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올 초, 루퍼트 니브 디자인(Rupert Neve Design)의 5060 센터피스(Centerpiece)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최대 8개 채널 소스를 믹싱할 수 있는 서밍(summing) 기능이 핵심이지만, 출력 게인 조절과 출력 트랜스 등을 통해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자신만의 음원을 만드는 재미가 쏠쏠했다. 영국 런던의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도 루퍼트 니브 디자인의 72채널 88 RS 콘솔이 사용 중이라는 사실도 이때 알았다.

그런데 5060의 수많은 노브와 버튼, 슬라이드 중에서 필자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것은 ‘Silk’(실크)라고 쓰인 버튼이었다. 이 버튼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 중고역대가 강조되고, 파란 불이 들어오면 중저음이 도드라졌다. 두 경우 모두 이 버튼을 오프시켰을 때에 비해 보다 질감이 풍부한 음을 맛볼 수 있었는데, 제작사에서는 이를 ‘음에 실키한 텍스처를 얹혀준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실키’ 회로의 원리는 출력 트랜스포머에 걸리는 네거티브 피드백 양을 줄이는 것. 이렇게 되면 배음이 늘어나게 되는데 그 네거티브 피드백 감쇄량에 따라 ‘레드’와 ‘블루’ 텍스처가 결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일반 민수용(?) 진공관 프리앰프도 출력 트랜스의 품질에 따라 소리가 확확 바뀌는데, 이를 5060 센터피스 같은 프로용 서밍 믹서에서도 채택한 점이 놀랍고 신기했다.

이번에 리뷰한 피델리체(Fidelice)의 RNDAC도 예외는 아니다. 피델리체는 루퍼트 니브 디자인이 2019년에 출범시킨 홈 오디오 전문 서브 브랜드이고, RNDAC은 말 그대로 루버트 니브가 만든 DAC이다. 3가지 헤드폰 출력에 아날로그 라인 입력까지 되는 이 RNDAC 역시 밸런스 출력단에 트랜스포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소리? 깔끔만 심하게 떠는 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풍성하고 단단한데다 온기까지 가득해서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오고만 그런 음이었다.

루퍼트 니브와 피델리체

루퍼트 니브(1926~2021)는 프로 스튜디오 콘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레전드 엔지니어다. 위에서 언급한 애비로드 스튜디오는 물론, 비틀스의 프로듀서이자 런던 에어 스튜디오(Air Studios)를 세운 조지 마틴(George Martin. 1926~2016)도 루퍼트 니브가 만든 3개의 콘솔을 썼다. 플리트우드 맥, 너바나, 더 후가 사용한 레코딩 콘솔 역시 루퍼트 니브의 Neve 8028 이었다.

루퍼트 니브는 영국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아르헨티나에서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10대 후반의 나이에 곧바로 영국 군대에 입대해 통신대에서 근무하며 관련 지식과 기술을 익혔다. 전후에는 본격적으로 영국 민영방송 레디퓨전(Rediffusion)과 스피커 및 앰프 제작사 CQ 오디오(CQ Audio) 등에서 일하며 오디오 디자인 경력을 쌓았다.

1961년에는 자신의 첫 번째 회사 니브 일렉트로닉스(Neve Electronics)를 설립, 영국 런던의 유명 스튜디오인 레코디드 사운드(Recorded Sound)와 필립스 레코드(Philips Records)에 콘솔 등을 납품했다. 1964년부터는 기존 진공관 대신에 당시 막 개발된 트랜지스터를 이용한 이퀄라이저와 믹서를 선보여 큰 주목을 받았다.

1965년부터 1975년까지는 루퍼트 니브의 리즈 시절이었다. 직원 수도 수백 명으로 늘어났고, 그가 만든 이퀄라이저와 컴프레서, 프리앰프, 페이더, 마이크로폰, 믹싱 콘솔은 그대로 업계 표준이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Neve 8028 레코딩 콘솔도 이 기간(1974년)에 나왔다. 1975년에는 ‘10년 동안 경쟁 제품을 만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루퍼트 니브 일렉트로닉스를 매각, 그의 아내와 함께 ARN 컨설턴트를 설립했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나 자신이 직접 제품을 만들 수 있는 1985년이 되자, 루퍼트 니브는 포커스라이트(Focusrite)라는 제작사를 설립, 랙 마운트 이퀄라이저와 다이내믹 프로세서 등을 내놓았다. 하지만 포러스라이트는 자금난 등의 이유로 1989년에 파산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루퍼트 니브는 ARN 컨설턴트 대표 자격으로 영국 AMEK을 통해 9098 같은 여러 콘솔을 내놓았다.

