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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학(Johnny lee)

 

그간 수많은 비교 시청을 하고, 많은 기기를 들어봤지만, 이런 라인업은 처음이어서 오랜만에 흥분이 된다. 좀 심하게 말하면 “스위스 사운드 특집”이라고 할까? 그간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골드문트를 비롯, 나그라, FM 어쿠스틱이 한 자리에 모였다. 욕심 같아선 몇 개 브랜드를 더 얹고 싶지만, 어쨌든 이 정도 모인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지경이다.

현재 오디오계, 특히 하이엔드만을 놓고 본다면, 아무래도 미국과 독일이 양분하다시피,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 파고들면 2000년대 전까지는 앵글로 색슨, 그러니까 영미권 오디오가 강세였다고 하면, 이후 독일세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형국이다. 독일세의 구성원 중엔 덴마크, 네널란드,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이 속해 있음은 물론이다.

이중에서 작고 강한 나라로 스위스와 덴마크가 떠오르는데, 그 각각이 앰프 및 스피커로 전공 분야가 달라 이 또한 재미있다. 아무래도 거대한 독일을 비롯, 프랑스, 이태리 등에 둘러싸인 환경을 생각하면 이렇게 특정 분야에 집중하는 것도 괜찮은 전략인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이 두 나라가 궁금했다. 다행히 업체 탐방을 통해 스위스와 덴마크는 좀 파악이 되었으며, 둘 다 기본적으로 같은 정책을 쓰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른바 엄청난 “R&D”다. 이렇게 쓰면 요즘 연구 개발을 게을리 하는 회사가 전세계에 어디 있겠냐 반문하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엄청난 물가와 인건비, 재료비를 감당하면서 세계 최고급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선 R&D에 사정없이 투자해야 한다.

그러나 R&D만 한다고 될까? 실은 하이엔드라는 개념 전체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 점에서 스위스는 상당히 유리하다. 기본적으로 부자 나라고, 수많은 사치품과 명품을 생산하며, 그에 따른 노하우의 축적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대량 생산품에 의존하는 우리네 경제 구조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스위스를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좋은 귀감이 된다고 생각한다.

 

처음에 스위스에 갔을 땐 길거리에 즐비한 포르세와 벤츠에 질려버렸다. 또 작은 도시에도 중심지에는 최고급 명품 브랜드와 시계 숍이 널려있다. 감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쇼 윈도우로 구경만 해도 입이 쩍 벌어질 지경이다. 설마 이 정도 가격표가 ... 싶지만 실제로 그렇다.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나 싶다. 큰 마음 먹고 레스토랑 한 번 가려면 각오 단단히 해야 하고, 교통비, 숙박비 등은 그야말로 살인적이다. 그러나 어떤 서비스를 받던 돈을 낸 만큼 만족도를 준다. 그게 바로 스위스다.

우리 남한 땅의 반도 되지 않은 면적에, 고작 800만 정도의 인구가 사는 소국. 그러나 그 안에 숨겨진 노하우와 기술력은 늘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이번 시청은 여러모로 스위스라는 나라의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묘미를 놓칠 수 있다.

이번에 만난 세 종류의 앰프에도 바로 그런 스위스의 특수성과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일단 작다. 가격대를 생각하면 전혀 성이 차지 않는다. 그러나 매우 꼼꼼하게 만들어서 파텍이나 롤렉스 시계를 보는 듯하다. 그리고 성능? 거기에 대해선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행히 이번에 만난 제품들은 억, 억, 억 하는 억대의 제품이 아니라, 스위스제 시세에 비교했을 때 중저가에 속한다. 하지만 각각의 제품에 해당 브랜드의 특색과 아이덴티티가 빠짐없이 담겨 있어서, 이렇게 한 자리에 놓고 비교하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스위스의 산업 구조를 보면 이른바 공장 굴뚝형 제조업은 거의 없다. 첨단 정밀 공학이나 의학, 시계, 기계류 등 머리를 쓰고, 고안을 하고, 연구를 해서 만드는 쪽이다. 앞으로 우리 산업계가 지향해야 하는 분야인 것이다. 아마 그 때쯤이면 한국산 앰프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자랑스럽게 비교시청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세가지 브랜드를 집중시청하기 위해 모두 같은곡을 시청했다. 시청 트랙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여기서 동원한 스피커는 베리티 오디오의 아마디스이고, 소스는 메리디언의 술루스 & 818 DAC 조합이다. 보다 큰 스피커를 동원하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위 세 기종의 출력이 그리 높지 않고, 무엇보다 베리티 오디오와 상성이 좋아서, 그 성능을 살피는 데엔 별로 부족함이 없었다.

 

이번에 처음 들은 것은 나그라의 멜로디 프리와 PSA 파워 세트다. 사실 이 라인 업은 일전에 시청한 적이 있거니와, 그 때엔 PSA를 두 대 동원해서 브릿지 모드로 들었다. 이런 순정 조합은 처음인 것이다. 아무튼 그때 작은 것은 아름답다라고 표현했는데, 다시 봐도 그 말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실감한다.

