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현악의 성전이라 할 수 있는 베토벤 교향곡은 별처럼 많은 명반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곡반을 구입할 기회는 의외로 적다고 하겠습니다. 손이 많이 가는 교향곡들의 역사적 명반만 골라 사모을 수 있는데 굳이 전집을 사야 할 필요를 느끼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사이먼 래틀에게 베를린필을 넘겨주기에 앞서 벌인 이 대형프로젝트는 구입전부터 남다른 매력을 풍기고 있었습니다. 이미 적지않은 언론에 보도된 바대로, 첫째, 베토벤 친필수고 분석에 충실한 판본을 사용하였고, 둘째로는 현대 대형오케스트라의 전형인 베를린필로써 원전연주적인 연주를 했다는 것입니다.
아바도는 이번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녹음하면서 조나단 델 마르(Jonathan Del Mar)가 편찬한 -96,7년경으로 기억합니다만 확실치가 않군요- 판본을 사용했습니다. 아바도에 따르면, 이 판본은 베토벤의 친필 수고가 어떻게 수정되어 왔는지, 또 그 이후의 인쇄본들은 어떤 수정을 거쳤는지에 대한 종합적 연구결과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CD해설지에 수록된 인터뷰에서 아바도는, 이런 판본의 성격 덕택에 자신이 모든 음표와 기호 하나하나를 따져보아 음악적으로 가장 설득력있다고 생각되는 악구들을 골라낼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조나단 델 마르 판본을 따랐지만 일부에서는 '베토벤이 유사한 성격의 다른 악구를 전개해 나간 방식으로 미루어보아' 델 마르의 악보가 맞지 않다고 생각되면 다른 방식으로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원전연주적 성격 또한 이 전집을 말할때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특징입니다. 우선, 아바도는 현대오케스트라보다 훨씬 작은 편성으로 연주를 했습니다. 특히 1번,2번,4번,8번 교향곡의 경우 베이스 3대, 첼로 4대, 비올라 6대, 10대의 제1바이올린, 8대의 제2바이올린만 가지고 연주를 했습니다.
이런 교향곡들의 경우, 베토벤 당대에는 울림이 많은 귀족들의 방에서 실내악처럼 연주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당대의 전례를 따라 작은 편성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악기를 모두 원전악기를 쓴 것은 아닌 것으로 들립니다만, 보잉의 경우는 베토벤 당시의 주법을 재현했다고 아바도 자신이 밝히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음반에서 들을 수 있는 현 파트는 아주 매력적입니다. 카라얀시절과는 또 다른 - 아니 당연히 다른 느낌인데, 매우 상큼하고 날렵하면서도 유려함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아바도 집권(?) 이후 대부분의 단원이 2-30대 다국적군으로 물갈이되었는데 , 그런 탓에 미국의 한 평론가는 "It's not your father's BPO!"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1,2,4,8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베토벤 교향곡 전집의 구매가치 평가 잣대는 의외로 간단할 수 있습니다. 1,2,4,8은 평소에 자주 듣지 않던 것이니 자주 손이 가게 하면 됩니다. 3,5,6,7,9는 끝난 다음에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칠 수 있게 하면 됩니다. 6은 양보할 수 있다 하더라도 3,5,7,9번을 듣고 마지막 총주가 끝난 뒤 기립박수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명연주의 반열에 들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런 기준아닌 기준에 비추어볼 때 이번 box-set은 must-buy입니다.
하이든 교향곡의 색채를 지닌 1,2번은 실내악을 듣는 듯 모든 선율과 화음이 투명하게 드러나면서도 베토벤 특유의 박력을 잘 살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사실 1,2번 교향곡을 들을 일이 별로 없었는데, 앞으로 좀 더 자주 듣게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4번 교향곡도 매우 뛰어납니다. 소편성임에도 불구하고 그정도의 스케일과 박력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소개할 생각인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의 4번(Orfeo)의 위대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훌륭한 연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3번 에로이카는 해외나 국내의 다른 평론을 볼 때, 이 박스 셋 가운데서는 가장 평가가 좋지 않은 곡입니다. 요컨대, 기대만큼 'revolutionary'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장중함, 비탄, 그것을 극복하고 일어선 자의 격렬한 환희 같은 메시지나 감정이 약하다는 류의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5번에 대해서도 정도는 훨씬 덜하지만 비판이 제기될 경우 그 성격은 대략 비슷합니다.
