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벗처럼 음악처럼

80년대에 가요를 들었다면 하덕규라는 음유시인을 기억할 것이다. 그의 에고이자 음악적 아이덴티디인 시인과 촌장의 음악에 빠진 이후 ‘가시나무’라는 노래는 나의 취침 음악이 되곤 했다. 1988년 동아기획에서 발매된 시인과 촌장을 ‘가시나무’를 비롯해 ‘새벽’, ‘나무’, 라디오 히트곡이었던 ‘새봄나라에서 살던 시원한 바람’ 등 전곡이 모두 대표곡이라고 해도 될법한 명반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시나무’는 한 줌의 위로가 되어주었다. 하루 일과 후 복잡한 심정에 마음이 어지러울 때나 심신이 지쳤을 때 이 곡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게 마음에 평안을 주었다. 아니 때로는 아름답게 빛나는 매스로 가슴 속을 어루만져주는 듯했다. 이 곡이 종교적 성찰을 표현한 음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나중에서였다. 하지만 만든 이의 목적과 다르게 읽을 권리도 있는 법이다.

당시 그의 음악을 벗처럼 곁에서 친근하게 들려주던 오디오는 아주 작은 미니 콤포넌트였다. 롯데에서 만들었던 자그마한 오디오는 무려 풀레인지이 스피커를 품고 있었고 올인원이 아니라 스테레오 스피커를 달고 나왔다. 본체도 2단으로 분리되어 아주 작은 사이즈였지만 올망졸망 세팅한 모습이 예뻤다. 이젠 이런 오디오를 보기가 힘들어졌지만 탑 로딩 시디피에 좌/우 스테레오 스피커 시스템. 그리고 ‘Sleep’ 기능은 나를 부드럽게 숙면으로 이끌었다.

루악

왼쪽부터 Excalibur, Talisman 1, Equinox

루악을 만나게 된 것은 사실 오래전이다. 최근엔 올인원 오디오, 시쳇말로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이름의 바운더리에 묶여 소개되지만 루악은 애초에 정통 브리티시 사운드를 표방하는 스피커 브랜드였다. 레퍼런스 모델인 엑스칼리버부터 탈리스만, 이퀴녹스 등 오디오를 오래 취미로 삼아온 사람이라면 알 법한 바로 그 루악이다. 특히 이퀴녹스는 예전에 필자가 사용해본 영국 북셀프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았던 스피커다.

‘가시나무’를 엘피로 루악 R5로 듣고 있자 그 당시, 그러니까 루악이 정통 하이파이 스피커만 만들던 당시가 생각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섬광처럼 머릿속의 뉴런은 시냅스에 추억을 소환했다. 하지만 나의 추억은 추억일 뿐이다. 루악은 추억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며 그들은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이 가구 같은 섀시 안엔 그들이 정통 하이파이 스피커 메이커로 활약하며 얻었던 노하우가 최신 기술과 함께 녹아 있었다.

‘음악의 테마파크’ 루악 R5

R5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루악이 발표한 이 깔끔한 이니셜과 모델명을 나타내는 글자는, 그러나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생긴 것처럼 무척 단순한 기능과 음질만을 생각한 보수적 올인원 스피커로 생각했다면 틀렸다. R5는 마치 음악의 놀이공원, 세상의 모든 음악을 가장 다양한 형식으로 들려줄 만만의 준비를 갖췄다. 루악은 R5 안에 음악의 테마파크를 설계해놓고 있는 것이다.

디자인

루악 R5는 너비 520mm에 깊이 300mm 그리고 높이 42mm 규격으로 직접 보면 가로로 넓게 펼쳐진 가구 같은 인상이다. 각 모서리가 라운드 처리되어 있어 부드러운 이미지를 풍기며 그 소재 또한 나무 무늬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자연적인 내음이 물씬 풍긴다. 전면 그릴은 회색 톤으로 나무와 함께 어울려 빈티지 오디오의 그것처럼 오랜 시간을 지내온 듯 편안함을 자아내고 있다. 전면에 가로로 넓게 시디 넣은 입구가 보이며 옆으로 시간이나 재생 관련 정보를 나타내주는 디스플레이 창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한편 상단의 컨트롤 패널 그리고 그와 동일한 리모컨을 지원하며 자체 컨트롤 앱도 무료로 지원하고 있다.

