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오랜만에 도쿄 오디오 쇼를 방문했다. 그간 자주 도쿄를 방문했지만, 특정 회사의 인터뷰나 탐방이 주목적이어서, 요 몇 년간 이 행사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특별히 크렐의 부사장인 피터 맥케이 (Peter Mackay)씨와 인터뷰가 예정되어 급히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이다.

크렐(Krell). 정말 말만 들어도 심장이 뛰는 브랜드다. 한때 마크 레빈슨과 하이엔드 업계를 양분해서 천하를 호령하던 회사이고, 지금도 그런 명성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알찬 신제품을 발표하고 있다. 당연히 간부급과의 미팅이라면 방문해볼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행사장 한쪽의 커피숍에서 두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속으로 과연 이 질문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은 게 하나 있었다. 얼마 전 크렐을 나간 창업자 댄 다고스티노씨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흔쾌히 그 내용을 소개했다. 이 대목에서 동양적인 사고 방식으로는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네는 누가 어디를 퇴사한다고 하면 일종의 원수지간이 되지 않는가. 프로야구 선수의 FA 이적과 관련된 뒷이야기를 한번 보라. 어쨌든 회사 근처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는 게 관례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일단 다고스티노씨는 원래 자신이 갖고 있었던 크렐의 지분을 지금도 고스란히 갖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다른 회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크렐과의 연이 전혀 끊어지지 않은 것이다. 게다 현행 경영진과는 오랜 기간을 함께 해온 사이인 만큼, 서로 얼굴을 붉힐 일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크렐이 승승장구하면 결과적으로 다고스티노씨도 이득을 보는 구조였다.

 

또 하나는 원래 크렐을 지탱해 온 엔지니어 팀이 그대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다고스티노씨는 오케스트라로 말하면 지휘자격이다. 직접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분은 아닌 것이다. 그 엔지니어 팀의 수장은 데이빗 굿맨 (David Goodman)씨로, 무려 23년을 근속하고 있다. 초기 PAM 시리즈 디자인부터 관여했다니, 실질적인 크렐의 브레인인 것이다.

 

이런 굿맨씨가 멀쩡하고 또 다양한 역할 분담을 담당하는 엔지니어 팀이 건재한 만큼, 이제는 크렐 자체의 브랜드 파워나 내공에 오히려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다고스티노씨가 재직할 때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하나 있다. 바로 혼다 어큐라 승용차에 크렐의 카 오디오 시스템을 장착하는 것이다. 그러다 그가 퇴사하고 나서 이 계획이 무산되었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얼마 전에 신제품이 출시되었는데, 당연히 크렐의 제품이 장착되어 있다. 즉, 크렐의 회사로서의 기능이나 역할은 그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인터뷰에서 언급된 제품 중의 하나가 팬텀(Phantom)이다. 기존의 에볼루션 시리즈의 기술을 다시 한번 “에볼루션”(혁신)해서 나온 제품으로, 여러모로 그 성능과 완성도에 관심이 간다.

 

그간 PAM 시리즈나 KSL, KBL 등으로 알려진 여러 명품을 발표한 크렐에서 이번에 작심하고 플래그쉽 모델로 출시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프리와 파워는 임피던스 문제로 같은 메이커에서 만든 제품을 추천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적으로 파워 앰프의 명성에 비해 프리가 덜 알려진 듯 싶지만, 이번 제품의 경우 현존하는 최고의 프리 중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제품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일단 외관을 보면 투 박스 형태로 되어 있다. 참고로 하위 기종은 모두 하나의 박스에 담겨 있다. 그럼 과연 무엇을 빼냈을까? 당연히 전원부다. 그럼 전원부를 따로 담으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전기적이고 자기적인 간섭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프리앰프처럼 미약한 신호와 전류를 다루는 컴포넌트에서 이런 간섭은 때때로 치명적일 수도 있다. 이런 간섭을 피하기 위해 그간 수많은 케이블 회사들이 고심한 부분을 생각하면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튼실한 전원의 보급이다. 물론 프리앰프는 성격상 많은 전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음성 신호에 따라 갑작스럽게 강한 전류를 필요로 한다거나, AC 볼티지에서 강한 파워가 유입되는 등, 여러 변수가 많이 개재한다. 이 부분을 어떻게 능수능란하게 처리하냐가 관건인 셈이다.

 

이를 위해서 일단 대용량의 전원 트랜스를 담았다. 무려 290VA급이다. 어지간한 인티 앰프에 들어갈 만한 용량인 것이다. 또 상급의 콘덴서를 동원해 전기의 질 자체를 고순도로 만들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충분히 제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유를 뒀다. 일단 이렇게 전기적인 부분이 해결되면, 반 이상은 먹고 들어간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편 동작부를 보면, 일단 광대역 특성이 눈에 띤다. 기본적으로 논 피드백 기법을 사용해 일체의 네거티브 신호를 유입시키지 않았고, SMT 테크놀로지를 통한 빠른 신호 전송 경로를 확보한 점도 눈에 띤다. 그 결과 1.5MHz에 달하는 광대역을 실현한 것이다. 그야말로 눈부신 성과라 하겠다.

