 충분한 전류를 공급하기 위해 댄 다고스티노는 거대한 전원부를 꾸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8옴 기준 1500와트면서 4옴에서 3천와트, 2옴에서 6천와트 등, 대응하는 스피커의 부하 임피던스가 절반으로 떨어질 때 정확히 배수의 출력을 낼 수 있는 파워앰프를 목표로 하면 더욱더 완벽한 전원부는 필수가 된다. 

Relentless에 무려 5.5kW 라는 엄청난 전력 공급이 가능한 전원부에 600,000μF/100V의 정전용량을 구축한 것은 놀랍지 않다. 1500와트 출력에 선형적인 출력 증강을 위해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런 정전용량을 모두 채우기 위해선 아마도 옥내 전력 사정이 넉넉하지 못할 경우 두꺼비집이 내려갈지도 모른다. 댄 다고스티노는 슈퍼 레일 기술을 개발해 전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되 다이내믹스를 해치지 않는 방식을 고안해냈다. 

아마도 이 앰프의 설계를 관통하는 댄 다고스티노의 철학은 대출력과 음질의 양립으로 보인다. 대개 출력이 올라가면 전반적으로 소리가 딱딱해지고 드세며 건조해지기에 십상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기성작품이나 자작품 등이 이런 대출력과 선형적인 출력이 지상 최고의 증폭 이념인 것 마냥 홍보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점은 PA용 대출력이 아니라 매우 높은 순도와 낮은 디스토션을 가진 지고의 사운드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다이내믹이 필요하지 않은 음악 애호가가 결국 능률이 높은 동축, 풀레인지 같은 스피커에 저출력에 왜곡이 낮은 싱글 엔디드 A 클래스 앰프를 선호하는 이유다. 

그러나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의 경우 호락호락하지 않다. 최고 수준의 SPL 음압과 다이내믹스, 해상도를 가지면서도 최고 순도를 가진 앰프를 요구한다. 따라서 대출력을 지원하면서 디스토션이 극도로 낮은 고성능 앰프가 필요해졌다. 아마도 댄 다고스티노는 저출력 고순도와 대출력에 거대한 다이내믹스 표현 모두 가능한 앰프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것이 Relentless에서 가능하다면 이 앰프는 그야말로 궁극의 파워앰프로서 하이엔드 오디오 명예의 전당(이런 것이 있다면)에 헌액될지도 모른다. 

댄 다고스티노는 크렐 에볼루션 시리즈와 이후 e 버전부터 이런 이상적인 앰프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회로를 진화시켜왔다. 그러나 더 이상 A 클래스 앰프는 아니었고 푸시풀 방식 AB 클래스 회로 안에서 해결하려 했다(그런데도 에볼루션 파워앰프는 굉장히 뜨거웠다). 아무튼 이번 플래그십 Relentless에서 일단 대출력을 구사하기 위해 밸런스드 브릿지 방식으로 설계했다. 천 와트가 넘어가면 이런 방식밖엔 답이 없다. 

한편 이런 회로에서 음질 저하의 원인이 되는 +, - 신호의 정확한 역상 신호 증폭을 구현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와 – 신호가 거울처럼 서로 완벽한 역상으로 증폭하며 신호 사이의 오차와 시간차로 인한 잡음, 즉 왜곡과 디스토션을 극도로 낮추었다. 실제 댄 다고스티노에서 공개한 스펙만 보자면 8옴, 1500와트 최대 출력에서 1kHz를 흘렸을 때 왜율이 고작 0.007% 정도에 그친다. 슬루 레이트는 100V/μs, 출력 임피던스는 인간의 최대 가청 범위 내에서 0.03Ω 이하로서 굉장한 앰프가 태어났다고 결론 낼 수 있다. 

힘과 음질을 양립하다

하지만 스펙만 보고 이런 용비어천가식 결론을 내는 것은 성급하며 옳지 않다. 스펙과 음질은 어느 때든 서로 배반을 일삼기 때문이다. 테스트를 위해선 총 두 개의 스피커를 교차 비교하는 방식을 택했다. 단 하나의 앰프가 모든 스피커에서 뛰어난 소리를 내주기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교차 비교를 통해 특성을 도출해내기 위해서다. 하나는 B&W 800D3, 또 하나는 아방가르드 Trio Luxury Edition 26이다. 소스기기는 린 클라이맥스 DS/3를 사용했다.

