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289회 하이파이클럽 시청회는 폴란드 DAC 전문 제작사 램피제이터(LampizatOr)의 새 플래그십 Pacific DAC(퍼시픽 DAC)의 이모저모를 자세히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왜 램피제이터 DAC가 DSD 재생에서 적수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지, 그리고 출력단에 투입된 진공관에 따라 음질이 얼마나 크게 바뀌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시청회 세팅

하이파이클럽 메인 시청실에서 진행된 퍼시픽 DAC 시청회에는 네임(Naim)의 플래그십 프리/파워앰프 Statement(스테이트먼트)와 포칼(Focal)의 플래그십 스피커 Grande Utopia EM EVO(그랜드 유토피아 EM 에보)가 동원됐습니다. 퍼시픽 DAC의 아날로그 출력은 RCA, XLR 모두 지원하는데, 시청회에서는 XLR 케이블로 스테이트먼트와 연결했습니다.

소스 기기는 오렌더의 플래그십 네트워크 뮤직서버 W20SE를 투입, 퍼시픽 DAC과 USB 케이블로 연결했습니다. 퍼시픽 DAC은 또한 자체적으로 룬(Roon) 레디 인증을 받은 네트워크 플레이어인 만큼 별도로 이더넷 케이블을 연결, W20SE를 거쳤을 때와 직접 룬 네트워크에 연결됐을 때 타이달 음원의 음질 차이도 비교해봤습니다. 룬 코어는 웨이버사의 W Core입니다.

램피제이터와 DAC

램피제이터는 오디오파일 공학도가 작정하고 만든, 오디오파일을 위한 DAC 제작사입니다. 램피제이터의 설립자이자 현 CEO인 루카스 피쿠스(Lukasz Fikus)는 1965년생으로, 폴란드 명문 바르샤바 공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뒤 대기업에 다니면서 취미로 오디오를 자작했습니다. 오디오 자작/개조 블로그를 10여 년간 운영했을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2010년 7월 바르샤바에 설립한 제작사가 램피제이터이고, WE 복각 101D 진공관을 투입해 2015년 뮌헨 오디오쇼에 첫선을 보인 DSD DAC이 바로 그 유명한 Golden Gate DAC(골든 게이트 DAC)입니다.

오디오 제작자가 공학도 출신에 오디오파일, 자작 마니아라면 그 제품이 어떨지는 답이 금방 나옵니다. 컨버팅 이후 아날로그 출력단에 진공관을 고집하는 것, PCM 컨버팅과 DSD 컨버팅을 별개 회로로 구성한 것, DSD 컨버팅에 기성 칩을 쓰지 않는 것, PCM 컨버팅용 DAC 칩은 제작자가 무려 8년 동안 100여 개 후보 중에서 선별해 골랐다는 것, 중급 모델 이상의 파워서플라이는 듀얼 모노에 정류관이 투입되는 것, 내부 배선에 테플론 피복의 은선을 사용하는 것, 최종 완성품을 제작자가 직접 테스트한 후에 출하가 이뤄지는 것 등이 대표적입니다.

이중 ‘컨버팅 이후 아날로그 출력단에 OP 앰프나 트랜지스터를 쓰지 않고 진공관을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램피제이터 DAC 라인업을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키워드입니다. 음악 저장매체로는 디지털이 최고이지만, 음악성과 리니어리티에 관한 한 진공관이 영원한 갑이라는 게 루카스 피쿠스의 철학이죠. 그의 별명이 폴란드어로 진공관을 뜻하는 ‘Lampa’와 종결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 ‘Terminator’에서 따온 ‘램피제이터’였고 이 별명이 그대로 사명이 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DAC 칩을 어떤 것을 썼는지 공개하지 않는 점도 램피제이터의 독특한 면모입니다. 루카스 피커스는 델타 시그마 방식이든, R-2R 래더 방식이든 DAC 칩이 제품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10%에 불과하며, 디지털 신호를 받아들이는 수신칩이 50%, 수신칩과 DAC 칩의 인터페이스가 20%, 파워서플라이 설계가 나머지 20%를 차지한다고 강조합니다. USB 리시버 칩의 경우 램피제이터 전 모델이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XMOS 칩 대신 아마네로(Amanero) 칩을 쓰는 것도 이러한 우선순위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DSD 컨버팅의 경우 루카스 피쿠스가 아두이노(Arduino) 마이크로프로세서로 직접 설계한 듀얼 모노 회로를 통해 이뤄집니다. 10배 업 샘플링 후 1비트 델타 시그마 과정을 거쳐 패시브 로우패스 필터(LPF)만 거친 후 아날로그 출력단으로 넘어가는 심플한 경로가 눈길을 끕니다. 이처럼 DSD 음원이 최단 경로를 통해 아날로그 출력단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그 음질이 PCM에 비해 더 뛰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비해 PCM은 DAC 칩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LampizatOr Golden Gate 2 DAC

