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슈트라우스: 가곡과 알프스 교향곡
연주: 르네 플레밍(소프라노)/ 빈 필하모닉/ 크리스티안 틸레만(지휘)
현재 빈 필하모닉을 지휘하고 있는 많은 지휘자들 가운데 진정한 빈 필의 간판스타는 누구일까? 논리대로라면 빈 슈타츠오퍼의 상임인 뵐저-뫼스트에게 가장 높은 어드벤티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크리스티안 틸레만에게 그 주도권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티켓팅과 관객 및 평론가들의 반응, 음반 및 영상물의 판매량 모두를 고려했을 때 그 누구보다도 틸레만에게 더 큰 부등호가 벌어져 있기 때문이다.
틸레만이 2011년 11월 빈 슈타츠오퍼에서 진행한 바그너의 링 사이클이 영상물로 발매하려고 했는데, 이를 뵐저-뫼스트가 자신도 2012년에 링 전곡을 연주하여 영상물을 만들 것이라며 빈 츄타츠오퍼 영상물의 DVD 제작을 반대한 일이 있었다. 이는 틸레만의 상업적, 흥행적 효과가 얼마나 큰가를 반증하는 일인 동시에 뵐저-뫼스트가 얼마나 틸레만을 견제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말할 수 있다. 빈 슈타츠오퍼와 틸레만의 바그너 링은 당분간 영상물로 만날 수 없겠지만, 다행스럽게도 틸레만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바이로이트에서 2010년에 촬영한 링 실황은 현재 ‘발퀴레’가 발매되었고 앞으로 차례대로 발매될 예정이다. 그리고 몇 해 전 녹음한 링 전곡은 DVD와 같은 OPUS ARTE 레이블을 통해 CD로 발매되기도 했다.
현재 독일권 오페라 하우스의 헤게모니를 장악해 나가고 있는 크리스티안 틸레만. 그는 바렌보임 뒤를 이어 바이로이트의 실세로 자리잡고 있는 한편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의 실권자로서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빈 필하모닉에서도 실권자보다도 더 큰 사랑과 환호를 받고 있다. 탁월한 바그네리안인 동시에 그는 칼 뵘의 뒤를 이을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슈트라우시안(Straussian)으로 존경받아 마땅하다. 특히 오페라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분야에서도 그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쏟는 열정과 완벽성은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다. 오히려 이전 시대의 슈트라우시안들이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앙상블과 음색, 메시지를 만들어내며 현대 하이-테크놀로지 시대의 모든 미디어에 부합하는 연주를 들려준다.
여기 소개하는 크리스티안 틸레만과 빈 필하모닉과의 2011년 8월 실황은 바로 현재 틸레만의 음악적 역량과 사회적 지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회심의 영상물이다. 물론 속속 발매되고 있는 드레스덴에서의 영상물들도 더없이 훌륭하고 아름답지만, 유독 이 빈 필하모닉과의 영상물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빈 필하모닉의 ‘알프스 교향곡’ 때문으로서, 슈트라우스 스페셜리스트라고 일컬어지는 지휘자들, 즉 작곡가 자신과 칼 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루돌프 켐페 모두 슈트라우스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했던 이 악단과 ‘알프스 교향곡’을 녹음한 적이 없었다. 이러한 안타까움을 상쇄하려는 듯 우리 시대 최고의 슈트라우시안으로 추앙받는 틸레만과 빈 필하모닉은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스펙타클하며 웅장한 ‘알프스 교향곡’을 들려준다.