 

사실 이런 광대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이즈다. 대역이 좁으면, 아무래도 노이즈를 처리하는데 용이하다. 작은 방과 큰 거실을 청소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대역이 넓을 수록 노이즈를 처리하는데 애를 먹게 된다. 이 부분에서 새로 개발한 서킷과 듀얼 모노럴 구성, 풀 밸런스 회로 등 다양한 고안을 통해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음을 듣게 된다면 일단 적막강산이고, 깨끗한 뒷배경이다. 무척이나 투명하면서 광대한 음장이 떠오른다. 왜 이런 프리가 필요한지 충분히 공감할 만한 내용인 것이다.

 

그린 기능이라는 부분도 지적할 만하다. 왜 그린이냐? 스탠바이 상태에서 전원의 사용을 극력 억제해서 환경에 이로운 역할을 하겠다는 취지다. 실제로 스탠바이가 되면 고작 2W 미만의 전류만 소비된다. 이전 제품이 동작 당시의 전력을 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혜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옵션이 있다. 일종의 크로스오버를 별도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저역부의 특정 대역을 잘라서 바이 앰핑과 같은 설계를 가능케 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40/55/75/100Hz 중 자신이 특정 대역을 선택할 수 있고, 그 선택된 부분의 음량도 12/24/48dB로 조절할 수 있다. 요즘 많은 스피커들이 액티브 서브 우퍼를 달고 거기에 여러 옵션을 추가하는 경향을 생각할 때 시장의 흐름을 잘 이해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본 기의 시청을 위해 파워 및 CDP는 크렐의 900e와 사이퍼를 동원했고, 스피커는 아발론의 신작 콤파스 다이아몬드를 사용했다. 시청 트랙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야니네 얀센 (바이올린)
-드보르작 《둠키 중 3악장》 보자르 트리오
-슈베르트 《아르페지오 소나타 2악장》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제니퍼 원즈 《Somewhere Somebody》

 

첫 곡으로 들은 야니네 얀센의 연주는 여러모로 인상적이다. 일단 정신없이 빠르다. 그러나 단순히 빠른 게 아니라, 그 안에 다양한 음성 정보가 쉴 새 없이 요동친다. 그런 다이내믹 레인지가 상당히 넓다. 아무리 위로 솟구치거나 밑으로 뻗어도 여유가 느껴진다. 또 독주자와 교향악단 사이의 거리가 눈에 띤다. 얀센을 뒤에서 감싸듯 쭉 둘러앉은 악단의 사이즈나 움직임이 일목요연하며, 독주자와의 교감도 충분히 이뤄지고 있다. 협주곡이라는 형식이 잘 표현된 재생이다.

이어서 보자르 트리오의 연주를 보자. 이 곡은 연주도 좋지만, 녹음이 참 잘 되어 있다. 이 프리가 어떤 음색이나 성향을 갖고 있나 파악하려고 골랐는데, 첫 소절부터 조용히 마음을 끌어당겼다. 마치 작은 연못에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가 던져져서 잔잔한 파문이 주위로 확산되듯, 피아노의 음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게 공간에 퍼지고, 이어서 바이올린과 첼로가 살며시 등장한다. 그리고 조금씩 엮어가면서 점차 열기를 띠어가는 부분이 놀랍도록 정교하고 또 아름답다. 꽃 봉우리가 서서히 피어나는 장면을 보는 듯한 풋풋한 감성이 꽤나 인상적이다.

그 다음 로스트로포비치의 전설적인 연주에서 놀란 것은, 그간 심하게 들렸던 테이프 노이즈가 상당히 감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첼로와 피아노 음이 더욱 선명하고 싱싱하게 부각된다. 마치 낡은 녹음을 새롭게 리마스터링해 요즘 녹음처럼 개량한 듯한 인상이다. 심지어 이런 잡소리를 제거하는 뭔가가 있어서 음성 신호만 부각한 듯하다. 앰프가 이런 역할까지 하는 시대가 되었나? 그런데 이렇게 음이 명료해지면서, 더욱 음악의 표정이 풍부하게 다가온다. 특히 천의무봉, 신의 손길로 쓰다듬는 첼로 현의 세세한 마찰음은 극도의 세밀함으로 표현된다. 어떻게 이런 경지가 가능할까?

마지막으로 제니퍼 원스. 기본적으로 더블 베이스가 리듬 섹션을 담당한 가운데 스피커 양쪽으로 두 종의 퍼커션이 이펙트를 넣는 구성. 그 중앙에 원즈가 홀연히 떠올라 노래한다. 각 악기와 보컬간의 간격이 충분히 상상되는 모습이다. 노래 자체의 디테일이나 음역, 발성 등 여러 요소가 낱낱이 포착되고, 갑자기 출몰하는 코러스의 존재감도 명확하다. 즉, 이 곡이 녹음될 때의 마이크 세팅이나 각종 이펙트 처리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왜 하이엔드 오디오를 듣는가, 왜 이런 프리가 필요한가에 대한 멋진 대답이 아닐까 싶다.

 

이종학(Johnny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