1994년에는 그의 아내와 미국 텍사스 윔벌리(Wimberley)로 이주했고, 2005년 그곳에서 지금의 루퍼트 니브 디자인(Rupert Neve Design)을 설립했다. 루퍼트 니브 디자인(RND)에서는 포티코(Portico) 시리즈와 5088 믹서 등이 나왔고, 알란 파슨스, 데드마우스, 잭 화이트, 미국 샌프란시스코 음악원 등이 주요 고객이 되었다.

2009~2013년에는 현역기로 왕성히 활동 중인 갖가지 스튜디오 명품들이 쏟아졌다. 올 초 필자가 갖고 논 5060 센터피스를 비롯해 포티코 II(Portico II) 프로세서, 셸포드(Shelford) 시리즈, 5051 이퀄라이저+컴프레서, 5051 마이크 프리앰프 등이 그것이다.

2019년에는 홈 오디오 전용 서브 브랜드인 피델리체(Fidelice)를 출범시켰다. 현재 3개 모델이 있는데 이번 시청기이자 DAC/헤드폰 앰프/프리 앰프인 RNDAC과 헤드폰 앰프인 RNHP, 포노앰프인 7566이다. 루퍼트 니브는 올해 2월 12일 94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지난 1997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기술 부문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피델리체 RNDAC 본격 탐구

하이파이클럽 시청실에서 처음 본 RNDAC은 겉보기에도 건드릴 게 많은 팔방미인이었다. 사다리꼴 모양의 알루미늄 섀시부터가 인상적인데 여기에 맨 오른쪽에 있는 붉은 볼륨 노브는 보는 맛, 왼쪽의 토글 스위치는 건드리는 맛이 좋았다. 후면을 보니 역시 연결하고 세팅할 게 많다. 과연 루퍼트 니브 디자인의 DNA가 가득했다.

전면부터 본다. 왼쪽부터 라인 아웃 온/오프 토글 스위치, 헤드폰용 게인 하이/로우 토글 스위치, 3개 헤드폰 출력 단자(TRS 언밸런스, XLR 밸런스, 펜타콘 밸런스), 소스 선택 버튼(RCA, XLR, 동축, 광, USB), 샘플레이트 LED(PCM 44.1~384kHz, DSD 64, 128, 256, 512), 볼륨 노브가 마련됐다.

후면은 왼쪽부터 XLR 출력 단자 1조, RCA 출력 1조, 고정 출력/가변 출력 선택 토글 스위치, RCA 입력단자 1조, +4dB/-10dB 선택 토글 스위치(XLR 입력용), XLR/TRS 입력단자 1조, 동축/광/USB 디지털 입력단자, 필터 옵션 딥 스위치, 전원 인렛단 순으로 마련됐다.

이러한 인터페이스를 통해 알 수 있듯이 RNDAC은 DAC 겸 헤드폰 앰프 겸 아날로그 프리앰프다. DAC은 AKM의 AK4497 DAC 칩을 써서 PCM은 USB 입력 시 최대 32비트/384kHz까지, DSD는 역시 USB 입력 시 최대 DSD512까지 컨버팅할 수 있다. 디지털 입력단은 USB, 광(192kHz), 동축(192kHz)을 마련했다.

후면의 5개 딥 스위치 조합으로 다양한 디지털 필터를 세팅할 수 있는 점도 흥미롭다. 기본적으로 스위치가 위에 있으면 오프(inactive), 아래에 있으면 온(active)이다. 디폴트는 오프다.

