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TZeel 스위스본사 방문기
여러 번 유럽을 방문할 기회는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스위스와는 연이 닿지 않았다. 그 주변에 있는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심지어 오스트리아까지 가봤지만, 스위스는 매번 그냥 통과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대개 스위스를 방문한다고 하면 알프스 산을 염두에 둔만큼, 그와 연관된 관광을 목적으로 한다. 쉽게 말해 스키를 타거나 케이블카로 산 정상에 오르거나 심지어 행글라이더에 매달리기 위한 관광이 주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스키에는 젬병이거니와 무슨 경관이나 풍경이 좋다는 곳을 찾는 것에 별 흥미가 없으므로 이래저래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던 것이다(살인적인 물가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오디오를 즐기고, 리뷰를 하는 사이 조금씩 스위스의 존재가 마음에 다가왔다. 따지고 보면 굳이 시계나 오디오를 빼놓더라도, 스위스에서 손을 대는 제품 중엔 세계적인 명품이 많다. 치밀한 가공 실력이나 빼어난 디자인 센스 등, 그야말로 스위스가 아니면 안 되는 제품들이 의외로 많은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다질이라는 앰프를 만나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스위스 그것도 제네바에 발을 들여놔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이번에 뮌헨 하이엔드 오디오 쇼를 취재하면서, 그 일정에 다질 탐방을 넣을 수 있었으므로, 필자로서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격이 되었다. 그 하나는 스위스 방문이요, 또 하나는 다질 본사 탐방이다.
물론 이곳을 가는 여정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무려 11시간에 걸친 프랑크푸르트행 비행에다 다시 두 시간 텀을 두고 새로 비행기에 올라 제네바에 다다르는 여정이었으므로, 정작 숙소인 NH 호텔에 도착했을 때엔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여담이지만 프랑크푸르트 공항은 왜 이리 크고 넓은가? 단순히 환승을 했을 뿐인데, 착륙 지점에서 이륙 지점까지 걸어가는 데에만 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잠깐 카페테리아에서 샌드위치 한 조각을 먹고 나니 바로 비행기에 올라야 하는 상황이다. 이건 무슨 군사 훈련을 받는 것과 같았다. 역시 오랜 기간 마음에 담아두었던 스위스 땅을 밟는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구나, 속으로 절감하고 말았다.
그래도 숙소인 NH 호텔은 전세계 곳곳에 체인을 둘 만큼 시설이 훌륭한데다가 서비스도 뛰어나서 참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왜 이리 공기가 맑은지, 설악산이나 제주도에 온 듯했다. 참, 여긴 스위스지! 당연하잖아! 이제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아닌 다질 아저씨를 만나러 간다. 힘을 내자.
호텔 뷔페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커피 한 잔 마시니 오전 10시. 때 맞춰 건장한 두 명의 신사가 로비에 들어와 활짝 웃는다. 드디어 다질의 주인공들이 등장한 것이다. 제품 디자이너인 에르베 델레트라즈(Herve Deletraz)의 훤한 얼굴은 이미 사진으로 봐온 터여서 낯설지 않다. 잘 알겠지만, 다질이라는 이름은 델레트라즈에 들어간 알파벳을 새로 배열해서 만든 것이다. '다빈치 코드'에 나오는 애너그램의 일종이다.
그런데 동행한 또 한 명의 신사는 낯설다. 그의 이름은 세르쥬 로쉬(Serge Roch)로 나중에 알았지만, 다질의 경영을 맡고 있는 분이다. 흥미로운 것은 에르베와 세르쥬의 관계. 실은 둘은 사촌지간으로 어릴 적부터 함께 어울려 왔다. 이제 중년이 되어서 함께 회사를 경영하니, 참 그 인연은 보통 질긴 게 아니다. 물론 세르쥬도 오디오파일인 만큼, 에르베가 장시간에 걸쳐 연구할 때 늘 옆에서 시청하고 의견을 개진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제품이 나오고 정식으로 회사가 발족했을 때 세르쥬가 경영을 담당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필자는 세르쥬가 모든 승용차에 올라 다질의 오피스 및 팩토리로 향했다. 호텔에서 목적지까지 꽤 시간이 걸렸는데, 그 덕분에 다질뿐 아니라 제네바 시에 대한 이야기도 이것저것 들어볼 수 있어서 마치 관광하러 온 기분까지 들었다.