일단 스피커 시스템은 루악의 75mm 풀레인지 유닛이 두 개 삽입되어 있다. 네오디뮴 마그넷을 사용한 것으로 전대역을 하나의 유닛에서 모두 소화하므로 이물감 없이 편안한 사운드를 재생해준다. 더불어 보다 더 깊은 저역을 재생하기 위해 액티브 서브 우퍼를 하나 추가해놓았다. 125mm 구경의 꽤 커다란 우퍼인데 이는 제품의 바닥면에 위치시켜 저역 증강을 꾀한 모습이다. 제품을 금속 바로 탄탄하게 지지해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고음질 블루투스로 간편하게

EMIL GILELS - Brahms piano concerto no.1
Brahms : Die Klavierkonzerte

엘피를 듣고 나자 자연스럽게 시디로 시선이 뒤따랐다. 그 중 에밀 길렐스와 요훔 지휘의 베를린 필하모니가 연주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이 듣고 싶어졌다. 아마 1990년대 말 처음 접했던 당시 그 소리가 이랬을까? 나는 베토벤보다 브람스를 좋아했고 가장 먼저 클래시컬 피아노의 맛을 느끼게 해주었던 연주자가 에밀 길렐스였다. 그리고 지금 다시 듣는 그의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여전히 강렬하고 역동적으로 가슴을 파고 들었다. 일체형 오디오 R5가 이 곡의 정수를 모두 표현한다면 거짓말이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공간을 유유히 파고 들어왔다. 시디피의 로딩 속도도 빠르고 기본 작동도 깔끔했다.

THE WEEKEND - I FEEL IT COMING
STARBOY

이어 가지고 다니는 아이폰 X에 손이 근질근질해졌다. 리뷰어의 직업병처럼 올인원 네트워크 오디오를 접하면 스마트폰부터 꺼내서 블루투스 페어링을 하고 싶어진다. 기기에 아이폰 X를 대고 블루투스(aptX hd)를 활성화시키니 무척 빠르게 루악 R5가 잡혔다. 그리고 R5의 디스플레이 창엔 ‘코난의 iPhone’이라는 글자가 펼쳐지며 기분 좋게 나를 반겼다. 최근 듣던 팝 음악 중 위켄드가 다프트 펑크가 함께한 ‘I feel it coming’을 재생하자 깨끗하고 진한 소릿결이 들려온다. 크기를 감안하더라도 서브우퍼의 도움으로 매우 든든하고 묵직한 힘이 느껴지는 저역이 포만감을 더한다.

악동뮤지션 - 뱃노래
SAILING

작년 처음 듣고 가요 중 애청곡이 된 악동뮤지션의 ‘뱃노래’를 재생하지만 간드러지게 연주하는 어쿠스틱 기타가 귀에 쏙 들어와 박힌다. 기본적으로 풍부한 중역을 내주는 풀레인지 유닛의 특성 덕분에 어쿠스틱 기타의 아르페지오가 한 올 한 올 선명하면서 풍부한 배음이 맛깔난 여음을 만들어낸다. 나무 소재에서 연유하는 목질감 그리고 통 울림의 잔향이 배어 있는 소리다. 다만 일체형으로서 협소한 사운드 스테이징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충분히 거실과 방을 부스럽고 따뜻한 음색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R5의 가치는 빛난다.