Round About Midnight

일단 마일스 데이비스의 ‘Bye bye blackbird’ 같은 재즈 레코딩을 들어보면 하모닉스 특성을 얼마나 잘 풀어내는지 알 수 있다. 대체로 이런 대출력 앰프에서 취약한 것이 매우 복잡다단한 관악기의 하모닉스 표현에서 거칠고 건조한 소리를 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댄 다고스티노의 Relentless 같은 경우 굉장히 높은 고역대까지 B&W 800D3의 다이아몬드 트위터를 두르려 표현해내고 만다. 쥐어짜는 느낌이 아니라 매우 상쾌하고 쉽게 뻗어 나가는 소리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마우스가 떨리는 소리까지도 포착될 만큼 감쇄 없이 그리고 일그러짐 없이 하늘 높이 날아간다. 이런 고역 아래엔 묵직하게 서포트하는 리듬 섹션이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Anne-Sophe Mutter - Schindler's List

The Club Album (Live From Yellow Lounge)

사실 지난 오디오쇼에서 이 제품을 B&W 스피커와 들어본 적이 있으나 너무 드세고 딱딱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다시 세팅한 800D3와 매칭에서 감정적인 표현까지 드러날 정도로 날 선 고역이 말끔하게 정리되고 느긋하게 강, 약 조절을 해냈다. 이런 능숙한 표현력은 안네 소피 무터의 ‘쉰들러 리스트’ 테마곡 연주에서 드러났다. 스피커를 쉬지 않고 쥐어짜는 느낌은 사라지고 치고 올라갈 때와 안정감 있게 내려앉을 때를 알고 능수능란하게 조절하는 모습이다. 해상력은 현존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여서 음악을 듣는 내내 바이올린을 품에 안고 쓰다듬듯 절절한 비애가 전해온다. 

The Ozone Percussion Group - Jazz Variants

The Percussion Record

많은 메이커의 대출력 앰프들이 겪는 문제는 힘을 얻고 음악적 표현력을 잃는 것이다. 이런 경우 음의 결이 다소 거칠고 특히 인간에게 가장 민감한 1kHz에서 3kHz 정도 사이 대역이 거칠 거나 버석거리는 건조함이 발견된다. Relentless는 동사의 기존 제품들에 비해 출력이 훨씬 높지만 빵빵하게 부풀려 컴플레셔로 압축한 소리가 아니다. 출력 수치를 알기 전까지는 몇 와트인지 상상할 수 없다. 다만 매우 커다란 다이내믹스가 넘실대는 레코딩에서만 자신의 능력 최대치 보여줄 뿐이다. 원래 출력 수치란 그런 것이다. 예를 들어 오존 퍼커션 그룹의 ‘Jazz variants’에서 보여주는 다이내믹스 폭은 실제 밴드가 눈앞에서 연주하는 듯한 싱싱한 현장감을 보여준다. 아방가르드에서 들었던 기존 사운드와는 결을 달리하는 폭발적인 역동성이다.

Diana Krall - S' Wonderful

The Look Of Love

뛰어난 튜닝과 스피커의 위치 그리고 룸 어쿠스틱 환경 안에서 Relentless는 자신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뿜어낸다. 아방가르드 스피커에서 다이애나 크롤의 ‘S’wonderful’ 같은 보사노바풍 재즈 보컬 레코딩을 들어보면 이것이 과연 아방가르드 스피커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절도와 기개 그리고 에지와 투명도를 선사한다. 물론 아방가르드 순정 앰프나 300B 등 진공관 앰프와 매칭에서 무척 여유롭게 살랑거리는 혼의 마성에 취하는 것도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Relentless는 아방가르드 혼에 1500와트급 트랜지스터 파워 매칭이라는 비상식적인 매칭에서 놀라운 투명도와 함께 귀를 바짝 대로 거의 들리지 않는 노이즈 등으로 잘 만든 트랜지스터 앰프의 표본임을 증명했다. 1500와트의 달콤한 중역과 투명한 고역, 상상할 수 없었던 아이러니가 현실이 되었다.

총평

단지 대출력이기 때문에 훌륭한 앰프라는 말은 이제 오디오파일에게 설득력을 잃었다. 순진한 입문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안다. 소출력에 싱글 엔디드, A클래스 방식이 트랜지스터 앰프에서는 가장 좋은 음색을 낼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러나 현대 하이엔드 스피커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더 높은 출력과 더 커다란 전원부, ‘더더더’를 외치면서 댄 다고스티노는 이제 천 와트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얘기하지만, 오디오는 격투기가 아니다. 높은 출력으로 스피커에 커다란 전류를 아무렇게나 흘리면 음악은 더 이상 음악이 아니고 소음이 된다. 

아마도 댄 다고스티노는 AB 클래스 증폭 방식에서 대출력을 구사하되 A 클래스에 버금가는 사운드 퀄리티를 양립하기 위한 어떤 증폭의 이데아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힘이 좋은 앰프를 만드는 것과 진정 음악을 즐기기 좋은 앰프를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일이지만 그는 이 꿈같은 일을 Relentless에서 거의 모두 해낸 것 같다. 유일한 약점이라면 보통의 재력으로는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앰프를 온전히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Relentless는 진부해지기 일보직전인  전 세계 하이엔드 오디오 설계자와 스피커 메이커들 그리고 오디오파일 사이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