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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의 적대적인 음모에도 불구하고 ‘후궁 탈출’은 젊은 모차르트의 혈기왕성한 낭만적 열정과 매서운 리리시즘, 고도의 비극적 감수성과 대담한 희극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심심치 않게 귀를 간질거리는 터키식 영향이 눈에 띄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그의 짧은 생애 동안 가장 자주 연주되었던 징슈필 오페라이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걸작인 ‘마술피리’처럼 전형적인 독일어 징슈필(대화가 포함되어 있는 음악적 코미디)로서 그의 다른 오페라들이 채택하고 있는 레치타티보가 포함된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와는 구분된다. 현재에는 징슈필의 대화부분은 음악을 방해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상당 부분 삭제되어 공연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대사 전체를 복원하여 보다 깊이 있는 표현력과 무게감, 그리고 음악으로 넘어가기까지의 대사의 중요성 등등을 살려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2010년 7월 바르셀로나의 리체우 극장에서의 실황을 담아낸 이 모차르트의 ‘후궁 탈출’ 영상물은 크리스토프 로이의 계시적인 프로덕션을 담고 있다. 그는 이 작품이 갖고 있는 심오한 극장적인 의미에 최고의 경의를 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은연중에 이 작품 제목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다. 연출자는 이 작품의 또 다른 부제로 ‘후궁으로의 유괴’를 사용했는데, ‘구출’이나 ‘탈출’이 아니라 왜 ‘유괴’라는 단어(누구가, 아니면 누구를?)를 사용했을까? 이러한 단어의 사용은 두 여자 주인공과 그녀들의 대범한 연인들, 유괴자 사이의 양면적인 관계에서 벌어지는 드라마적인 섬세함과 감정적인 깊이의 예상치 못한 층위를 효율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로이의 무대는 이 오페라를 전적으로 실내극으로 바꾸어 화려한 무대를 완전히 제거하고 오직 카펫과 식탁 정도만을 등장시켜 청중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등장인물들의 대화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의상 또한 터키풍을 완전히 배재하고 마치 말쑥한 현대 스페인 사람들의 복장을 연상케 한다. 그 결과 낭만적인 클리셰 혹은 인종들의 스테레오 타입으로서의 전형적인 판토마임 코미디를 벗어나 작곡가의 만년의 두 개의 걸작인 ‘마술피리’와 ‘티토왕의 자비’와 비견할 만한 심오하면서도 보편적이며 보다 치밀한 극적 전개를 갖고 있는 작품임을 강조한다.

 

이 프로덕션과 동일한 지휘자인 이보르 볼튼이 지휘한 2006년 비엔나 실황에서의 화려하지만 논쟁적인 연출보다 한결 간결한 이 로이의 무대가 모차르트의 의도와 드라마적인 요소를 구체적으로 살려낸 훌륭한 무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태수를 찬양하는 해피앤딩의 상쾌한 결말 가운데, 뒤로 돌아 절망적인 듯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오스만과 노래 역이 없어서 멍하니 무표정한 모습으로 자신의 허망함을 표현하는 파샤 젤림의 표정이 묘한 여운을 남기는 연출 또한 특징적이다. 3막에서 모든 출연진이 흰색 와이셔츠를 입어 조명과 은은한 조화를 이루는 색조의 연출 또한 훌륭하고, 정교한 음향을 담아낸 멀티채널과 한글자막이라는 지나칠 수 없는 구매조건 또한 이 DVD를 구매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다.
 

전혀 새로운 성격의 캐릭터들

 

파샤 젤림이라는 캐릭터를 놀라운 방식으로 그려낸 연극배우 크리스토프 퀘스트는 엄격하지만 근본적으로 교양 있는 군인으로서의 모습, 젊고 아름다운 여인 덕분에 늦은 나이에 찾아온 예상치 못한 춘정의 욕구 사이의 밸런스를 완벽하게 연기해낸다. 어떻게 보면 터키 술탄의 옷을 입지 않아서 그런지 너무 교양이 넘치는 모습으로 비추어지고, 여기에 말끔한 민머리 헤어 스타일 또한 이러한 이미지를 배가시킨다. 조금 오버해서 비유하지만, 영화 ‘왕과 나’의 율 부린너가 환생한 듯한 느낌까지도 든다.

