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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와 전통을 자랑하는 <스테레오파일>지에서 2008년도에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아트 더들리라는 평론가가 주도해서, 무려 50여 년전에 나온 기기를 개량한 제품에 <올해의 프로덕트> 상을 줬기 때문이다. 아무리 오디오 제품의 생명력이 길고, 잘 갈고 닦으면 빈티지 대접을 받는 상황이긴 하지만, 최신 제품만을 다루는 이 잡지에서 그런 이벤트를 벌인 것은 아마 최초이자 최후가 아닐까 싶다.

바로 그 주인공은 쇼퍼 모드(Schopper Mod's)라는 제품으로, 토렌스에서 나온 전설적인 명기 TD124를 개량한 버전이다. 말하자면 결코 신제품이 아니다. 일종의 업그레이판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이런 찬사를 받은 데에는 좀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 제품을 만든 스위스소노(Swissonor)라는 회사는, 원래 TD124용 플래터를 제작하며 출발했다. 다분히 빈티지 기기와 아날로그에 대한 집착이 강한 듯 보이는데, 그 덕분에 이런 개량판에 이른 것이다.

 

아무튼 이때를 기점으로, 확실한 인지도와 자신감을 갖고, 이 회사는 본격적인 제품 개발에 들어간다. 특히 진공관 앰프는 종류도 많고, 음도 뛰어나서 좋은 평을 받은 바 있다. 당연히 대출력은 아니고, 6V6, 300B 등을 쓴 트라이오드 설계가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이번에 만난 제품은 스피커다. 다소 고색창연해 보이는 디자인에 2웨이 동축형 설계로 제작되었는데, 모델명에 바흐(Bach)가 들어가, 음, 대충 빈티지 성향이겠군, 하는 선입견으로 접했다. 한데 이게 웬일인가? 전혀 예상과는 다른, 나긋나긋하고, 투명하며, 하이엔드 지향의 빠른 음이 나왔다. 완전히 뒤통수를 한 방 맞은 격이다.

 

어쨌든 모양답지 않은 신선하고, 잘 다듬어진 사운드는 당연히 메이커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했다. 하지만 이런 회사들의 특징이 그렇듯, 별로 제품 홍보나 메이커 소개에 관심이 없다. 심지어 사장이나 설계자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참,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홈 페이지를 살펴보니, 회사가 스위스의 트로와넥스(Troinex)란 지역에 소재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구글 지도로 검색해보니, 바로 제네바 인근에 있었다. 이곳은 스위스, 프랑스, 이태리 등의 국경선이 맞닿은 지역으로, 문화적으로 세 나라의 다양한 전통이 어우러져 있을 뿐 아니라, 충실한 공업 지대의 장점도 아울러 갖고 있다.

 

예전에 나는 제네바를 방문해서 구석구석 돌아볼 일이 있었는데, 제네바 호수를 비롯한 알프스산의 수려한 경관에 쾌적한 주거 환경 그리고 정밀 기기 가공을 중심으로 한 알찬 공업 지대에 이르기까지, 참 잘 만들어진 도시라는 느낌을 받았다. 스위스소노 역시 그런 혜택을 듬뿍 받았음은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어쨌든 국적과 위치를 알았으니, 이제 제품에 대해 시선을 돌려보자. 일단 바흐라는 모델명은 음악가 바흐를 뜻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B.A.C.H.”라고 쓴다. 말하자면 그들이 자랑하는 기술의 약자로, 정확히는 “Bass Adjustable Coaxial Horn”의 의미다.

여기서 혼이 뜻하는 바는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바로 고역을 담당하는 혼이 떡하니 전면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베이스를 정확히 잡아준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좀 이야기가 길어진다.

 

스피커를 제작할 때, 이른바 튜닝에 들어가는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기법이 존재한다. 저역을 잡기 위해선 고역을 만지고, 고역을 컨트롤하기 위해선 저역을 조정하는 것이다. 단지 고역 혹은 저역을 잡고자 해당 유닛만 만져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혼을 중심으로 중저역을 아울러 컨트롤해서, 현대 오디오의 스펙에 부응하는 빠르고, 정확한 음을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여기서 미드 베이스 유닛을 보면, 본 기의 모델명 “B.A.C.H. 8”이 암시하듯 8인치 구경이다. 그 위로, 10과 12가 있으며, 한편 센터 체널로 8C 버전도 있다. 12는 상당히 크고, 대역도 넓은데, 이런 거함을 쓸 수 있는 애호가들은 한정된 만큼, 일반 가정용으로는 본 기가 적합하다고 본다.

 

한편 혼을 보면, 컴프레션 드라이버를 장착한 정통파임을 알 수 있다. 같은 혼이라고 해도 일반 유닛에 혼만 단 경우도 있는데, 본 기는 진짜 혼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정공법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 것은, 이른바 동축형이라고 하면, 대개 고역이 미드베이스 유닛의 중앙 안쪽에 위치하기 마련인데, 본 기는 거꾸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고역부가 돌출되고, 중저역이 뒤에 박혀 있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지 않나?