제 생각은, 꼭 그런것만도 아니라는 쪽입니다. 다만, 확실히 아바도의 에로이카는 이를테면 푸르트벵글러와 같은 지휘자들의 연주에 비해 주관적 정서의 개입과 감정이입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앙상블을 극도로 조탁하여 무협지로 치자면 공력의 발출과 수습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고 쾌속한 경지에 이르렀지만 카라얀의 BPO가 갖고있던, 때로는 악마적일 정도의 탐미주의적 성향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특성은 뛰어난 다이내믹입니다. 약음에서 강음으로의 점층적 또는 폭발적 전환이 대단한 스피드와 컨트롤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담백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듣는 이에게 전해줍니다. 6번 '전원교향곡'의 4악장 천둥 장면같은 것은 최고의 4악장으로 꼽는 평론가들이 적지 않습니다.
푸르트벵글러냐 토스카니니냐를 따진다면 제 느낌으로는 토스카니니쪽에 더 비슷한 인상을 주는 연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바도 자신은 푸르트벵글러를 모델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씨디 해설지의 인터뷰에서 아바도는,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 푸르트벵글러는 항상 가장 위대한 해석자였다. 오늘날에는 그의 지휘 가운데 몇가지 점, 이를테면 템포 같은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그는 나에게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서 남아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음표와 모든 악구의 논리적 의미를 발견하여 지휘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토스카니니와도 달랐다. 토스카니니는 뭐랄까, 좀 더 구조적이고 기술적인 면에서 지휘를 잘 했다. 푸르트벵글러쪽에는 들을 음악이 더 많았다.
확실히, 오케스트라에게 있어서 , 앙상블의 측면에서 토스카니니는 가장 위대한 지휘자였다. 그러나 프레이즈의 의미, 또 프레이즈 안에서의 음표 하나하나의 의미, 악보 전체 속에서의 한 음표의 의미가 문제가 될 때, 그것을 지휘하여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는 지휘자는 푸르트벵글러였다. 그리고, 푸르트벵글러는 템포 설정에 있어서 전적으로 자유로왔다."
푸르트벵글러에 대한 이런 존경의 결과일까요. 그래서 나타나는 또하나의 특징은 명확한 프레이징입니다. 외지의 한 평론가는 최근 출시된 귄터 반트의 브루크너 7번과 함께 아바도의 이번 베토벤 사이클을 최고로 명료한 프레이징을 보여주는 음반으로 꼽기도 했습니다.
각 교향곡을 악장별로 뜯어본다면 반대인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아바도가 설정한 템포는 푸르트벵글러보다 빠릅니다.
베토벤 당시의 메트로놈은 기계적으로 결함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베토벤이 자필 악보에 적어놓은 메트로놈 수치는 현대 연주자들의 입장에서 보기에 지나치게 빠르다는 것은 거의 정설처럼 굳어져가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아바도의 주장은 좀 다릅니다.
예를 들어 베토벤이 아다지오 악장에 메트로놈 얼마, 알레그로 악장에 메트로놈 얼마를 처방해 놓았다고 하고 그 악장간의 음악적 상관관계를 들여다보면, 지금까지는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왔던 스피드가 다 이유있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빠른 스피드라는 것은 다루기에 따라 약도 되고 독도 되는 것입니다만, 이 음반에서는 아바도의 오케스트라 장악력과 BPO의 완벽한 앙상블이 결합하여 스피드가 큰 약이 되고 있습니다.
주관적 정서의 이입을 가급적 배제하는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전곡이 모두 긴장과 박진감을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은 스피드와 다이내믹스에 대한 완벽한 콘트롤 덕분으로 보입니다.
7번 교향곡 4악장을 들어보면 이런 특성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7번을 저는 고전주의 시대 아폴로적 질서의 굳은 틀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열정의 혁명적 분출로 이해합니다. 아바도의 4악장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5번,7번 커플링 음반을 처음 들었을때만큼이나 가슴벅찬 감동과 흥분을 안겨주었습니다. 클라이버 음반이 LP로만 있었고 현재 씨디로는 없는 관계로 AB비교시청을 해보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만, 최고수준의 7번임을 역시 부인할 수 없습니다.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 얘기를 잠시 했는데, 한편으로는 가디너 생각도 납니다. 가디너 역시 빠른 템포와 완벽한 다이내믹을 자랑하는 반면 일부 감상자들로부터는 종교적 깊이가 떨어진다는 비난을 받는데, 아바도의 3,5,7번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런 부류와 맥을 같이 하니까요.