틸레만은 이미 2000년에 빈 필하모닉과 이 작품의 실황연주(DG)를 CD로 한 차례 발매한 적이 있다. 당시 이 녹음도 대단한 호평과 찬사를 받았지만, 11년이 지난 뒤 다시 연주, 녹음한 이 영상물이야말로 훨씬 정교해진 디테일과 완벽해진 앙상블, 보다 유려해진 흐름과 자연스러운 클라이맥스를 선보이며 최고의 레코딩 테크놀로지로 담아낸 최상의 오케스트라 음향이 펼쳐진다.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의 서주 이후 가장 아름다운 피아니시모로부터 가장 폭발적인 포르티시모까지가 펼쳐지는 일출장면에서, 카라얀-베를린 필의 탐미적인 연주보다 훨씬 더 건강하고 근육질적이며 화려하여 알프스 정상까지의 역경과 그 벅차오르는 가슴을 틸레만은 보다 적나라하게 표현해낸다. 이후 등산을 하며 숲속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화자의 떨리는 심리, 시내와 폭포, 포원, 목장 등의 정경에서 느껴지는 베토벤 ‘전원’에 비견할 만한 회화적이고도 목가적인 분위기는 빈 필하모닉의 음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절묘함이라 말할 수 있다.
틸레만의 역량은 길을 잃으며 위험함을 이겨내는 과정부터 다시 한 번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복잡한 화성과 고도의 테크닉을 수반한 이 작품으로부터 대규모 악기들의 섬세하면서도 정교한 소리를 정묘하게 포착하는 동시에, 폭풍과 천둥이 치는 장면에서는 바그너 이상의 폭력적인 다이내믹으로 자연의 위대함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이토록 아름답고 역동적인 장면을 과연 지금까지의 영상기술로 포착해낸 적이 있었을까? 조금은 불균일한 면이 보인 탓에 자연스러운 등산의 여정을 완벽하게 그려내는 데에는 미치지 못한 그의 2000년 녹음에서도 이만큼 감동적인 순간은 등장하지 않았다.
모든 종류의 목관과 금관이 총출동한 빈 필의 눈부신 대규모 금관군과 넉 대의 하프가 빈 필의 세련되고 강렬한 현악의 물결 위로 오롯이 떠오르며 일종의 음향적 엑스타시를 만들어내는 모습에 감동하지 못할 사람은 아마도 전세계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12대의 비엔나 호른이 울려퍼지는 순간은 까닭모를 뭉클함에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다. 단순히 이러한 효과만을 보고 이 영상물에 극찬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틸레만과 빈 필이 보여주는 작곡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올바른 해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음악어법과 관현악어법에 있어서 슈트라우스 특유의 후기낭만주의적 스타일의 절정을 바로 이 영상물을 통해 제대로 만끽할 수 있기에 더욱 이 영상물에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영상미는 이 프로그램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이 입고 나온 검은색 드레스의 우아한 자태를 더욱 아름답게 장식해 준다. ‘해방’ Op.39 No.4, ‘겨울의 사랑’ Op.48 No.5, ‘황혼으로부터의 꿈’ Op.29 No.1 등의 슈트라우스 가곡을 부르는 그녀는, 우리 시대 최고의 슈트라우스 가수다운 품격과 서정, 상상력 풍부한 시어의 의미전달과 딕션의 아름다움 모두를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또한 오페라 ‘아라벨라’ 가운데 1막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리아 ‘나의 엘레머라니!’는 슈트라우스 오페라 최고의 히로인인 그녀의 능력을 완벽하게 펼쳐낸 명대목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관현악 작품의 정수를 담고 있는 이 소중한 영상물은 지금까지 발매된 모든 오케스트라 영상물 가운데에서 음질과 영상, 음악성 모든 측면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AV용 레퍼런스 음반으로 사용하기에 손색이 없다. 더군다나 청중의 박수 장면에서 카메라 앵글에 비추어진 무대 가장 앞자리에 한국의 저명한 음악평론가인 유정유 선생이 보타이를 메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까지 포착되어 있어 이 영상물의 소장가치를 높여준다. 아직 플레밍은 틸레만과 R.슈트라우스 오페라 전곡을 녹음하지 않았는데, 이를 계기로 이 두 음악가가 명콤비를 이룬 환상적인 오페라 무대를 하루 빨리 감상할 수 있도록 음반 레이블 관계자들의 노력과 열정이 요구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