참, 제네바는 다질뿐 아니라 파텍이나 롤렉스를 만드는 곳인 만큼, 이 도시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도시 한 가운데에 거대한 레만 호수가 있고, 따로 구시가가 조성되어 볼거리가 몰려 있는 반면 산업기반 시설도 빼곡하다. 또 예술적인 분위기도 풍부해서, 거리 곳곳에 아름답게 치장된 건물들이 많다. 즉, 경관과 관광 자원 그리고 산업이 골고루 발달해서, 여자로 치면 재색 겸비의 미녀라고나 할까?
다질 본사 및 팩토리는 루이 위베르(Louis-Hubert) 지역에 있는데, 이곳이 재미있다. 원래는 기계 가공이나 선반 작업과 같은 하드한 일을 하는 공장 지대였지만, 차츰 이런 기반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지금은 소프트웨어나 정교한 수작업을 요하는 일들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다소 칙칙하고 거친 분위기가 좀 남아 있지만, 안에 들어가면 놀랍도록 청결하고, 심플하며, 효율적이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이 건물에 입주한 회사들이 공동으로 쓰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세면대며 예쁜 액자가 걸린 벽을 보고 새삼 감탄했다. 어지간한 카페의 화장실도 이보다 낫지 않을 것이다. 참, 이런 환경에서 제품을 만드니 이토록 꼼꼼하고, 정교하고 또 아름답게 마무리되는구나 싶었다.
취재를 위해 다질은 두 가지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나는 오피스에서 그간 다질이 걸어온 경위와 신제품에 대한 계획을 듣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옆의 팩토리에 가서 어떻게 제품이 조립되고, 마무리되는지 그 공정을 둘러보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에르베는 뭐 하나 감출 게 없다는 듯 웬만한 정보는 다 줬으며, 심지어 다질의 기본이 되는 설계도도 따로 복사해서 줬다. 참 너무 순진한 건지 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설계도는 필자의 서재 한켠에 소중하게 보관중이다.
이번 취재에서 알아낸 것이지만, 원래 에르베는 지독한 음악광이다. 자택에 가면 한 쪽 벽면 전체가 LP 랙일 만큼, 열렬히 레코드를 모았다. 또 오디오도 무척이나 좋아해 12살 때 처음 산 리복스 인티 앰프를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다. 무려 35년이 흘렀지만, 이 제품은 아직도 멀쩡하다. 여기서 에르베의 성격이나 다질의 특징을 설명하는 부분이 많다고 본다.
아무튼 상황이 그러하니, 제네바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것은 당연한 이치. 이후 학위를 위해 졸업 작품을 준비했는데, 당시에는 디지털 쪽이었다. 실제로 그는 디지털에도 무척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그가 자택에서 쓰고 있는 DAC는 그가 손수 디자인한 제품이니까.
하지만 앰프의 경우 디지털로는 음질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후 아날로그에 정진하게 된다. 무려 16년에 걸친 연구 성과는 NHB 108로 결실이 되어 나왔다. 2002년도 뉴욕에서 스테레오파일이 주최한 오디오 쇼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 제품의 반응은 쇼킹할 정도였다. 여기서 NHB는 'Never Heard Before'의 약자. 그만큼 자신만만했던 것이다.
이때 미국에서 중요한 딜러 중의 한 명인 조나단 틴(Jonathan Tinn)이 다가온다. 테너 오디오, EMM 랩스, 플레이백 디자인 등을 핸들하는 분으로, 그 첨예하고 직관적인 시각은 업계에 정평이 나 있을 정도. 아무튼 에르베가 본격적으로 틴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이미 그가 다질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데에 질려버렸다고 한다. 그 정도로 정보망이 대단했던 것이다.
