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켐프는 에밀 길렐스 등과 함께 독일 피아노 음악을 빛낸 위대한 피아니스트였지만 어쩐 일인지 오디오파일들에게는 길렐스만큼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달쯤 전, 우연히 음반점에서 그가 연주한 골드베르그 변주곡(DG 439 978-2)을 발견하고는 대단히 반가웠습니다. 10여년전 그의 바하 평균율 곡집(DG)에서 받았던 감동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베이지색 바탕에 켐프의 얼굴을 데생으로 그린 자켓의 라이센스 LP였습니다.
소박하지만 따뜻하고, 온유하지만 심심하지 않으며, 들어도 들어도 물리지 않는 명반이었습니다. 그때의 감동을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통해 다시 느껴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으로 냉큼 집어들고 왔습니다.
이미 굴드의 연주 2종 (81년 소니 판과 55년 최초녹음), 로잘린 튜렉의 것 2종 (VAI의 것과 90년대 말에 DG에서 녹음한 것)을 비롯, 쳄발로 원전연주는 물론 다른 악기의 편곡 버전까지 합해 20장쯤을 갖고 있지만 그가운데서도 최상급일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켐프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빌헬름 켐프 골드베르그 협주곡 연주의 가장 큰 특징은 페달링이라 할 것입니다. 전곡에 걸쳐서 페달을 아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쳄발로 건반 위를 고양이가 뛰어다니는 듯 탄력이 넘치는 굴드의 터치나 바윗돌같은 튜렉의 터치와 비교하면 켐프의 터치는 좀 무른 듯 하지만, 그 속에 다양한 건반 효과와 온갖 조화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양지바른 마루에 걸터앉아 할아버지가 조단조단 풀어내시는 옛날얘기 한토막을 듣고 있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흥미진진한 서스펜스 영화 한편을 본 것 같은 굴드 연주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동입니다.
장식음(트릴)의 사용은 극히 절제되어 있습니다. 전곡에 걸쳐 나타나는 경향이기도 하지만 특히 첫곡인 아리아가 그렇습니다. 굴드 스타일에 익숙해져 있는 귀에는 뭔가 빼먹고 연주하는 것처럼 들릴만큼 솔직담백합니다. 굴드의 81년 녹음에서는 템포가 굉장히 느리지만 ( 빠른 변주와의 극적인 대조효과를 노린 것이겠죠) 켐프의 아리아는 다소 빠르다고 들릴 정도입니다.
굴드의 템포설정과 켐프의 템포설정을 비교해가며 듣는것도 아주 재미있는 체험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빠른 곡에서는 굴드가 두배쯤 빠르게, 느린 곡에서는 켐프가 두배쯤 빠르게 들립니다.
적극적인 페달링은 1번 변주부터 선보이기 시작합니다. 효과는 유려함입니다. 깊숙히 밟힌 페달은 가볍게 건반을 어루만지는 듯한 터치가 발산한 음을 잇고 끌며 아름답기 이를데 없는 프레이징을 연출합니다. 다소 지나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구사되다가도, 어느 한군데서건 소절의 맺고 끊음에 군더더기를 남기지 않습니다.
액센트를 가하는 방법도 이런 스타일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굴드나 튜렉의 경우 딱딱 끊어치는 액센트가 많습니다. 특히 튜렉 여사의 경우 스타카토를 자주 구사합니다. 반면 켐프의 액센트는 종소리와 같은 울림을 갖습니다.
굴드가 저역건반의 액센트에 체중을 많이 싣고 있는 반면, 켐프 연주에서는 고음건반의 액센트가 더 귀에 들어옵니다. 뭉근하게 몰골법으로 그린 수묵화속에 가끔 운치있는 정자나 소나무 한그루씩을 더해 산세의 능선을 강조하는 식이랄까요.