9번 합창에 대해서는 평단에서도 모두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팽팽한 긴장감, 가슴벅찬 감동, 작열하는 정열, 장중한 스케일 등 모든 요소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이제는 유명하다못해 전설이 되어버린 푸르트벵글러의 51년 바이로이트 녹음에 비견할만한 현대의 절대명연입니다.
유일하게 바랄 점이 있다면 4악장에서 성악파트의 포문을 여는 바리톤이 좀 더 베이스에 가까운 음색이면 좋겠다는 것인데, 가창에는 전혀 무리가 없으며 앙상블도 좋습니다. 마지막 코다도 압권입니다.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그리고 베토벤 9번 합창 등은 마지막 코다에서 모든 파트가 한마음인 것처럼 호흡을 딱 맞춰 밀어붙이지 않으면 감동의 정도가 '유난히' 확 떨어지는 곡들입니다. 다 좋다가 마지막 코다가 제 마음에 들지않아 한구석에 밀쳐놓은 판들이 여럿 됩니다. 아바도의 연주는 이 점에서도 백점입니다.
녹음은 DG에서 24/96임을 본격광고하는 DDD녹음입니다. 과거 본란에 리뷰했던 음반과 비교할때, 필립스가 내놓은 게르기예프/차이콥스키에 비하면 자연스러움에서 조금 아쉬운 점은 있지만 아바도가 빚어놓은 정치한 앙상블을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이퀄리티 흑백사진을 붙여 만든 카드보드 외장도 매우 고급스럽습니다. 인터넷 사이트에 게재된 이 박스셋에 대한 혹평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 '연주가 외장만큼 된다면 좋겠다는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일 정도입니다.
5장 한셋트로만 팔고 낱장으로는 팔지 않습니다. 지난해 말경 소량 1차 수입이 되었다가 금방 동이 났었습니다. 저는 그때 마지막 남은 물건을 우연히 7만원에 건져 희희락락했었는데 최근 다시 2차분이 수입된 모양이더군요. 어디가서 사셔도 7만원보다는 싸게 사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별은 다섯개 만점입니다. 최근 EMI에서 푸르트벵글러의 베토벤 전집도 복원해 내놓았습니다만, 아바도의 이 전집은 21세기형 전집으로서 필청해야 한다고 추천하는 바입니다.
이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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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도는 이번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녹음하면서 조나단 델 마르(Jonathan Del Mar)가 편찬한 -96,7년경으로 기억합니다만 확실치가 않군요- 판본을 사용했습니다. 아바도에 따르면, 이 판본은 베토벤의 친필 수고가 어떻게 수정되어 왔는지, 또 그 이후의 인쇄본들은 어떤 수정을 거쳤는지에 대한 종합적 연구결과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CD해설지에 수록된 인터뷰에서 아바도는, 이런 판본의 성격 덕택에 자신이 모든 음표와 기호 하나하나를 따져보아 음악적으로 가장 설득력있다고 생각되는 악구들을 골라낼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조나단 델 마르 판본을 따랐지만 일부에서는 '베토벤이 유사한 성격의 다른 악구를 전개해 나간 방식으로 미루어보아' 델 마르의 악보가 맞지 않다고 생각되면 다른 방식으로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원전연주적 성격 또한 이 전집을 말할때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특징입니다. 우선, 아바도는 현대오케스트라보다 훨씬 작은 편성으로 연주를 했습니다. 특히 1번,2번,4번,8번 교향곡의 경우 베이스 3대, 첼로 4대, 비올라 6대, 10대의 제1바이올린, 8대의 제2바이올린만 가지고 연주를 했습니다.