아무튼 틴을 만나면서 미국 쪽 런칭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여기저기에서 문의가 오면서, 회사의 규모는 급속도로 커져갔다. 이때 에르베는 이미 프리앰프의 개발에 들어갔고, 그 결과물은 다행히 16년 후가 아닌 2년 후에 나왔다. NHB 18NS가 그것이다.
이 제품에는 여러 가지 유머스러운 것들이 들어가 있다. 셀렉터단의 경우 'Enjoyment Source'라고 불렀고, 볼륨은 'Pleasure Control'이라고 명했다. 심지어 프로토 타입은 '미운 오리 새끼(Ugly Duck)'였다. 사실 에르베는 사진에서 보면 다소 엄숙하고, 냉랭해 보이지만 실은 가슴이 따뜻하고 유머도 곧잘 하는 분이다. 그런 낙천적인 성격의 일부가 이런 쪽으로 발현되었으리라.
그 후에 착수한 것이 인티 앰프로, 2007년도에 프로토 타입이 나왔지만 양산은 늦어져서 올해에 들어서야 겨우 받아볼 수 있었다. CTH 8550이라고 명명된 이 제품은 가격은 분리형 세트에 비할 때 절반 정도 하지만, 퀄리티는 85%에 달한다고 한다. 여기서 CTH는 'Closer to Heaven'의 약자. 또 숫자는 85% 및 50%에서 따온 것이다. 다시 에르베의 유머가 발휘된 셈이다.
그런데 올해 우리는 CTH 8550으로 다질을 만났지만, 이미 다음 프로젝트는 거의 완성 단계에 와 있다. 많은 애호가들이 열망하던 모노 블록 파워 앰프가 올 1월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CES에 최초로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새시조차 제작되지 않아 나무로 대충 케이스를 만든 제품이지만, 평이 무척 좋았다. 이번 방문에서 들어보기를 강력하게 희망했지만, 프로토 타입이 마침 미국에 대여 중이었다. 조나단 틴이 한 발 빨랐던 것이다. 아무튼 그 제품으로 이미 여러 대의 주문을 끌어냈다고 하니, 더욱 기대가 된다.
여기서 필자는 왜 이렇게 다질의 음이 투명하고, 나긋나긋하며, 높은 해상력을 갖고 있는지 그 비결에 대해 물었다. 아마 누구라도 에르베를 만나면 첫 번째 질문으로 이 부분을 언급할 것이다.
"서킷을 단순하게 설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잘라 말한다. 수많은 세월을 연구에 보내며 얻은 결론이다.
"제 처음 앰프인 NHB 108은 6개의 트랜지스터, 6개의 정션(junction)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번 인티는 더욱 수를 줄여서 3개의 정션으로 끝냈죠."
여기서 정션이란 일반적으로 말하는 스테이지이다. 즉, 앰프의 경우 몇 개의 스테이지를 거쳐 입력 신호가 증폭되고 또 다듬어지고 하는데, 이런 정션을 줄이려면 말이 쉽지 그리 간단치 않다. 이를 위해 그는 완벽한 회로를 고안해냈고, 필자에게 그 회로도를 건넨 것이다.
단 여기서 몇 가지 조건이 더해진다. 네거티브 피드백을 없애고, 필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TR 앰프의 성격성 피드백을 아예 없앨 수는 없다. 다질은 이 부분에서 적절히 타협, 중간 정션에 약간의 피드백을 걸고는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TR 앰프에 비할 때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튼 108에서 시작된 착상은 결국 특허를 끌어내기에 이르렀고, 잘 찾아보면 여러분도 필자가 얻은 회로도를 웹상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번에 소개된 인티 앰프의 경우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기에 3개의 스테이지로 구성될 수 있었을까? 이 부분에 대해 물어봤더니 어이없이 간단명료한 답이 나왔다.