부드럽게 이어지는 중저음 위에서 청량하게 울리는 고음건반은 그 어느 연주자들의 음반에서보다도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곡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연주자들이 나타내는 정서적 반응을 정리해보면, 굴드는 흥분, 켐프는 중용, 튜렉은 극도의 신중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14번 변주가 되면 곡은 피라밋의 꼭대기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 14번 변주는 연주자별 특성을 가늠해 보기에 아주 좋은 트랙입니다. 여기에 이르러 켐프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로 아주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건반을 공략합니다. 특히 높은 음계에 실린 강세는 찬란한 광휘를 뿜어냅니다. 이런 강온 조절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살살 치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단조로움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피라밋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구조를 비유하기에 꽤 적합한 사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오르락 내리락 하는 정서의 흐름을 갖고는 있지만 구조적으로는 정확히 양분되는 좌우대칭형이거든요.
32개의 트랙 가운데 1과 32는 똑같은 멜로디의 아리아입니다. 중간의 30곡이 이를 변주한 것이죠. 그리고 이 30개는 각각 3개씩 10개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각 그룹의 마무리, 즉 3,6,9,12..로 나가는 번호의 변주는 캐논 형식입니다.
쉽게 말하면 돌림노래 형식이죠. 다만 바흐는 2백여년 뒤 아이들의 음악교과서에 나오는 돌림노래와 자신의 작품이 다른 차원이기를 바랬던 모양입니다. 유심히 듣지 않으면 잘 모르고 지나치기 쉽습니다.
돌림노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반주선율 하나를 깔아두고, 그 위에서 2개 성부의 돌림노래가 전개되는데, 뒤따라 가는 선율은 선행선율과는 매번 조금 다른 모습을 띠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앞선 선율과 뒤따르는 선율간의 시차도 3,6,9..로 변주가 거듭될 수록 점점 커집니다.
이런 수학적 얼개를 숨겨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바흐라는 인간이 징그럽게 느껴질때도 있지만, 어쨌든 골드베르그 연주를 평가함에 있어서는 이런 식의 수학적 구조를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는가도 기준이 됩니다.
보통, 이 부문에 있어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연주자는 로잘린 튜렉일 것입니다. 튜렉의 연주는 천년의 세월을 견뎌낸 신전 건축을 마주 대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물샐틈 없는 바위벽, 견고하기 이를데 없는 성. 그런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아까도 잠깐 말씀드린 바 있지만 굴드를 들으면서 생각나는 단어들은 롤러 코스터 라이드, 급류 래프팅, 뭐 이런 것들입니다. 골드베르그 변주곡의 구조적 아름다움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재미를 만끽하게 해 주는 것이 굴드 연주의 최대 장점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튜렉의 음반에 자주 손이 안가는 것은 이런 재미가 감쇄돼 있기 때문입니다.
켐프의 연주를 듣고 있자면, 'bach'라는 말이 독일어로 '시냇물'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따뜻한 봄 햇살 아래 얼음밑에서 졸졸 흘러나와 점차 큰 내를 이루어가는 시냇물. 세상의 온갖 오묘한 조화를 다 끌어안고 있는 듯한 그런 모습을 켐프의 연주속에서 연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들어도 물리지 않습니다.
기존에 듣던 연주들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이게 웬 파격인가 싶기도 하지만, 사실 켐프는 우리가 요즘 듣는 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도 바흐의 본류를 이은 존재일 것입니다.
1895년에 태어나 1991년에 숨을 거둔 캠프는 프로테스탄트 오르가니스트 집안의 후예이며 (J.S 바흐와 직업이 같지 않습니까! 음반으로 구하기가 쉽지 않지만, 사실 켐프는 오르간 연주회도 많이 가졌다고 합니다.) 11세때 이미 푸가 즉흥연주를 했을 정도로 대위법에 익숙했고, 노년까지도 작곡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전인적 음악인이었습니다.