이런 교향곡들의 경우, 베토벤 당대에는 울림이 많은 귀족들의 방에서 실내악처럼 연주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당대의 전례를 따라 작은 편성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악기를 모두 원전악기를 쓴 것은 아닌 것으로 들립니다만, 보잉의 경우는 베토벤 당시의 주법을 재현했다고 아바도 자신이 밝히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음반에서 들을 수 있는 현 파트는 아주 매력적입니다. 카라얀시절과는 또 다른 - 아니 당연히 다른 느낌인데, 매우 상큼하고 날렵하면서도 유려함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아바도 집권(?) 이후 대부분의 단원이 2-30대 다국적군으로 물갈이되었는데 , 그런 탓에 미국의 한 평론가는 "It's not your father's BPO!"라는 재미있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1,2,4,8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베토벤 교향곡 전집의 구매가치 평가 잣대는 의외로 간단할 수 있습니다. 1,2,4,8은 평소에 자주 듣지 않던 것이니 자주 손이 가게 하면 됩니다. 3,5,6,7,9는 끝난 다음에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칠 수 있게 하면 됩니다. 6은 양보할 수 있다 하더라도 3,5,7,9번을 듣고 마지막 총주가 끝난 뒤 기립박수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명연주의 반열에 들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런 기준아닌 기준에 비추어볼 때 이번 box-set은 must-buy입니다.
하이든 교향곡의 색채를 지닌 1,2번은 실내악을 듣는 듯 모든 선율과 화음이 투명하게 드러나면서도 베토벤 특유의 박력을 잘 살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사실 1,2번 교향곡을 들을 일이 별로 없었는데, 앞으로 좀 더 자주 듣게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4번 교향곡도 매우 뛰어납니다. 소편성임에도 불구하고 그정도의 스케일과 박력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소개할 생각인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의 4번(Orfeo)의 위대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훌륭한 연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3번 에로이카는 해외나 국내의 다른 평론을 볼 때, 이 박스 셋 가운데서는 가장 평가가 좋지 않은 곡입니다. 요컨대, 기대만큼 'revolutionary'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장중함, 비탄, 그것을 극복하고 일어선 자의 격렬한 환희 같은 메시지나 감정이 약하다는 류의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5번에 대해서도 정도는 훨씬 덜하지만 비판이 제기될 경우 그 성격은 대략 비슷합니다.
제 생각은, 꼭 그런것만도 아니라는 쪽입니다. 다만, 확실히 아바도의 에로이카는 이를테면 푸르트벵글러와 같은 지휘자들의 연주에 비해 주관적 정서의 개입과 감정이입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앙상블을 극도로 조탁하여 무협지로 치자면 공력의 발출과 수습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고 쾌속한 경지에 이르렀지만 카라얀의 BPO가 갖고있던, 때로는 악마적일 정도의 탐미주의적 성향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특성은 뛰어난 다이내믹입니다. 약음에서 강음으로의 점층적 또는 폭발적 전환이 대단한 스피드와 컨트롤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담백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듣는 이에게 전해줍니다. 6번 '전원교향곡'의 4악장 천둥 장면같은 것은 최고의 4악장으로 꼽는 평론가들이 적지 않습니다.
푸르트벵글러냐 토스카니니냐를 따진다면 제 느낌으로는 토스카니니쪽에 더 비슷한 인상을 주는 연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바도 자신은 푸르트벵글러를 모델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씨디 해설지의 인터뷰에서 아바도는,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 푸르트벵글러는 항상 가장 위대한 해석자였다. 오늘날에는 그의 지휘 가운데 몇가지 점, 이를테면 템포 같은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그는 나에게 가장 위대한 지휘자로서 남아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음표와 모든 악구의 논리적 의미를 발견하여 지휘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토스카니니와도 달랐다. 토스카니니는 뭐랄까, 좀 더 구조적이고 기술적인 면에서 지휘를 잘 했다. 푸르트벵글러쪽에는 들을 음악이 더 많았다.
확실히, 오케스트라에게 있어서 , 앙상블의 측면에서 토스카니니는 가장 위대한 지휘자였다. 그러나 프레이즈의 의미, 또 프레이즈 안에서의 음표 하나하나의 의미, 악보 전체 속에서의 한 음표의 의미가 문제가 될 때, 그것을 지휘하여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는 지휘자는 푸르트벵글러였다. 그리고, 푸르트벵글러는 템포 설정에 있어서 전적으로 자유로왔다."
푸르트벵글러에 대한 이런 존경의 결과일까요. 그래서 나타나는 또하나의 특징은 명확한 프레이징입니다. 외지의 한 평론가는 최근 출시된 귄터 반트의 브루크너 7번과 함께 아바도의 이번 베토벤 사이클을 최고로 명료한 프레이징을 보여주는 음반으로 꼽기도 했습니다.