 

베이스의 어두운 목소리가 인상적인 오스만 역의 프란츠-요제프 젤리그 또한 캐릭터의 새로운 성격을 발견해내는데 성공했다. 코믹하고 피에 굶주렸으며 그로테스크한 일반적인 성격보다는 눈치 없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나름 인간적이고 부드러운 성격의 오스만이 탄생한 것이다. 3막 19번 장면에서 부르는 오스민의 명 아리아 “하하, 나는 승리했다”는 어딘지 박력과 힘이 부족한 듯 느껴지지만, 이 연출에서 변화된 오스민의 성격을 고려해 본다면 그저 블론테의 옷을 벗기며 허벅지 위에 올려놓는(이 때 블론테는 오스민의 손을 슬쩍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는다!) 순진한 호색한으로서의 엉큼함을 잘 보여준다.

 

이 오페라의 디바로 출연한 디아나 담라우의 가창과 연기는 너무도 완벽해서 더 이상의 첨가를 허락지 않을 정도다. 특히 1막 6번 장면의 콘스탄체의 아리아 “내가 이전에 이렇게 사랑을 했을 때는”에서 배어나오는 그 과거에 대한 행복함과 현재에 대한 절망적인 느낌의 대비는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며 콜로라투라의 극한을 보여주고, 3막 20번 장면에서 벨몬테와의 2중창은 가히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뿜어내는 듯한 사랑에 대한 결연한 의지까지 배어나오며 극의 클라이맥스를 고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태수와의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는 2막 11번 장면을 예로 들면, 대사 부분에서 담라우의 극적 몰입도가 너무 극대화되었는지 젊고 고운 처녀의 의연한 대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 소리를 지르는 태수를 맏받아치며 화를 내는 연기는 너무 극적이어서, 이 커플은 마치 오래 된 권태기의 부부가 싸우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블론테 역의 올가 페레티야코 또한 담라우와 더불어 지금까지는 경험하기 힘들었던 새로운 여인상을 만들어낸다. 조금은 히스테리컬한 담라우와 페어를 이루기 위해 페레티야코의 블론데는 성마른 듯 농탕질을 즐기는 페미니스트의 프로토 타입을 보는 듯하다. 특히 2막 처음 8번과 9번 장면에서 블론테와 오스민의 앙상블은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가슴을 더듬으며 억지사랑을 고백하는 오스민과 이를 슬며시 즐기면서도 영국 여성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며 타이르는 듯한 어조를 견지하는 블론테는, 짝사랑에 빠진 복잡한 마음의 남자와 좋은 듯 거부하며 교묘하게 피해가는 젊은 여성 사이에 벌어지는 언밸런스한 사랑의 감정을 잘 살려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페드릴로와 재회하는 12번 장면의 블론테 아리다 “말할 수 없는 이 기쁨”은 지금까지 영상물로 접할 수 있었던 최고의 감정표현(오스민과의 농탕질을 멈추어야 한다는 아쉬움?)을 아름다운 가창으로 보여준다.

 

오페라 애호가들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이보르 볼튼은 어느 새 모차르트의 ‘후궁 탈출’에 있어서 전문가로 자리잡았다. 텔덱 레이블 시절부터 바로크 오페라와 모차르트 음악에 강한 애정을 쏟아왔던 만큼 그는 이미 유럽에서 모차르트 오페라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었고, 그 결과 이 리체우 실황에서 거장으로서의 완벽한 솜씨를 맛볼 수 있다. 2막 피날레 4중창에서의 스펙타클한 스케일이나 14번 장면 페드릴로와 오스민의 2중창 “바쿠스 만세”에서의 경쾌하면서도 리드미컬한 오케스트라 음향 등등이 인상적인데,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투명하면서도 섬세한 볼튼 특유의 음향조탁 또한 모차르트의 색채감과 분위기를 살려내는데 일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