바흐의 건반작품 (주로 오르간용이긴 하지만)을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로 옮기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부조니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기도 하지요. 음악은 사념과 정서의 표현이라는 낭만주의적 예술관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켐프의 바흐 해석은 매우 자유롭습니다. 바흐가 자신의 건반악기 작품들을 언급할때 사용한 klavier라는 말은 '(넓은 의미의) 건반악기'로 해석되고, 중요한 것은 바흐가 왜 그런 식으로 음표들을 배치하였는지이며, 연주수단이 꼭 쳄발로거나 오르간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켐프는 따라서, 바흐가 몰랐던 악기인 현대의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로도 얼마든지 바흐의 본래 의도를 살려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흐가 살았던 당시의 악기와 연주기법을 사용해야만 본래 의도를 살려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원전연주파와 지향점은 같은데 가는 길은 반대인 셈입니다. 적극적인 페달링은 바로 그런 음악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페달링 외에도 두드러지지 않는 형태로 온갖 테크닉이 다 녹아들어 있습니다. 반복해 들으면서 문득문득 "아, 이래서 老 大家라는 말이 있는 거구나!"하며 감탄하게 되는 곳이 한두군데가 아닙니다.
켐프의 연주는 69년 7월 하노버에서 녹음되어 70년에 발매되었습니다. 요즘 씨디로 구할 수 있는 것은 90년대들어 (94년 추정)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버전입니다. 많은 물량은 아니지만 간헐적으로 매장에 출현하고 있습니다.
마이크로 다이내믹스가 좋은 시스템으로 들을 수록 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누누이 말씀드린 켐프의 연주스타일때문에, 좋은 오디오의 필요성이 굴드 판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사실, 튜렉의 80년대 VAI 녹음은 연주의 위대함에 녹음이 크게 못미칩니다. 그래서 듣는 재미가 적고 손도 덜가는 편입니다 .)
굴드의 골드베르크는 분명 최고중의 최고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흐가 본래 의도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면 아무래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반면, 바흐에게 요즘과 같은 콘서트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그건 아마도 여러개의 해를 갖는 방정식이 되겠지만, 저는 켐프의 연주가 그에 대한 해답 가운데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별 다섯개 만점으로 추천합니다.
(p.s) 굴드의 골드베르그 녹음은 모두 6종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가운데 소니에서 나온 81년 디지털녹음만 가지고 계신 분이 많으실 겁니다. 최근에는 DVD로도 나왔죠. 그런데, 55년 데뷔녹음도 꼭 한번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대함으로 보면 81년 연주보다 떨어지지만 변태성(!)으로 보면 81년 버전을 능가하는 흥미로운 녹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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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지만 따뜻하고, 온유하지만 심심하지 않으며, 들어도 들어도 물리지 않는 명반이었습니다. 그때의 감동을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통해 다시 느껴볼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으로 냉큼 집어들고 왔습니다.
이미 굴드의 연주 2종 (81년 소니 판과 55년 최초녹음), 로잘린 튜렉의 것 2종 (VAI의 것과 90년대 말에 DG에서 녹음한 것)을 비롯, 쳄발로 원전연주는 물론 다른 악기의 편곡 버전까지 합해 20장쯤을 갖고 있지만 그가운데서도 최상급일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켐프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빌헬름 켐프 골드베르그 협주곡 연주의 가장 큰 특징은 페달링이라 할 것입니다. 전곡에 걸쳐서 페달을 아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쳄발로 건반 위를 고양이가 뛰어다니는 듯 탄력이 넘치는 굴드의 터치나 바윗돌같은 튜렉의 터치와 비교하면 켐프의 터치는 좀 무른 듯 하지만, 그 속에 다양한 건반 효과와 온갖 조화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양지바른 마루에 걸터앉아 할아버지가 조단조단 풀어내시는 옛날얘기 한토막을 듣고 있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흥미진진한 서스펜스 영화 한편을 본 것 같은 굴드 연주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동입니다.
장식음(트릴)의 사용은 극히 절제되어 있습니다. 전곡에 걸쳐 나타나는 경향이기도 하지만 특히 첫곡인 아리아가 그렇습니다. 굴드 스타일에 익숙해져 있는 귀에는 뭔가 빼먹고 연주하는 것처럼 들릴만큼 솔직담백합니다. 굴드의 81년 녹음에서는 템포가 굉장히 느리지만 ( 빠른 변주와의 극적인 대조효과를 노린 것이겠죠) 켐프의 아리아는 다소 빠르다고 들릴 정도입니다.
