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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링크(Acrolink) 케이블을 오랜만에 접하게 된다. 1990년대 초반에 아크로링크의 전신 아크로텍(Acrotec) 인터커넥트 케이블로 메리디안 CDP와 덴센 인티앰프를 연결해서 시스템을 구성한 적이 있는데 당시 매우 만족스럽게 사용했던 기억이다. 1990년대 초반 디지털 음원의 한계는 무엇보다 고역재생이 거칠다는 것이었는데 지금 와서 보면 당시 아크로링크의 케이블이 이를 많이 “순화“시키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크로링크의 역사를 간략히 정리한다. 원래 일본 미쓰비시(Mitsubishi) 제철의 조그만 사업부, 쉽게 말해서 사내벤처 비슷하게 시작되어 오디오 전문 케이블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그 브랜드가 아크로텍이었다. 한동안 일본 오디오 시장에서 가격대비 성능이 뛰어나다고 인정받아 인기를 끌었는데 미쓰비시 제철이 이 사업을 접게 되자 그 인력들이 회사를 나와서 독립, 전문 오디오 케이블 회사로 거듭난 것이 바로 아크로링크이다. 미쓰비시에서 분리되었지만 케이블 원재료 구리동선은 계속 미쓰비시 제철에서 최고급의 자재를 공급받고 있다고 한다.

아크로링크 제품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6N (식스나인) 인데, 케이블 재료로 사용되는 구리의 순도가 99.999999%, 즉 소수점 이하로 9가 여섯 자리까지 내려갈 정도로 순도가 높다는 것이다. 오디오파일들 사이에선 “야해도 너무 야한”(?) 마케팅 용어라고 화자 되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기술의 발전, 연구개발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이제 6N은 7N으로 진화되었는데, 구리의 순도를 극대치로 밀어붙여 또 한 개의 소수점 자리를 붙이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번에 시청하는 7N-DA5100 Mexcel 시리즈는 현행 아크로링크 케이블의 주력제품이라고 하겠는데 최고급 플래그십 케이블 바로 아래 급이라고 알려져 있다. 아크로링크의 미들급 선수라고나 할까. 7N 동선과 은도금한 4N 동선을 하이브리드로 구성해서 케이블을 디자인한 제품이라고 한다. 본 제품은 또한 일본 오디오브랜드 에소테릭에도 공급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크로링크와 에소테릭은 소리성향에서 유사한 면모를 보여준다.

본 시청을 위해 RCA 언밸런스 케이블이 제공되었는데 필자의 시스템 여기저기에 연결해보면서 소리의 성향을 알아보기로 했다. CDP-프리앰프, DAC-프리앰프, 파워앰프-프리앰프, 포노앰프-프리앰프 등을 연결해보았다. 굵기도 적당하고 유연해서 사용하기 편하고 단자도 매우 고급스럽다. 참고로 필자가 현재 사용하는 메인 케이블은 일본 파이널 연구소 제품이다.

 

디지털 음원을 재생하는데 Mac Pro를 트랜스포트로 사용하는 필자는 CDP로 음악을 거의 듣지 않는데 일단 필자의 중저가 CDP 데논 3910 유니버설 플레이어와 프리앰프 사이를 연결해보니 마치 CDP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한 것과 같은 소리의 변화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정보량도 많아졌지만 무엇보다도 밸런스가 출중한 소리를 내어주고 있다. 중저가 CDP를 사용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매우 효과적인 업그레이드 방법이 될 수 있겠다. 20여 년 전 필자가 아크로텍의 케이블을 구입한 이유도 메리디안 CDP 소리를 한 단계 높이자는 취지였다.

 

Mac Pro에서 아이튠스, 오덜바나(Audirvana)를 거쳐 아포지 듀엣 (Apogee Duet)과 연결한 디지털 소스 시스템과 프리앰프 사이에 연결해서 다양한 음원을 본격적으로 시청해보았다. 일단 전체적인 소리성향을 요약해보면 넓은 음장감, 밝은 음색, 그리고 자연스런 밸런스 감을 만들어내는 케이블 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구리소재 케이블의 일반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중립적(neutral) 소리에 있어서는 가히 최고수준이라고 하겠다. 스테이지의 깊이, 높이, 선명도등은 말 그대로 중용의 밸런스이다. 부족하지도 않고 과하지도 않다. 정보량이 많으면서도 정숙하다. 상쾌한 느낌을 주는 평탄한 밸런스의 사운드를 만들어내는데, 실로 일본 오디오 사운드의 전형이라고도 하겠다.

 

이러한 아크로링크의 소리성향은 은선 (silver cable) 의 화려한 소리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다소 재미없는(?) 소리라고 들려질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구리선의 화장기 없는 소리에 익숙해지면 은선의 지나친 표현이 과장으로 느껴지면서 부담스러워진다. 특히 고전음악을 주로 듣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예전에 필자가 어느 오디오 리뷰에서 은선을 오디오시스템에 사용하는 것은 마치 약을 처방받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대규모 관현악 재생에서 어떠한 특성을 보여주는지 알기위해 솔티의 말러 8번 교향곡 음원을 들어본다. (Decca SET534, 414-493) 1971년 솔티가 시카고 교향악단을 이끌고 비엔나 소피엔잘에 가서 녹음하였는데 당대 최고의 데카사운드를 케네스 윌킨슨, 고든 패리 두 명의 레코딩 엔지니어가 담아내었다. 실로 밀도(density)가 높은 레코딩인데 아크로링크 케이블의 넓은 스테이지 연출능력 덕분에 매우 자연스런 음상을 만들어내면서 공간감, 즉 “여백”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좀 더 편한 마음으로 말러의 교향곡을 들을 수 있다고나 할까.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이 녹음한 60년대 DG 레코딩에서도 비슷한 효과를 내어주고 있었다.

 

한편 아크로링크 케이블의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내는 음원은 피아노 레코딩이었다. 피아노 레코딩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직접음과 간접음의 밸런스인데 아크로링크는 이를 매우 높은 완성도로 연출하고 있었다. 미켈란젤리의 드뷔시 피아노곡 집을 들어보니 (Prelude DG 2531 200, Images DG 2530 196) 미켈란젤리 특유의 절묘한 피아니즘을 매우 적확하게 짚어내고 있을 뿐 아니라 레코딩 프로듀서가 서로 다른 각도에서 녹음에 임하고 있음을 들려주는 듯하다. Prelude를 녹음한 코르드 가벤/클라우스 하이만이 드뷔시 작품 자체의 아름다움에 부점을 두었다면, Images를 녹음한 레이너 브룩/하인즈 비르트하겐은 미켈란젤리의 상상력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수준에 도달해서 음원의 의미를 찾아내는 케이블은 흔하지 않다.

 

오랜만에 들어본 아크로링크의 케이블은 과거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음과 동시에 새로운 기술력으로 다듬은 7N 동선의 특성을 매우 효과적으로 반영한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고 하겠다. 고가의 케이블로 소리를 적극적으로 연출하는 재미도 만만치 않겠지만, 아크로링크와 같이 중립적이면서 밸런스가 우수하면서 소스기기 혹은 앰프의 소리성향을 가감 없이 전달해주는 케이블의 가치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가격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으니 한조 갖고 있으면서 여기저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케이블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고전음악을 주로 듣는 이들에게는 매우 만족스러운 케이블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