• 스위치 1 : Slow / Super 롤오프 (PCM)
• 스위치 2 : Standard / Short 그룹 딜레이 (PCM)
• 스위치 3 : Slow / Sharp 롤오프 (PCM)
• 스위치 4 : Non / AKM 하이퀄리티 사운드 모드 (PCM, DSD)
• 스위치 5 : DSD Low / High 필터 폴 (DSD)

헤드폰 앰프는 인터페이스도 그렇고 출력도 그렇고 막강하다. 전면을 보면 TRS 언밸런스, XLR 밸런스, 펜타콘(Pentaconn) 밸런스, 이렇게 3개의 헤드폰 출력을 지원한다. 출력은 헤드폰 임피던스 16옴, 언밸런스 출력 기준 1000mW에 달한다. 출력 임피던스는 0.01옴. 게인도 하이/로우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프리앰프는 밸런스(XLR), 언밸런스(RCA) 입출력을 모두 지원한다. XLR 입력의 경우 토글 스위치를 이용해 입력 레벨을 +4dBu와 -10dBV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밸런스 출력을 지원하는 앞단의 출력 레벨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RCA 입력은 -10dBV를 기준으로 설계됐지만 최대 +19.2dBV에 달하는 신호도 받아들일 수 있다.

XLR 출력은 디폴트 +4dBu로 설계됐으며 볼륨 조절에 따라 최대 출력 레벨은 +23.5dBu까지 올라간다. RCA 출력은 디폴트 -10dBu로 설계됐으며 역시 볼륨 조절에 따라 최대 출력 레벨은 +19.2dBV까지 올라간다. 출력 임피던스는 XLR이 40옴, RCA가 30옴. 볼륨은 알프스(Alps)의 RK50 포트를 썼다.

설계 디자인 면에서는 커스텀 OP 앰프를 통한 모든 증폭과정이 고전압 레일(high voltage rail) 위에서 퓨어 클래스 A로 이뤄지는 점이 눈길을 끈다. 맞다. 이 2가지는 전형적인 진공관 앰프 증폭 방식인 것이다. 여기에 밸런스 출력단에 트랜스포머까지 커플링했으니 루퍼트 니브의 손길을 거친 제품은, 심지어 RNDAC 같은 디지털 DAC마저도 태생은 ‘빈티지’다.

이 트랜스포머의 존재야말로 루퍼트 니브 엔지니어링의 핵심이다. 하지만 트랜스포머는 대역폭이 좁고 착색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비판이 적지 않다. 트랜스포머 제작자들이 저마다 ‘광대역’을 외치는 것은 그만큼 트랜스포머가 태생적으로 밴드위쓰(bandwidth)가 좁다는 반증이다. 앰프 제작사들이 1980년대 이후 너도나도 ‘트랜스포머리스’(transformerless) 앰프를 내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루퍼트 니브는 처음부터 트랜스포머를 중히 여겼다. 트랜스포머는 잘 아시는 대로 1차 권선으로 들어온 높은 임피던스를 2차 권선을 통해 낮은 임피던스로 바꿔주는 ‘임피던스 매칭’이 메인. 하지만 루퍼트 니브는 1, 2차 권선 사이의 갈바닉 절연(galvanic isolation)을 통해 그라운드 루프와 전자파노이즈가 차단되는 점에 주목했다. 왜냐하면 이들 노이즈가 음악 신호를 갉아먹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시청

하이파이클럽 시청실에서 진행한 피델리체 RNDAC 시청에는 룬 코어 및 브릿지로 Nucleus+, 프리/파워 앰프로 파라사운드의 JC2 BP와 JC5, 스피커로 다인오디오의 스탠드마운트 Heritage Special을 동원했다. 누클리어스 플러스와 RNDAC은 USB 케이블로 연결했고, RNDAC과 프리앰프는 밸런스 인터케이블로 연결했다.

RNDAC 세팅은 고정 출력(프리앰프로 볼륨 조절), 디지털 필터는 디폴트로 설정했다. 한마디로 일체 디지털 필터링 없이 밸런스 출력의 단품 DAC으로만 테스트를 한 셈. 음원은 주로 룬으로 코부즈와 타이달 스트리밍 음원을 들었다.

Duke Ellington & His Orchestra
Afro-bossa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RNDAC 사운드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대략 30분이 걸렸다. 첫인상은 지금까지 들어본 DAC과는 소릿결이 많이 다르다는 것.

무대가 투명한 점이 두드러지만 귀에 와닿는 촉감은 입자가 아주 곱다거나 무대 배경이 완전 까맣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SPL 파워앰프를 처음 들었을 때 그런 느낌이랄까. 하지만 서서히 드럼 각 파트가 하나하나 낱낱이 해체되는 모습이 포착됐고, 이 RNDAC이 다이내믹스에서 장점이 있음을 깨닫게 됐다.