굴드의 템포설정과 켐프의 템포설정을 비교해가며 듣는것도 아주 재미있는 체험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빠른 곡에서는 굴드가 두배쯤 빠르게, 느린 곡에서는 켐프가 두배쯤 빠르게 들립니다.
적극적인 페달링은 1번 변주부터 선보이기 시작합니다. 효과는 유려함입니다. 깊숙히 밟힌 페달은 가볍게 건반을 어루만지는 듯한 터치가 발산한 음을 잇고 끌며 아름답기 이를데 없는 프레이징을 연출합니다. 다소 지나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구사되다가도, 어느 한군데서건 소절의 맺고 끊음에 군더더기를 남기지 않습니다.
액센트를 가하는 방법도 이런 스타일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굴드나 튜렉의 경우 딱딱 끊어치는 액센트가 많습니다. 특히 튜렉 여사의 경우 스타카토를 자주 구사합니다. 반면 켐프의 액센트는 종소리와 같은 울림을 갖습니다.
굴드가 저역건반의 액센트에 체중을 많이 싣고 있는 반면, 켐프 연주에서는 고음건반의 액센트가 더 귀에 들어옵니다. 뭉근하게 몰골법으로 그린 수묵화속에 가끔 운치있는 정자나 소나무 한그루씩을 더해 산세의 능선을 강조하는 식이랄까요.
부드럽게 이어지는 중저음 위에서 청량하게 울리는 고음건반은 그 어느 연주자들의 음반에서보다도 매력적으로 들립니다.
곡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연주자들이 나타내는 정서적 반응을 정리해보면, 굴드는 흥분, 켐프는 중용, 튜렉은 극도의 신중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14번 변주가 되면 곡은 피라밋의 꼭대기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 14번 변주는 연주자별 특성을 가늠해 보기에 아주 좋은 트랙입니다. 여기에 이르러 켐프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로 아주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건반을 공략합니다. 특히 높은 음계에 실린 강세는 찬란한 광휘를 뿜어냅니다. 이런 강온 조절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살살 치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단조로움을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피라밋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구조를 비유하기에 꽤 적합한 사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오르락 내리락 하는 정서의 흐름을 갖고는 있지만 구조적으로는 정확히 양분되는 좌우대칭형이거든요.
32개의 트랙 가운데 1과 32는 똑같은 멜로디의 아리아입니다. 중간의 30곡이 이를 변주한 것이죠. 그리고 이 30개는 각각 3개씩 10개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각 그룹의 마무리, 즉 3,6,9,12..로 나가는 번호의 변주는 캐논 형식입니다.
쉽게 말하면 돌림노래 형식이죠. 다만 바흐는 2백여년 뒤 아이들의 음악교과서에 나오는 돌림노래와 자신의 작품이 다른 차원이기를 바랬던 모양입니다. 유심히 듣지 않으면 잘 모르고 지나치기 쉽습니다.
돌림노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반주선율 하나를 깔아두고, 그 위에서 2개 성부의 돌림노래가 전개되는데, 뒤따라 가는 선율은 선행선율과는 매번 조금 다른 모습을 띠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앞선 선율과 뒤따르는 선율간의 시차도 3,6,9..로 변주가 거듭될 수록 점점 커집니다.
이런 수학적 얼개를 숨겨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바흐라는 인간이 징그럽게 느껴질때도 있지만, 어쨌든 골드베르그 연주를 평가함에 있어서는 이런 식의 수학적 구조를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는가도 기준이 됩니다.
보통, 이 부문에 있어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연주자는 로잘린 튜렉일 것입니다. 튜렉의 연주는 천년의 세월을 견뎌낸 신전 건축을 마주 대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물샐틈 없는 바위벽, 견고하기 이를데 없는 성. 그런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아까도 잠깐 말씀드린 바 있지만 굴드를 들으면서 생각나는 단어들은 롤러 코스터 라이드, 급류 래프팅, 뭐 이런 것들입니다. 골드베르그 변주곡의 구조적 아름다움을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재미를 만끽하게 해 주는 것이 굴드 연주의 최대 장점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튜렉의 음반에 자주 손이 안가는 것은 이런 재미가 감쇄돼 있기 때문입니다.
