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이었으니, 정말로 옛날 이야기다. 당시 시골에 사시던 할아버님께서 상경해서, 선물을 하나 주려고 하셨다. 그때엔 집집마다 커다란 궤종시계를 장식용으로 쓰는 게 일반적이어서, 하나 사려고 시계점에 갔다. 상담이 잘 이뤄져 드디어 뻐꾸기가 시간대마다 나오는 멋진 제품을 골랐다. 문득 옆에 놓여있던 작은 탁상시계에 눈이 간 할아버님께서 가격을 묻고는 깜짝 놀랐다. 그 작은 녀석이 궤종시계보다 더 비쌌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많은 제품을 접하면서 이런 결론을 얻게 되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사실 어떤 제품이든 여러 기능을 넣으려면 부피와 무게가 커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작은 섀시 안에 주요 기능을 망라하면서 일정한 퀄리티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충 생략해서 만드는 것은 쉽지만, 일체 타협없이 만든다는 것은 참 어렵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만난 나그라의 제품은, 정말 스위스의 정밀 공학의 바탕이 없이는 이뤄질 수 없어서 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몇 안되는 제품인 것이다.

참고로 역사상 가장 비싼 가격에 거래된 손목시계는 얼마쯤일까? 놀라지 마시라. 무려 2천5백만불이나 한다. 작은 시계 하나에 그 정도다. 쇼파드에서 만든 것으로, 주변에 엄청난 보석이 가득해서 한편으로는 그럴 만도 하지만, 참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이런 괴물 말고 일반적으로 명품이라 추천되는 제품들을 보면 1, 2억은 기본이다. 8, 9억짜리도 있다. 왜 그럴까?

이런 시계의 기본은 오토매틱이고, 따라서 얼마나 정교하게 무브먼트를 설계하냐가 관건이다. 최근에는 그 기술이 엄청나게 발달해서 거의 나노 단위에 도전하기도 하고, 48시간의 용량을 담아낼 수 있는 제품도 나왔다. 그럴 때마다 가격은 상상을 초월하도록 올라간다.

이번에 만난 나그라의 제품은, 그런 면에서 엄청난 내용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프리앰프인 멜로디를 보자. 정말로 다기능이다. 대충 볼륨단과 셀렉터단만 있는 게 아니라, 뮤트, 스테레오/모노, 딤 라이트 조절, 밸런스 등 사용상 요긴한 항목이 가득하다. 그러면서 하이엔드 퀄리티를 갖고 있다. 브뤼게나 파텍 필립을 떠올리게 한다. 그야말로 기적이라 하겠다.

또 파워 앰프인 MSA로 말하면, 스펙상으로는 8오옴에 60W를 낸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 구동력은 이런 수치를 훨씬 상회한다. 어지간한 가정용 스피커는 모두 커버하며 만일 덩치가 큰 녀석이라면 브릿지 모드로 전환해서 두 개를 쓰면 된다. 그러니까 처음엔 하나를 사서 쓰다가, 나중에 스피커가 커지면 파워 하나를 추가해서 쓰면 되는 것이다. 매우 합리적이지 않은가?

 

내가 처음 나그라를 만난 것은 당연히 영화 촬영 현장에서다. 한동안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으므로, 내가 쓴 각본이 어떻게 영상으로 표현되냐 판단하기 위해선 현장 방문이 필수다. 당시엔 아날로그 시대였으므로, 무거운 카메라와 함께 음향 팀이 따라다녔는데, 그때 나그라는 항상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모양만 보면 억 소리가 나올 정도로 멋졌지만, 이 작은 기기로 배우의 음성을 담는다는 것이 좀 무모해보였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헐리웃이나 유럽에서도 현장용으로 나그라를 많이 썼다. 고성능인데다 컴팩트해서 여러 장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디오 애호가들도 테잎을 감상하기 위해 나그라를 쓰기도 한다. 최근에 방문한 모 애호가는 디자인 자체에 빠져서 무려 두 대나 운용하고 있었다. 그만큼 나그라의 성능과 디자인, 컴팩트한 사이즈는 매력적이다. 참, 작은 게 아름다운 것이다.