첫 번째 스테이지는 인풋, 두 번째 스테이지는 게인 증폭, 그리고 마지막 스테이지는 아웃풋. 즉, 108에서 더욱 발전시킨 회로로, 더 이상 피드백이 없고 중간에 컨트롤할 부분도 없지만 더욱 다이내믹해진 것이다. 이렇게 108에서 8550으로 진화된 기술이 모노 블록 앰프에서 어떻게 발휘될지는 상상만 해도 즐겁다.
일단 오피스에서 인터뷰를 끝내고,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흰색으로 마감한 룸은 전체적으로 청결하게 다가오고, 넓은 공간 곳곳에 빈티지 라디오나 자신이 처음 사용한 리복스 앰프(정확히는 A740이라는 모델이다), 간단한 마무리 공작 기기 등이 놓여 있었다.
여기서 필자는 한쪽 벽에 걸려 있는 문제의 모노 블록 디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최종 마무리가 된 것으로, NHB 458이라고 명명했는데, 거대한 토로이달 트랜스라던가 단단한 받침대 등도 인상적이었지만, 옆을 투명하게 처리해서 보는 재미도 남달랐다. 실물을 봤을 때 첫 눈에 반할 애호가들이 많을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샴페인이 터졌다. 알고 보니 에르베와 세르쥬는 알아주는 술꾼. 우리가 점심 식사 후에 뮌헨으로 가기 때문에 일찍 마개를 딴 것이다.
아무튼 살아오면서 낮 12시 전에 샴페인을 마셔본 게 처음이라 얼떨떨했지만, 술꾼끼리 통하는 공범 의식(?) 덕분에 필자는 더욱 에르베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오피스를 빠져나와 옆방으로 갔다. 문을 열고 보니 상당히 넓은 공간에서 몇 명의 직원이 앰프를 제조하고 있었다.
이쪽 어셈블리 룸의 보스는 마크라는 분으로, 그가 간략하게 제조 과정을 설명했다. 다질에 쓰이는 트랜스포머는 노라텔(Noratel)사의 제품이다. 잘 알다시피 노라텔은 80여 년간 트랜스만 만든 회사로, 전세계 12개국에 16개의 공장을 갖고 있으며, 2,75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곳이다. 여기에 특주를 해서, 다질이 원하는 스펙대로 제품을 공급받는 것이다. 단, 이 트랜스를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선 정리부터 새롭게 한다. 다른 부품과의 접속을 용이하게 하려면, 적절한 마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현재 작업대에는 프리, 파워 그리고 인티 등이 골고루 뒤섞여 있는데, 세계각지에서 들어온 주문을 소화하기에 무척 바쁜 모습이었다. 여기에 AS도 있으므로, 앞으로 일손을 더 늘여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모노 블록이 있지 않은가?
사실 다질의 제품, 만드는 과정이 까다롭다. 인티 앰프를 한번 예로 들어보자. 단순한 파워 블록 및 아날로그 회로뿐 아니라, AD 컨버터, CPU 보드, USB 보드 등이 필요하며, 이를 한정된 수납공간에 효율적으로 집어넣어야 한다. 말하자면 정밀 시계 공작을 해온 스위스 특유의 장인 전통이 없으면 불가능한 부분이라 하겠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물었다. 전면 패널은 이토록 멋진 샴페인 골드의 알루미늄이면서 왜 몸체는 철제를 사용했는지.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쉴딩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 제품은 일단 커다란 트랜스가 들어갑니다. 자력 문제가 발생하죠. 이 부분을 쉴딩하기엔 철이 유리합니다. 또 하나는 비용 문제입니다. 새시 모든 부분을 알루미늄으로 했을 때 단가가 너무나 올라갑니다."
단, 여기에 들어가는 철은 스웨디시 퀄리티의 것만을 사용한다고 한다. 절대로 스테인레스 스틸이 아닌, 순수한 철이다.