2019년 9월 현재 램피제이터 DAC 라인업은 플래그십 퍼시픽 DAC부터 시작해 Golden Gate 2 DAC, Big 7 mk2 DAC, Baltic DAC, Atlantic TRP DAC, Amber 3 DAC으로 짜였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모델이 다시 다양한 옵션을 걸고 있는 점도 이 제작사의 특징입니다. 퍼시픽 DAC의 경우 추가 비용을 내고 밸런스 모델, 밸런스 & 리모트 볼륨 컨트롤 모델 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밸런스 & 리모트 볼륨 컨트롤 모델의 경우 조그만 디스플레이와 저항 래더 어테뉴에이터 방식의 볼륨 노브가 달리고 리모컨도 제공됩니다.

Pacific DAC은 어떤 DAC?

퍼시픽 DAC은 2017년 10월 미국 RMAF에서 처음 선보인 램피제이터의 플래그십 DAC으로, 시청회 모델은 풀 밸런스-제로 피드백 회로에 XLR/RCA 아날로그 출력단과 볼륨단을 갖춘 모델입니다. 무엇보다 출력 스테이지에 여러 직열 3극관(300B, 45, 245, 345, PX-4, PX-25, 242, 101D)을 교체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점, 정류단에 진공관(5U4G)을 쓴 점, 이더넷 케이블 연결만으로 룬(Roon) 네트워크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컨버팅 스펙은 PCM은 32비트/384kHz(USB, LAN), 24비트/192kHz(SPDIF, AES/EBU), DSD는 네이티브로 DSD512(USB, LAN)까지 가능합니다.

외관을 보면 무게 40kg, 높이 19cm, 폭 43cm, 안길이 52cm나 나가는 크고 육중한 섀시가 24K 금 도금된 점이 눈길을 끕니다. 이는 단지 호화로운 눈맛을 위해서가 아니라 금이 이 세상에서 섀시를 가장 잘 보호할 수 있는 물질이어서 채택한 것이라고 합니다. 전면 패널에는 디스플레이와 래더 저항 방식의 볼륨 노브(Taras 2017 VC-04)가 있고, 상판에는 앞쪽부터 정류관 5U4G 1개, 출력관 300B 4개, 가운데에 출력관 커런트 소스(current source) 역할을 하는 쌍삼극관 NOS 6H6P가 2개 장착돼 있습니다.

정류관 5U4G와 출력관 300B가 모두 하이엔드 진공관 메이커인 체코의 KR 오디오(KR Audio)에서 퍼시픽 DAC을 위해 특별히 만든 KR 5U4G, KR 300B-RK인 점도 짚고 넘어갈 만합니다. 시청회에서 튜브 롤링을 했던 PX-4 진공관도 KR 오디오 제품입니다. 시청회에 등판했던 또 다른 출력관은 푸스반(Psvane)의 WE 101D 복각관입니다. 이들 3개 진공관 모두 필라멘트를 직접 달궈 전자를 방출케 하는 직열 3극관인데, 채널당 2개씩 투입된 것은 시청회 퍼시픽 DAC 모델이 밸런스 회로(+, -)를 채택했기 때문입니다.