바로 그런 나그라의 진수가 이번에 리뷰할 제품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사실 처음 나그라가 하이엔드 씬에 나올 때엔 진공관 앰프를 들고 나와 충격을 줬다. 물론 모양이며 소리는 좋았지만, 나그라의 원래 이미지와 진공관은 약간 매칭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번에 진공관이 아닌 TR, 그것도 MOS-FET 소자를 이용한 제품을 내놓은 것이다. 그 모토는 이렇다. 원래의 나그라로 돌아가자! 맞는 말이다.

 

한데 이 대목에서 일부 애호가들은 음질만을 따지면 TR보다 진공관이 좋지 않겠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또 진공관 앰프를 만들던 회사가 TR을 만들어서 재미를 본 사례가 거의 없으므로, 본 세트 역시 그런 악습의 반복이 아니겠냐 단정을 지을 법도 하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내 생각은 다르다.

우선 진공관과 TR은 소재만으로 뭐가 낫다고 말하기 힘들다. 오히려 해당 소재를 어떻게 요리하냐에 관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클래스 A가 클래스 AB 방식보다 낫다는 부분도 만들기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한편 나그라는 원래 TR을 사용한 레코더로 유명한 바, 바로 그 기술이 이번 세트에 들어가서 두 번째 의문에 대한 답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궁금하다면, 나그라의 테잎 레코더가 가진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검색해보면 좋을 것 같다.

 

사실 나는 처음 나온 진공관 앰프세트부터 여러 모델을 들어본 적이 있고, 그때마다 약간 아쉬운 느낌이 있었다. 아마도 청취 환경이나 매칭 스피커와의 관계 등 여러 요인 때문이라 생각하는데, 이번에 자세히 들어보고는 그 답을 알았다.

한 마디로 나그라는 힘으로 쾅쾅 밀어붙이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런 음을 원하는 분들과는 번지수가 다르다. 단, 정교치밀하면서 질감을 중시하는 분들이라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퀄리티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잠깐 들어보곤 이렇다 저렇다 말하면 안된다. 최소한 외관이 주는 매력보다 훨씬 좋은 음질을 갖고 있으니까.

이번에 만난 세트는 그간 나그라가 발표한 모델들보다 저렴하다. 진공관을 쓰지도 않았고, 사이즈도 더 작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절대로 상급기에 뒤지지 않는 퀄리티를 갖고 있다. 특히 좁은 공간에서 최상의 음질을 구현하려는 분들에겐 상당히 매력적인 옵션이 아닐까 싶다.

 

우선 프리앰프인 멜로디를 보자. 서킷은 진공관을 채택한 상급기 재즈와 비슷하며, 여기에 IV-S나 4.2와 같은 전설적인 나그라 레코더의 노하우를 가득 담았다. 또 원가 절감을 위해 파워 서플라이를 섀시 안에 담았으며, 별도의 포노 옵션을 선택할 수 있는 점도 매력적이다. MM과 MC 모두 가능하다. 한편 향후 업그레이드를 위해 외부 파워 서플라이를 달 수 있는 단자도 장착한 바, 이 부분은 필수 항목은 아니다. 현 상태로도 충분히 만족스런 음질이 보장되니까.

내부를 보면 정확히 네 개의 파트로 구성된 점이 참 일목요연하다. 주요 성능을 커버하는 마더보드에 프런트 패널에 집중된 조작부, 입/출력 단자부 그리고 포노 옵션부다. 각각의 기판은 금도금 처리된 에폭시 글래스로, 4중 레이어 방식으로 꼼꼼하게 배치되었다. 참고로 이렇게 기판에 많은 물량 투입을 한 것은, 그만큼 내구성과 음질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또 각각의 파트는 리본으로 된 케이블로 연결되어 짧은 신호 경로를 추구하고 있다.

 

한편 이와 커플링되는 파워 앰프 MSA를 보자. 사실 본 기는 일전에 발표한 피라미드 스타일의 PMA/PSA의 기술력을 그대로 이양한 제품으로, 보다 합리적인 가격과 내용을 갖고 있다.