이에 대해 스위스소노의 생각은 다르다. 이렇게 배치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시간축에 대한 문제가 발생해서, 고역이 좀 느리게 온다는 것이다. 어떤 회사는 이런 타임 딜레이를 해소하기 위해 저역부에 복잡한 네트웍 설계를 하는데, 그에 따른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그러므로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면 간단하게 해결된다는 것이다. 사실 네트웍 설계는 부품을 최소화할 수록 좋다. 이것은 상식에 속하므로, 이들의 의견에도 나름 수긍이 간다.

 

아니 정확히는 소리로 판단해야 하고, 그 점에서 이들의 접근법이 맞는지 그른지 굳이 연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나중이 시청평에서 다루겠지만, 놀랍도록 하이엔드 지향의 음은, 이 회사가 대단한 기술력을 갖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인클로저를 보면, 일종의 플라이우드를 성형한 방식인데, 위에서 보면 다이아몬드 형태로 되어 있다. 벽이나 코너에 설치해도 부담이 없는 모양인 것이다. 그럴 경우, 주변에 정재파 같은 게 생기지 않을까 우려할 수 있지만, 워낙 유닛의 직진성이 좋아 아주 깔끔하게 음이 나온다. 주변에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그런 부분은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어쨌든 모든 대역이 하나의 포인트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동축형이 가진 장점은 대단하다. 특히, 공간 묘사가 빼어나, 깊은 안길이가 가능한 부분은 아주 신선한 매력을 준다. 또 혼 특유의 직진성도 확보해서, 나와야 할 음은 확실하게 나와준다. 비록 모양은 회고적이고, 일견 멋대가리 없어 보이지만, 음을 들으면 충분히 납득하리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빅 뉴스 한 가지. 사실 3극관 애용자가 적지 않은데, 그에 매칭할 수 있는 스피커 선정에 늘 골머리를 앓고 있을 것이다. 본 기는 8W부터 구동이 가능하다. 그 정도만 갖고도 엄청난 다이내믹스가 나온다. 결코 케케묵은, 축축 늘어지는 음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하이엔드 성향의 빠르고, 진솔한 음에 3극관만의 뉘앙스를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본 기가 가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하겠다. 별 생각없이 들었다가 깜짝 놀란 제품이었는데, 가격마저 적당해서 많은 애호가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만 같다.

본 기의 시청을 위해 다소 호화로운 라인업을 선택했다. 일단 국적이 같은 다질의 프리 앰프가 동원된 바, 각각 18NS 프리와 NHB 108이다. 여기에 소스는 메트로놈의 CD8. 참고로 시청 트랙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말러 《교향곡 2번 1악장》 정 명훈 지휘
-사라사테 《치고이네르바이젠》 안네 조피 무터 바이올린
-세자르 프랑크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A장조》 뒤메이 & 피레스
-니키 패럿 《Dark Eyes》

 

우선 말러부터 들어보자. 역시 동축형의 장점이 잘 드러나, 스피커 뒤편으로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오케스트라가 쭉 펼쳐져 있다. 기본적으로 음색이 빼어나, 현악기와 관악기 등이 멋지게 피어오른다. 의외로 대역이 넓어서, 총주시에 몰아치는 저역의 묵짐함이 인상적이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는 고역엔 여유가 넘친다. 충실한 밀도감으로 다가오는 중역 역시 칭찬할 만하다. 스위스제끼리의 매칭이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다른 나라의 제품에서 느낄 수 없는 디테일과 섬세함 그리고 묘한 뉘앙스가 무척 흥미로웠다.

 

이어서 사라사테를 들으면, 무터 특유의 강직함보다는, 다소 유려하면서 날렵한 부분이 돋보인다. 자세히 들으면, 마치 물 흐르듯 바이올린이 질주하는데, 이를테면 LP를 듣는 듯 자연스럽다. 가끔 출몰하는 오케스트라의 백업도 적절하고, 저역의 양감도 괜찮다. 전체적으로 세련된 음인데, 스피커 자체는 일종의 시골 처녀같은 소박함이 강해서,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절대 겉모양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되는 제품이라 하겠다.

 

프랑크의 작품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편이다. 은은하게 감싸는 듯한 피아노 반주 위로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바이올린의 음향이 압권인데, 여기서 완전히 녹 아웃되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서정적이며, 심금을 울리는 음은 최근에 들은 적이 없다. 아련하게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면서, 한편으로는 소파에 푹 꺼지고 싶을 만큼 릴렉스한 분위기도 선사한다. 확실히 스위스에는 뭔가가 있구나 새삼 절감했다.

 

마지막으로 패럿의 노래는, 자칫 빅 마우스로 들릴 만한 소지가 많다. 여기서는 그런 파탄이나 왜곡을 찾을 수 없고, 오히려 패럿의 개성이 잘 돋보이고 있다. 특히, 그녀는 더블 베이스를 치면서 노래하는 터라, 그 독특한 리듬감이 매력 포인트다. 이 부분을 놓치면 흥미가 반감된다. 당연히 여기선 발장단을 구르게 할 만큼 흥겹게 재생된다. 한편 타건이 명쾌한 피아노, 호방한 느낌의 테너 색스, 신명난 드럼 등, 밴드를 구성하는 여러 악기들이 제목소리를 내고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는 부분은, 이 스피커가 기본적으로 음악을 즐기기 위한 도구로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충분히 짐작하게 해준다.

 

이종학(Johnny 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