후면을 보면 왼쪽부터 히터 실렉터(300B, 101D, PX-4, 242, 45), 그라운드 단자, 아날로그 입력단자(RCA, XLR), 아날로그 출력단자(RCA, XLR), 이더넷 단자(Roon Bridge), 디지털 입력단자(BNC, SPDIF, USB-B, AES/EBU)가 구비돼 있습니다. 히터 실렉터를 돌리는 것만으로 출력관을 선택할 수 있는 점(해당 출력관의 필라멘트 전압을 조정), 아날로그 입력단자가 있어 프리앰프로도 쓸 수 있는 점, 이더넷 단자를 통해 룬 코어가 있을 경우 곧바로 룬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LampizatOr 57 Engine(램피제이터 57 엔진)이라고 쓰인 PCM 컨버팅 칩

공개된 내부 사진을 보면 ‘LampizatOr 57 Engine’(램피제이터 57 엔진)이라고 쓰인 PCM 컨버팅 칩이 채널당 1개씩 투입됐습니다. 어떤 칩인지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멀티비트, PCM 384kHz, DSD512, 풀 차동 밸런스 출력단 설계의 최신 칩”이라고 합니다. 진공관 필라멘트 전원은 저잡음 SMPS를 쓰고, 다른 전원은 폴란드 제작사인 토로이디(Toroidy)에서 만든 2개의 토로이달 트랜스포머와 레세크 오고노브스키(Leszek Ogonowski)에서 만든 다수의 초크 트랜스, 독일 문도르프(Mundorf)의 MKP 커패시터가 책임집니다. USB 리시버칩은 아마네로(Amanero) Combo384 칩, 클럭은 펄사(Pulsar)의 펨토급 클럭을 주파수별로 총 2개 썼습니다.  

룬(Roon) 음질 시청

Diana Krall - A Case Of You (Live)

Live In Paris

시청회 1부는 기본관인 KR 300B-RK를 꽂은 상태에서, 퍼시픽 DAC을 네트워크 DAC(룬 타이달 직접 재생)과 USB DAC(오렌더 W20SE 타이달 재생)으로 썼을 때의 음질 비교, PCM과 DSD 음원의 음질 비교 순으로 진행됐습니다. 먼저 다이애나 크롤(Diana Krall)의 'A Case of You'(Live In Paris 앨범) 타이달 음원을 룬으로 들어보면, 촉촉하고 부드러운 음, 배음이 풍부하고 온기와 찰기가 느껴지는 음이 펼쳐집니다. 저역의 양감과 묵직한 맛, 에너지감도 상당하네요. 그러나 KR 300B-RK 음의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300B의 맑고 깨끗하며 담백한 촉감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기분 좋은 기름기가 살짝 베여있는 소리였습니다. 

Michael Stern, Kansas City Symphony 

Introduction Et Rondo Capriccioso In A Minor, Op.28

Saint-Saëns, C.: Introduction Et Rondo Capriccioso, Op. 28 / La Muse Et Le Poete / Symphony No. 3, "Organ" (Geller, Gibbs, Kraybill)

마이클 스턴(Michael Stern)이 칸자스시티심포니(Kansas City Symphony)를 지휘한 '생상스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Introduction and Rondo Capriccioso. Saint-Saens Symphony No.3 앨범)를 들어보면 매끄러운 음의 감촉과 함께 저역의 트랜지언트 특성이 돋보이는 음이 튀어나왔습니다. MSB R2R DAC에 에너지를 첨가한 듯한 음이라고 할까요, 그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투명한 고역과 묵직한 저역, 꽉꽉 들어찬 음의 알갱이가 매력적인 음이었습니다. 질척거림 없이 시원시원하게 질주하는 스피드감, 잡맛이 일절 없는 가운데 넘쳐나는 파워가 마치 잘 세팅된 LP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이더넷 입력 vs USB 입력 비교 시청

Diana Krall - 'S Wonderful

The Look Of Love

이번에는 오렌더의 네트워크 뮤직서버 W20SE를 투입해 룬 타이달 네트워크 재생과 USB 입력 재생의 음질을 비교해봤습니다. 우선 다이애나 크롤의 ''S Wonderful'(The Look Of Love 앨범)을 이더넷 입력(룬 타이달 음원)으로 들어보면, 둥둥거리는 저음의 탄력감과 에너지감에 기분까지 좋아집니다. 묘하게 안정감이 느껴지는 재생음이네요. W20SE를 USB 출력시켜 같은 타이달 음원을 들어보면, 에너지감은 줄지만 섬세하고 풋워크가 좀 더 경쾌해집니다. 무대 역시 보다 넓어졌지만, 개인적으로는 음이 조금 야위고 평범한 모습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PCM vs DSD 비교 시청