우선 외관에서 보면 알 수 있듯, 흔히 옆구리쪽에 배치하는 히트 싱크를 과감히 위로 올렸다. 디자인의 관점에서 과연 그게 가능할까 싶은데, 이를 이뤄냈다. 사실 열이라는 것은 위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 이렇게 위에다 방열핀을 설치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내부를 보면 스위스의 정밀 시계 공학을 방불케 하는 컴팩트함과 짜임새 등에 가벼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참, 작은 공간에 알차게 담았다. 무엇보다 좌우 대칭으로 출력석과 콘덴서와 각종 기판을 담아낸 점이 보기 좋고, 게다가 과감히 파워 서플라이를 공급한 점도 눈에 띤다.

 

그런데 이 파워 서플라이는 단순히 전원을 공급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PFC(Power Factor Correction)이란 기술을 더해서, 안정적인 전기 환경을 만들고 있다. 기본적으로 앰프라는 것이 전기를 먹고 사는 존재임을 생각하면, 이런 양질의 전원 공급이 어떤 결과를 얻어내는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본 세트의 시청을 위해 소스는 메리디언의 술루스를 동원했고, 스피커는 베리티 오디오의 레오노레를 사용했다. 참고로 나그라와 베리티 두 회사는 각종 오디오 쇼에 함께 나온다. 서로 상성이 좋은 탓이다. 그 매력이 본 시청에서도 듬뿍 발휘되었음은 물론이다. 시청 트랙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비제 《카르멘 판타지》 안네 조피 무터(바이올린)
-드보르작 《첼로 협주곡》 야노스 슈타케르 (첼로) 안탈 도라티 (지휘)
-김윤아 《봄날은 간다》
-Led Zepplin 《Since I've Been Loving You》

우선 비제의 작품부터. 익히 들어온 트랙이라, 통상 듣던 이미지와 좀 다르다. 강력한 힘으로 밀어붙이는 카리스마 대신 섬세한 질감과 디테일한 표현력이 돋보인다.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듯하다. 일체의 과장이 없고, 거친 대목이 없으며, 음악 그 자체의 매력을 한껏 부각시키는 스타일이다. 처음에 확 와 닿는 느낌은 없지만, 듣고 있으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치밀한 재생음이다.

이어서 드보르작을 들어봐도 비슷한 느낌이다. 원래 이 트랙은 와이드 레인지한 녹음 방식으로 역사에 남는 바, 거의 스펙타클 영화를 보는 듯한 압박감을 준다. 그러나 여기에선 차분하고 단정하며, 넉넉한 안길이와 넓은 무대 연출로 각종 악기의 음색과 움직임이 일목요연하게 구분된다. 또 음색 자체도 매혹적이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이런 감촉이 좋은 음은 그것대로 강점이라 하겠다.

이런 느낌은 김윤아의 노래에서 잘 부각된다. 명징한 어쿠스틱 기타의 반주에 맞춰 한껏 투명한 보컬이 은은히 공간을 점하는데, 다소 환각적인 느낌도 전해준다. 특히, 공간에 퍼지는 잔향이 좋아, 뒷맛이 대단하다. 가사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하고, 점차 고조되는 클라이맥스에 확 빠져든다. 이 곡이 가진 처연함과 상실감이 가슴 깊이 각인되는 재생이다.

마지막으로 록을 들었는데, 역시 활력과 에너지보다는 정교치밀한 재현으로 해석한다. 물론 기본적인 드럼의 타격감이나 보컬의 격렬함이 나오지만, 기본적으로 온화하다. 심하게 말하면 클래식에 가까운 질서정연하고, 품위가 윘는 재생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런 음은 이런 대로 흥미롭다. 피가 통하는 듯한 에너지는 약하지만, 그 대신 고품위하면서 바닥을 들여다보는 듯한 투명함으로 낱낱이 음성 정보를 분해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하긴 이런 세트에서 초강력 드라이브의 록을 듣는 이가 얼마나 될까? 이 작은 몸체에 하이엔드의 퀄리티를 담아낸 기술력에 새삼 감탄할 따름이다.

 

이종학(Johnny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