조립 과정도 흥미롭다. 전체 부품을 다 모아서 배열한 다음 새시를 조립할 때, 그냥 나사로 조이지 않는다. 1차로 작은 핀을 구석구석 꽂아서 전체 밸런스를 조율한 다음, 그 핀을 뽑고 나사를 꽂는 식이다. 말하자면 시계 조립하듯 정밀한 과정으로 완성하는 것이다.
다질의 제품은 기본적으로 정확한 스펙을 갖추기 위해 만전을 기하고 있다. 음만 듣고 대충 튜닝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이를 위해 프리시션 디바이스제 장비를 사용하고 있다. 피리즘 사운드 시리즈 3이 그 주인공으로, 계측에선 상당히 정밀도가 높다고 한다.
사실 이번 탐방에서 제일 기대를 가졌던 것은 모노 블록 NHB 458의 시청이었다. 하지만 기기는 대여 중이었으므로, 대강의 개요만 들을 수 있었다. 여기서 458은 8옴에 채널당 450W가 나오기에 작명한 것이라 한다. 역시 에르베답다. 하지만 실제로는 600~700W도 충분히 나오므로, 이 앰프로 못 울릴 스피커는 없다고 장담해도 좋을 듯하다. 당연히 트랜지스터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고, 트랜스포머나 서킷을 보호하는 회로도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출력에 비해 전원을 많이 먹지 않도록 한 것도 큰 메리트라 하겠다. 올 7월쯤 본격 생산에 들어간다고 하니 우리는 가을에 만날 수 있을 듯하다.
아무튼 다소 섭섭한 마음을 알았는지 에르베가 제안을 하나 했다. 실은 108바디에 458의 서킷을 넣어 자택에서 사용하고 있으니, 음만 가볍게 듣는 것이라면 괜찮다는 것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래서 차로 30분 정도 이동해서 에르베의 자택을 방문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음악실은 지하에 있었는데, 들어가는 입구에 커다란 방공호가 보였다. 냉전 시절, 핵전쟁에 대비해 대부분의 스위스 주택들은 의무적으로 지하에 이런 시설을 만들었다고 한다. 일단 문을 닫으면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이 될뿐더러, 3개월 정도는 비축한 양식으로 버틸 수 있다고 하니, 스위스라는 국가의 지리적인 위치나 여러 정치적 상황이 얼핏 다가왔다. 아무튼 철두철미한 사람들이다.
에르베의 음악실은 한쪽 벽이 LP 컬렉션으로 채워질 만큼 수많은 음반이 보였다. 당연히 클래식이 주류이거니 했지만, 의외로 팝이나 록 앨범이 많았다. 비틀즈나 스톤즈는 기본이고, 이글스, 다이어 스트레이츠, 필 콜린스, 크림 등 다양한 장르가 보였다. 모두 상태가 깨끗해 노 오픈을 사다가 정성껏 보관해온 느낌이 우러났다. 그의 성격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이번 시청은 간략하게 모노 블록의 성격만을 짐작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분석보다는 즐기고, 느끼는 데에 더 주력했다. 그러므로 필자가 좋아하는 비틀즈, 마일스 데이비스, 크림 등에 클래식 몇 곡을 들었는데, 이볼루션에서 나온 거대한 3웨이 스피커를 여유 있게 구동하는 모습에서 상당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모노 블록으로 울렸을 때 어떤 음이 나올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문득 참 음악이란 좋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멋진 호반 도시에서 여유롭게 음악을 들으며 낯선 사람과 친구가 된다는 것, 그 배경에는 음악과 오디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에르베와 새로 들을 음반을 고르면서 그가 건네는 레드 와인을 한 잔 쭉 들이켰다. 이제 시간은 정오를 지났고, 저녁에는 뮌헨으로 이동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낮술정도는 한번쯤 허용해도 괜찮지 않을까? 여기는 제네바, 서울로 치면 저녁 7시다. 생체 시계는 별 문제가 아니라며 계속 들이키라 권하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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