Carlos Kleiber, Wiener Philharmoniker

Symphony No.5 In C Minor, Op.67 - I. Allegro Con Brio

Beethoven: Symphonies Nos.5 & 7

이번 시청회의 하이라이트 2개를 꼽자면 역시 퍼시픽 DAC의 DSD 음원 재생 솜씨(시청회 1부)와, 출력관 교체(튜브 롤링. 시청회 2부)에 따른 음질 변화를 추적하는 일이었습니다. W20SE에 물린 상태에서, 그리고 KR 300B-RK를 꽂은 상태에서,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가 빈필(Wiener Philharmoniker)을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5번 1악장(Beethoven Symphonie Nr.5 앨범)을 DSD64 음원으로 들어봤습니다. 거침없이 활보하는 많은 음수와 폭넓은 다이내믹 레인지, 그러면서 DSD 음원 특유의 매끄럽고 온화한 소릿결이 잘 느껴집니다. 이어 같은 곡을 24비트/88.2kHz PCM 음원으로 들어보면, 상대적으로 거칠고 앙상한 음들이 그것도 가볍게 왔다 갔다 움직이다 맙니다. 음이 평범하고 수척해졌을 뿐만 아니라 무대까지 작아졌습니다. 

Bill Evans Trio - Waltz For Debby

Waltz For Debby

빌 에반스 트리오(Bill Evans Trio)의 'Waltz For Debby'(Waltz For Debby 앨범)를 DSD64 음원으로 들어보면, 윤곽선이 생생하고 또렷한 음, 스케일이 큰 무대, 무엇보다 현장에서 채집된 여러 노이즈마저 음악적으로 들리는 현장감 등이 돋보입니다. 그만큼 정보량이 많다는 뜻이겠죠. 이어 PCM 음원으로 바꿔보면, 중역대 살집과 음수가 줄어들고 퍼시픽 DAC이 음원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소극적으로 변합니다. 무대는 다소 평면적으로 바뀌며 윤곽선 역시 흐릿하고 색 번짐이 느껴집니다. 안경을 벗었을 때 그 뿌연 느낌도 있습니다. 다시 DSD 음원으로 들어보면, 베이스 연주의 디테일과 저역 해상력이 살아나고 무대가 넓어지며 드럼이 실물 사이즈로 등장했습니다.  

DSD512 음원 시청

Feenbrothers - Take Five

Play Dave Brubeck

하지만 시청회 참석자들이 가장 감탄했던 것은 역시 퍼시픽 DAC이 DSD512 음원을 재생했을 때였습니다. 핀브라더스(Feenbrothers)의 'Take Five'(Play Dave Brubeck 앨범) 음원이었는데, 무려 1.5GB나 나가는 대용량 음원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냥 실제 연주 현장에 온 듯합니다. 연주자들을 둘러싼 공기감, 색소폰의 긴 관을 빠져나가는 연주자의 숨결까지 파악됐을 정도이니까요. 색소폰이라는 악기의 뉘앙스를 거의 완벽에 가깝게 전달하는 모습이 대단했습니다. 한마디로 현존 네트워크 플레이어로는 불가능한 소리, 턴테이블 플레이에 수렴한 그런 소리였습니다. DSD 음원 특유의 매끄러운 소릿결도 극한으로 치달은 느낌이었습니다.  

튜브 롤링(1) 푸스반 WE 101D

Jacintha - Light My Fire

Best of Jacintha

시청회 2부는 퍼시픽 DAC의 출력관을 교체해가며 그 음질 변화를 살피는 시간이었습니다. 시청회 1부는 계속해서 KR 오디오의 KR 300B-RK 관으로 진행됐고, 2부에서는 새로 KR 오디오의 KR PX-4와 푸스반의 WE 101D 복각관을 투입했습니다. 야신타(Jacintha)의 'Light My Fire'(Best of Jacintha 앨범)를 기존 KR 300B-RK 관으로 들어봤습니다. 부드럽고 배음이 풍부한 음, 탄력감과 또렷한 음상이 돋보이는 음입니다. 1부에서 계속 느꼈던 것이지만 3D로 펼쳐지는 사운드스테이지와 온기와 정감이 느껴지는 사운드가 매력입니다. WE 101D 복각관으로 바꿔보면, 진공관 내부 불빛이 KR 300B-RK보다 더 또렷한 점이 외관상 두드러집니다. 전체적으로 스케일과 에너지감은 줄어들었지만 음상은 보다 바싹 조여진 모습입니다. 음색은 담백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이 느껴지네요. 