 

 

 

이종학(Johnny lee)

나그라의 음을 엄밀히 말하면, 약간 진공관 비슷한 느낌이다. 포근하고, 질감이 좋으며, 무척 자연스럽다. 특히 밸런스가 좋아 어떤 음악을 들어도 파탄이 없다. 단, 이렇게 말하긴 뭐하지만, 음을 너무 아름답게 표현해서, 정작 질이 나쁜 녹음도 크게 귀를 자극하지 않는다. 이렇게 쓰면 혹 오해를 할 수도 있겠지만, 절대로 탐미적이거나 컬러링이 빼어난 앰프는 아니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 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고, 내공이 상당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음악을 알고, 그 감성을 아름답게 전달하는 메이커인 것이다.

사실 나그라가 1997년에 처음 하이엔드 업계로 나왔을 때 모두 의아했다. 기본적으로 테이프 레코더 메이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제품에서 플레이백 되는 음의 하이 퀄리티와 높은 음악성은 이미 예전부터 정평이 나 있었고, 그런 기술력이 본격적으로 하이엔드쪽에 이양된 것이다.

그간 나그라는 진공관 앰프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이제 TR, 그것도 "MOS-FET"를 소자로 한 제품으로 발전해왔다. 이 소자는 다른 TR과 달리 진공관처럼 간편하게 설계할 수 있고, 음질도 그런 느낌을 준다. 바로 이번 시청에서 그런 강점이 두드러졌다.

우선 푸치니를 들으면, 무대가 크지 않고, 힘으로 압박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힘이 없다거나, 해상력이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요소 요소들이 잘 어우러졌으면서 별로 과장하기 않고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게 했다. 말하자면 한정된 재료 갖고도 오로지 손맛으로 밥을 더 먹게 만드는 요리사라고 할까?

따라서 이런 곡에서 얻을 수 있는 극적 대비는 좀 약하지만, 각 악기와 보컬의 빼어난 질감은 특필할 만하다. 또 그리 긴장하지 않고 편하게 듣는 맛도 있다. 아무래도 나이가 먹으면 이런 음이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 모양이다. 악단과 가수들이 리드미컬하게 조화를 이루는 부분은 상당한 강점이라 하겠다.

 

이어서 베토벤을 들으면, 그 특유의 카리스마가 강하게 어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쉽게 쉽게 음을 뱉어내면서, 반응이 빠른 음은 묘한 쾌감을 준다. 현으로 말하면 넋을 잃을 만큼 유려하고 또 매끈하다. 이번에 들은 세 기종 중 가장 현이 좋았다고 하겠다. 확 몰아붙이는 맛은 없는 대신, 치밀하게 모든 요소를 구축해서 어느 하나 놓치는 법이 없다. 아무래도 앰프의 성격 상 작은 방에서 들을 수밖에 없는 바, 그런 면에서 음악과 정면으로 대면해서 몰입하는 분들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

 

마지막으로 웅산을 듣는다. 그녀 특유의 허스키하면서 거친 톤이 많이 순화되어, 심지어 스위트하게 다가오는 점이 재미있다. 심벌즈나 스네어 웍 등이 화려하지 않지만, 제법 묵직하게 두드리는 킥 드럼의 어택은 아주 명확하다. 기타의 톤도 거칠지 않고, 솔로할 때의 손가락 움직임도 세밀하게 포착된다. 그러나 이런 음악 특유의 활기가 좀 아쉽기는 하다. 그런 면에서 록이나 팝보다 클래식에 더 어울리는 앰프가 아닐까 하는 인상을 받았다.

 

궁극의 사운드로 돌아온 나그라

허영호

 

나그라는 골수팬이 많은 오디오 브랜드라고 할 수 있겠다. 원래 프로용 방송 및 레코딩 기기를 주로 생산하고 있지만 일반 오디오파일용 기기들도 크게 호평을 받고 있다. 많은 엔지니어들에 나그라 기기를 사용해서 방송과 레코딩을 하고 있는데, 특히 유럽을 본거지로 하는 클래식음악 마이너 레이블 레코딩 프로듀서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기기라고 할 수 있겠다. 필자는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기기이기도 하다. 그 명백한 이유가 있다. 본 리뷰 후반부에 거론할까한다.

이번에 소개하는 파워앰프 PSA와 프리앰프 멜로디는 나그라가 개발한 트랜지스터 앰프의 대표적 기기라고 할 수 있겠다. 원래 진공관 소자를 사용한 기기를 주로 만들던 나그라는 지난 몇 년 동안 트랜지스터, 다시 말해서 solid state 방식의 기기도 생산하고 있다. 아마도 진공관의 범용성을 지속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데다가 현대 전자기술의 빠른 발전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트랜지스터로도 완성도 높은 회로를 디자인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나그라 엔지니어의 자신감도 작용했으리라.