온라인/네트워크 스트리밍의 바다로

요즘 올인원 오디오의 가장 큰 축복이라면 온라인 스트리밍과 네트워크 스트리밍 등 디지털 음원 재생에 있을 것이다. 루악 R5도 당연히 이런 디지털 음원에 모두 대응하고 있다. 그중 일단 온라인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에 대해서 자체 앱에 빌트인 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스포티파이 커넥트, 타이달 그리고 아마존 뮤직이 그것. 그 중 오디오파일들이 애용하는 타이달을 시험 삼아 테스트해 보았는데 자체 앱에선 일단 반응이 약간 느린 편이어서 타이달 앱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GREGORY PORTER - Mister Holland
ALL RISE

음질은 적어도 시디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두아 리파의 ‘Don’t star now’, 드레이크의 히트 넘버 등 최신곡들을 들어보면서 흐릿한 오후의 나른함을 깨웠다. 더불어 그레고리 포터의 최신곡 중 ‘Mister Holland’에선 역시 중, 저역이 강조되고 여음이 풍부하게 펼쳐지는, 영락없는 브리티시 사운드의 후예임을 증명했다. 리듬감도 좋고 여유 있게 곡의 페이스에 빨려 들게 만들었다.

Gary Karr - Amazing grace
Double-bass

DLNA도 당연히 지원하는 R5다. 따라서 NAS 등 외부 음원 스토리지에 담긴 음원을 끌어와 재생할 수 있다. 단, 네트워크 스트림은 16비트까지만 지원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음질 면에선 온라인 스트리밍보단 이쪽에서 더 좋은 음질을 즐길 수 있었다. 자체 앱에서 로딩 속도도 오히려 빠른 편으로 개리 카의 ‘Amazing grace’를 NAS에서 재생하니 예상보다 깊은 저역을 진하게 펼쳐내면서 공간을 우렁차게 적셨다.

거실과 서재, 가족과 함께 즐기는 음악

만일 TV가 있는 거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음악을 즐기는 용도로 R5를 사용한다면 TV 등 영상매체와 연결을 거부하기 힘들 것 같다. 마침 설치한 곳에 최신 삼성 TV가 있어 유튜브로 몇 가지 영상을 보면서 TV 자체 스피커로 출력되는 소리와 루악 R5로 출력되는 소리를 비교해보았다. 옵티컬 입력으로 연결한 상태에서도 비교 대상은 아니었다. 특히 저역 쪽 깊이와 양감에서 R5롤 듣는 경우에 더 앞서기 때문에 더 높은 쾌감과 풍부한 음악적 뉘앙스를 체험할 수 있었다. 더불어 가족과 함께 또는 사무실에서 유용한 튜너 기능도 마련되어 있는데 FM과 인터넷 라디오를 모두 지원하므로 여러 사람들과 음악을 나누기에 더없이 좋다.

루악 R5엔 멀티룸 기능도 탑재되어 있다. 단순히 혼자서 자신만의 공간에 특화된 오디오가 아니라 여러 공간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게끔 확장성을 고려한 제품이다. 예를 들어 거실에서 R5로 음알 듣다가 작은방에 있는 아이에게 혹은 다른 방에 있는 아내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면 루악 링크 앱을 통해 동시에 출력이 가능하다. 물론 다른 공간에도 어느 모델이든 루악 오디오가 있어야 한다. 이번엔 MRx라는  루악 오디오로 테스트해보았는데 약 5미터 정도 거리에서 아주 정확한 작동을 보여주었다.

총평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다. 동일한 컨텐츠라고 해도 어떤 환경, 어떤 플랫폼과 인터페이스 위에 존재하는지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 평소 음악에 관심이 크게 없더라도 루악 R5는 자연스럽게 사람을 음악에 적응하게 만들고 결국 주변에 있는 사람을 음악에 물들게 만든다. 가구 같은 디자인 안에 오디오를 빌트인 시킨 듯한 디자인은 이를 더욱 더 부추긴다. 차가운 이미지에 딱딱하고 복잡한 인상을 말끔히 지우고 따뜻한 촉감과 부드러운 이미지로 오디오에 대한 접근 장벽을 보기 좋게 허물고 있다. 마치 R5는 루악이 개장한 음악의 테마파크에 놀라오라는 듯 웃으며 손짓하고 있다. 혼자는 외로우니 가족과 함께 즐겨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