Carla Bruni - The Winner Takes It All

French Touch

WE 101D 복각관의 매력은 칼라 브루니(Carla Bruni)의 'The Winner Takes It All'(French Touch 앨범)에서 더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듯한 데다 목소리에 포함된 다소 까슬하고 건조한 음색이 마치 육성으로 듣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KR 300B-RK가 젓갈과 양념을 많이 넣어 잘 삭힌 김치라면, WE 101D는 아삭한 맛이 일품인 풋김치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안네 소피 무터의 바이올린 연주곡(쉰들러 리스트 테마곡)에서는 바이올린 고음의 애절하고 섬세한 촉감이 정말 일품이었습니다. 원시 바다에서 막 길어올린 심해어라는 느낌은 역시 WE 101D가 직열3극관이라는 결정적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혹시 앰프나 DAC이 튜브 롤링이 가능하다면 꼭 WE 101D를 들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튜브 롤링(2) KR PX-4

김광석 - 이등병의 편지

인생 이야기

튜브 롤링의 두 번째 주자는 KR 오디오의 KR PX-4 관이었습니다. 야신타의 'Light My Fire'를 다시 들어보면, 농담이 적절히 표현된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했습니다. 음의 세밀한 좌우 움직임마저 포착하는 모습에서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만큼 디테일에도 능한 진공관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WE 101D가 고음 표현력이 좋다면, KR PX-4는 단정하고 대역 밸런스가 잘 잡힌 그런 직열3극관이었습니다. WE 101D가 여성적이라면, KR PX-4는 상대적으로 남성적인 진공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에서는 투명한 레이어와 각 대역의 에너지 밸런스가 돋보였습니다. 

Michael Buble - Fly Me To The Moon

buble! (Original Soundtrack From His NBC TV Special)

마이클 부블레(Michael Buble)의 'Fly Me To The Moon'(Buble 앨범)에서는 KR PX-4 진공관의 음질적 특성이 더욱 확연했습니다. 음상이 선명하고 또렷하며, WE 101D에 비해 보다 빠릿하고 직선적인 음색이 돋보였던 것입니다. 호방하고 시원시원하게 음들을 토해내는 듯한 느낌, 음영 구분이 확실하고 분해능까지 덩달아 상승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정리해보면 KR 300B-RK는 올라운드 플레이어, WE 101D는 소편성과 여성 보컬곡, KR PX-4는 중저역 에너지를 바탕으로 대편성과 남성 보컬, 국내 가요를 듣기에 적합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관마다 이런 음질 차이를 보인 것일까요. 세 진공관의 특성을 표로 간략히 정리, 비교해봤습니다. 

우선 WE 101D의 내부저항이 다른 관들에 비해 높다는 점이 눈길을 끄는데, 내부저항이 낮을수록 대전류를 흘릴 수 있어 저음을 잘 낼 수 있습니다. 때문에 WE 101D를 들으면서 고음 특성이 좋게 느껴진 것은 다른 2개 관에 비해 저역이 그만큼 덜 나온데 따른 반사이익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KR 오디오 300B 진공관이 다른 300B(40W)보다 플레이트 손실(70W)이 높은 슈퍼 300B라는 점도 이 진공관이 보다 힘 있고 단단한 음색을 선사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보입니다.  

시청회를 마치며

퍼시픽 DAC은 DAC으로서는 상당히 큰 덩치와 무게, 그리고 상판에 꽂힌 직열3극관의 당당한 풍채만큼이나 매력적이고 완성도 높은 사운드를 선보였습니다. 오버 스펙일 정도의 전원부와 리니어리티가 좋은 직열3극관의 채용, 그리고 트랜스포머와 커패시터, 저항 등에 호화 부품을 투입한 덕분일 것입니다. 기능적으로는 네트워크 DAC과 USB를 비롯한 디지털 입력 DAC으로서 현존하는 모든 음원 포맷에 대응하는 점, 음질적으로는 DSD 재생음이 PCM을 압도할 만큼 선도가 높았다는 점이 기억에 남습니다. 물론 300B, 101D, PX-4 같은 여러 직열3극관을 교체해가며 음질 변화를 탐미할 수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겠지요. 그것도 후면 스위치 변환만으로 말입니다. 퍼시픽 DAC은 과연 '진공관 종결자'가 만든 최상위 DAC이라 할 만했습니다. 시청회에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