나그라 오디오 회로기술의 엑기스는 전원 공급을 안정화시킴으로서 노이즈의 획기적 감소를 이루어낸다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나그라 특허기술인 PFC라는 스위칭 전원 공급방식은 교류/직류 변환에서 발생하는 노이즈를 완전히 통제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 열악한 환경에서 사용되는 프로용 기기를 개발하면서 축적된 노하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 시청할 파워앰프는 PSA (Pyramid Stereo Amplifier)이다. 이전에 개발된 PMA (Pyramid Monoblock Amplifier)를 스테레오 버전으로 만든 것인데, 풀 밸런스 전송방식으로 디자인되었고 MOSFET 증폭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은 PMA와 동일하며 채널당 100와트 출력을 내준다. 프리앰프 멜로디는 나그라의 전작 진공관 프리앰프 재즈와 거의 같은 디자인으로서 역시 트랜지스터 소자를 사용하고 있다. 5개의 RCA 입력, RCA, XLR 두 종류의 출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나그라의 다양한 외부 전원 공급 장치를 사용할 수 있다. 아날로그 재생을 위한 별도의 포노 모듈도 준비되어 있다고 한다.

본 시청을 위해 하이파이클럽에서 셋업 해놓은 기기들은 베리티 오디오의 아마디스 스피커, 메리디안의 술루스 시스템 (818 Reference Audio Core), 그리고 케이블은 모두 헤밍웨이의 제품으로 통일하였다. 시청한 음원은 웅산의 “Tomorrow," 번스타인이 60년대에 뉴욕 필하모닉과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CBS), 그리고 카라얀과 파바로티가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한 푸치니 ”라보엠“ 도입부 (Decca)등이다.

 

웅산의 “Tomorrow"를 들어보니 이전에 시청했던 골드문트 앰프세트에 비교할 때 다소 ”덜 시끄럽다“라는 느낌을 준다. 안정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다른 표현을 빌린다면 점잖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고급스럽고 우아한 톤으로 웅산의 목소리를 재생해내고 있는데, 웅산의 노래를 직접 실연으로, 그것도 콘서트가 아닌 사적인(?) 모임에서 직접 들었던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녀의 폭발적인 보이스를 너무 보듬어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웅산의 깊은 숨소리, 기척감, 그리고 찰나의 머뭇거림 같은 것도 잘 잡아낸다. 기타리스트의 핑거링, 특히 약간 느린 타이밍으로 들어오는 -이것도 루바토라고 할 수 있을까- 대목도 잘 그려낸다. 베이스 스트링의 공명도 선명하다. 스튜디오 녹음의 현장감은 실로 대단하다. 사용되는 마이크의 성격 차이조차 잡아낼 듯하다. 파워감, 실재감보다는 밸런스를 앞세운 재생이다.

베토벤 교향곡 4악장을 들으니 과연 이 기기들이 트랜지스터 소자를 사용해서 만든 앰프인가를 되묻고 싶을 정도로 진공관의 향취가 진하게 배어나오는 듯 한 착각이 든다. 자연스럽고 유연하지만, 연출이 가미된 소리임에 분명하다. 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의 맛이라고나 할까. 너무나도 예쁜 소리, 그래서 골수팬들이 나그라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모든 음원을 나그라 사운드로 만들어버리는 능력, 바로 이것 때문에 음반평론을 하는 필자입장에서 나그라를 사용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연주와 레코딩의 좋고 나쁨을 구분해서 이를 설명하는 평론가의 입장에서 나그라 시스템으로 음원을 변별하는 일이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60년대 CBS 레코딩 음원은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때 완성도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매우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그라가 연출하는 번스타인의 베토벤 음원에는 오디오파일 레코딩에서나 엿볼 수 있는 “안정감”이 연출된다.

카라얀의 “라보엠”에서는 일단 관현악 앙상블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는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베를린 필하모닉 특유의 포화상태 일보직전까지 밀어붙이는 풍부한 소노리티, 특히 스트링과 목관의 합주대목에서 나그라의 매력이 두드러진다. 호른연주를 들어보면 공간감이 매우 훌륭하게 재생된다. 고음역의 재생은 실로 매혹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파바로티의 목소리는 다소 “중년”스럽다.

전체적으로 아름답지만, 긴장감이 아쉬운 사운드인가. 파리 거지(?)들의 절실함은 어디에 있는가. 나그라 사운드는 이들이 추운 다락방에서 배를 굶주리고 있다는 현실을 드러내 주지 않는다. 아름다운 파리의 젊은 낭만을 미화하고 있다고나 할까. 호불호가 갈리는 대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그라. 최상이라면 최상이라고 할 수 있는 사운드를 만들어준다. 옷으로 말한다면 최고의 옷감을 사용해서 모두 손으로 직접 바느질해서 만든, 예를 들자면 아톨리니(Cesare Atolini)의 수트와도 같은 느낌을 주는 사운드이다. 몸짱이 아니더라도 그 옷을 입는 순간 최고의 멋쟁이로 변하는, 그리고 한번 그 맛을 보면 다른 그 어느 옷들도 눈에 차지 않는 경지, 그런 사운드라 하겠다. 필자와 같은 음반, 오디오 평론가가 아니라면 더 이상 업그레이드가 필요 없는, 궁극의 소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혹적인 소리를 들려주는 세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