각 교향곡을 악장별로 뜯어본다면 반대인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아바도가 설정한 템포는 푸르트벵글러보다 빠릅니다.
베토벤 당시의 메트로놈은 기계적으로 결함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베토벤이 자필 악보에 적어놓은 메트로놈 수치는 현대 연주자들의 입장에서 보기에 지나치게 빠르다는 것은 거의 정설처럼 굳어져가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아바도의 주장은 좀 다릅니다.
예를 들어 베토벤이 아다지오 악장에 메트로놈 얼마, 알레그로 악장에 메트로놈 얼마를 처방해 놓았다고 하고 그 악장간의 음악적 상관관계를 들여다보면, 지금까지는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왔던 스피드가 다 이유있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빠른 스피드라는 것은 다루기에 따라 약도 되고 독도 되는 것입니다만, 이 음반에서는 아바도의 오케스트라 장악력과 BPO의 완벽한 앙상블이 결합하여 스피드가 큰 약이 되고 있습니다.
주관적 정서의 이입을 가급적 배제하는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전곡이 모두 긴장과 박진감을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는 것은 스피드와 다이내믹스에 대한 완벽한 콘트롤 덕분으로 보입니다.
7번 교향곡 4악장을 들어보면 이런 특성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7번을 저는 고전주의 시대 아폴로적 질서의 굳은 틀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열정의 혁명적 분출로 이해합니다. 아바도의 4악장은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5번,7번 커플링 음반을 처음 들었을때만큼이나 가슴벅찬 감동과 흥분을 안겨주었습니다. 클라이버 음반이 LP로만 있었고 현재 씨디로는 없는 관계로 AB비교시청을 해보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만, 최고수준의 7번임을 역시 부인할 수 없습니다.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 얘기를 잠시 했는데, 한편으로는 가디너 생각도 납니다. 가디너 역시 빠른 템포와 완벽한 다이내믹을 자랑하는 반면 일부 감상자들로부터는 종교적 깊이가 떨어진다는 비난을 받는데, 아바도의 3,5,7번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이런 부류와 맥을 같이 하니까요.
9번 합창에 대해서는 평단에서도 모두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팽팽한 긴장감, 가슴벅찬 감동, 작열하는 정열, 장중한 스케일 등 모든 요소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이제는 유명하다못해 전설이 되어버린 푸르트벵글러의 51년 바이로이트 녹음에 비견할만한 현대의 절대명연입니다.
유일하게 바랄 점이 있다면 4악장에서 성악파트의 포문을 여는 바리톤이 좀 더 베이스에 가까운 음색이면 좋겠다는 것인데, 가창에는 전혀 무리가 없으며 앙상블도 좋습니다. 마지막 코다도 압권입니다.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그리고 베토벤 9번 합창 등은 마지막 코다에서 모든 파트가 한마음인 것처럼 호흡을 딱 맞춰 밀어붙이지 않으면 감동의 정도가 '유난히' 확 떨어지는 곡들입니다. 다 좋다가 마지막 코다가 제 마음에 들지않아 한구석에 밀쳐놓은 판들이 여럿 됩니다. 아바도의 연주는 이 점에서도 백점입니다.
녹음은 DG에서 24/96임을 본격광고하는 DDD녹음입니다. 과거 본란에 리뷰했던 음반과 비교할때, 필립스가 내놓은 게르기예프/차이콥스키에 비하면 자연스러움에서 조금 아쉬운 점은 있지만 아바도가 빚어놓은 정치한 앙상블을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이퀄리티 흑백사진을 붙여 만든 카드보드 외장도 매우 고급스럽습니다. 인터넷 사이트에 게재된 이 박스셋에 대한 혹평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 '연주가 외장만큼 된다면 좋겠다는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일 정도입니다.
5장 한셋트로만 팔고 낱장으로는 팔지 않습니다. 지난해 말경 소량 1차 수입이 되었다가 금방 동이 났었습니다. 저는 그때 마지막 남은 물건을 우연히 7만원에 건져 희희락락했었는데 최근 다시 2차분이 수입된 모양이더군요. 어디가서 사셔도 7만원보다는 싸게 사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별은 다섯개 만점입니다. 최근 EMI에서 푸르트벵글러의 베토벤 전집도 복원해 내놓았습니다만, 아바도의 이 전집은 21세기형 전집으로서 필청해야 한다고 추천하는 바입니다.
이현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