Bill Evans Trio - Autumn Leaves
Portrait In Jazz

이 곡에서 마침내 RNDAC의 장점이 쏟아졌다. 일단 악기들의 형체가 선명하고 윤곽선에 일절 색 번짐이 없었으며, 나오는 음 하나하나가 모두 단단하고 강했다. 피아노의 타건이라든가 오른쪽에서 등장한 베이스의 핑거링 모두 힘이 가득하다.

이러한 남성적 체취는 트랜스포머 커플드 출력과 내장 AKM 칩 성향이 충분히 반영된 결과로 짐작된다. 어쨌든 하늘하늘하고 야들야들한 스타일은 아니다. SN비 역시 수천만원대 DAC에 비해서는 확실히 낮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색채가 진한 음과 분해능이 돋보이는 무대, 그리고 각 악기 연주에 깃들인 파워가 도드라진다. 이 음과 무대에 익숙해지면 값싼 DAC으로는 넘어가지 못할 것 같다.

Anne-Sofie Von Otter - Baby Plays Around
For The Stars

여성 보컬 곡을 들으니 배음이 많고 음에 윤기가 넘친다. 상당히 아날로그적인 색채인데 마치 현재 전체 오디오 시스템이 진공관으로 구성된 것 같다. 이는 역시 RNDAC 출력에 트랜스포머가 관여한 덕으로 보인다.

또한 음 어디에도 여리한 구석이 없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음, 수더분하고 두터우며 윤택한 음이다. 특히 이 곡에서 들리는 브라스 악기의 촉감은 정말 대단하다. 무엇보다 양감이 충만한데 이는 요즘 지나치게 다이어트를 한 음에 지친 애호가들에게는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Leonard Bernstein, Wiener Philharmoniker
Mahler Symphony No.5
Mahler 5

2웨이 스탠드마운트 스피커 여건상 저역의 한계는 분명하지만 그 저역의 뻗음이 가지런하다. 1악장 총주 파트에서 수많은 음들이 빠져나오는데도 혼탁해지거나 뭉개지거나 아우성을 치지 않는 모습이 대단하다.

자신에게 들어온 디지털 음원을 아날로그 신호로 바꿔야 하는 DAC 입장에서는 교통체증 혹은 병목 현상이 일절 일어나지 않는다는 인상. 오히려 뒷단에 대전류를 흘려보내주는 대견함이 있다. 전체적으로 일정한 리듬으로 연주를 하는 DAC이며 특히 이 곡에서 들리는 금관의 소릿결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Collegium Vocale - Cum Sancto Spiritu
Bach Mass In B minor

RNDAC은 음수가 많은 곡일수록 제 실력을 발휘했다. 생상스의 오르간 교향곡에서는 마치 R2R DAC 같은 묵직하며 배음이 풍부한 음이 나왔고, ‘Cum Sancto Spiritu’에서는 풍성한 배음과 투명한 무대가 동시에 펼쳐졌다.

계속해서 포착된 것은 심지가 강건하고 생략되거나 탈색한 음이 거의 없다는 것. 여성 합창단원들의 음색이 의외로 맑은 점도 특징이었다. 안토니오 파파노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본 윌리엄스 교향곡 4번 1악장에서는 그 음의 기세와 에너지에 압도되고 말았다.

총평

리뷰를 하다 보면 오랫동안 옆에 두고 하나하나 음미하고 싶어지는 제품이 있다. 이번 피델리체의 RNDAC이 그러했다. 이번 시청에서는 USB 입력 - XLR 출력으로 이어지는 DAC 기능만 테스트하고 말았지만, 이 정도 갖고는 어림도 없다. 3개 헤드폰 잭으로 중무장한 헤드폰 앰프나 퓨어 클래스 A로 작동하는 아날로그 프리앰프 등 RNDAC은 아직 보여줄 게 많다.

하지만 피델리체 RNDAC이 여느 DAC과는 그 지향점 자체가 다르다는 것만은 이번 시청으로도 확실해졌다. AKM 4497 칩을 쓴 DAC은 많지만, 이렇게 스트레이트하고 강건하며 그러면서도 진공관처럼 푸근하고 양감이 많은 음과 무대는 좀체 접해보지 못했다. 5060 때도 느낀 것이지만 이번 RNDAC이 내 곁에 있으면 세상에 둘도 없는 나만의 마스터 음원을 즐길 수 있다. 맞다. RNDAC은 홈 오디오 애호가들을 위해 루퍼트 니브가 남긴 값진 유산이다.

by 김편 오디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