켐프의 연주를 듣고 있자면, 'bach'라는 말이 독일어로 '시냇물'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따뜻한 봄 햇살 아래 얼음밑에서 졸졸 흘러나와 점차 큰 내를 이루어가는 시냇물. 세상의 온갖 오묘한 조화를 다 끌어안고 있는 듯한 그런 모습을 켐프의 연주속에서 연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들어도 물리지 않습니다.
기존에 듣던 연주들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이게 웬 파격인가 싶기도 하지만, 사실 켐프는 우리가 요즘 듣는 그 어떤 피아니스트보다도 바흐의 본류를 이은 존재일 것입니다.
1895년에 태어나 1991년에 숨을 거둔 캠프는 프로테스탄트 오르가니스트 집안의 후예이며 (J.S 바흐와 직업이 같지 않습니까! 음반으로 구하기가 쉽지 않지만, 사실 켐프는 오르간 연주회도 많이 가졌다고 합니다.) 11세때 이미 푸가 즉흥연주를 했을 정도로 대위법에 익숙했고, 노년까지도 작곡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전인적 음악인이었습니다.
바흐의 건반작품 (주로 오르간용이긴 하지만)을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로 옮기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부조니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기도 하지요. 음악은 사념과 정서의 표현이라는 낭만주의적 예술관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켐프의 바흐 해석은 매우 자유롭습니다. 바흐가 자신의 건반악기 작품들을 언급할때 사용한 klavier라는 말은 '(넓은 의미의) 건반악기'로 해석되고, 중요한 것은 바흐가 왜 그런 식으로 음표들을 배치하였는지이며, 연주수단이 꼭 쳄발로거나 오르간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켐프는 따라서, 바흐가 몰랐던 악기인 현대의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로도 얼마든지 바흐의 본래 의도를 살려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흐가 살았던 당시의 악기와 연주기법을 사용해야만 본래 의도를 살려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원전연주파와 지향점은 같은데 가는 길은 반대인 셈입니다. 적극적인 페달링은 바로 그런 음악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페달링 외에도 두드러지지 않는 형태로 온갖 테크닉이 다 녹아들어 있습니다. 반복해 들으면서 문득문득 "아, 이래서 老 大家라는 말이 있는 거구나!"하며 감탄하게 되는 곳이 한두군데가 아닙니다.
켐프의 연주는 69년 7월 하노버에서 녹음되어 70년에 발매되었습니다. 요즘 씨디로 구할 수 있는 것은 90년대들어 (94년 추정)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버전입니다. 많은 물량은 아니지만 간헐적으로 매장에 출현하고 있습니다.
마이크로 다이내믹스가 좋은 시스템으로 들을 수록 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누누이 말씀드린 켐프의 연주스타일때문에, 좋은 오디오의 필요성이 굴드 판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사실, 튜렉의 80년대 VAI 녹음은 연주의 위대함에 녹음이 크게 못미칩니다. 그래서 듣는 재미가 적고 손도 덜가는 편입니다 .)
굴드의 골드베르크는 분명 최고중의 최고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흐가 본래 의도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일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면 아무래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반면, 바흐에게 요즘과 같은 콘서트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그건 아마도 여러개의 해를 갖는 방정식이 되겠지만, 저는 켐프의 연주가 그에 대한 해답 가운데 하나를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별 다섯개 만점으로 추천합니다.
(p.s) 굴드의 골드베르그 녹음은 모두 6종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가운데 소니에서 나온 81년 디지털녹음만 가지고 계신 분이 많으실 겁니다. 최근에는 DVD로도 나왔죠. 그런데, 55년 데뷔녹음도 꼭 한번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대함으로 보면 81년 연주보다 떨어지지만 변태성(!)으로 보면 81년 버전을 능가하는 흥미로운 녹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