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D 트랜스포트의 기본을 환기시킨 제품
일전에 애호가들과 만나 환담을 하는 자리에서 과연 앞으로 오디오계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 것 같은가, 하는 질문이 나왔다. 사실 요즘은 첨단 유닛이며 전원 케이블 등 다양한 부분에서 개량과 혁신이 이뤄졌지만, 그에 못지않게 발전한 것이 진동 차단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자체 진동을 포함한 이야기다.
예전에 진동 차단이라고 하면, 스피커는 무조건 무거우면 되고, 앰프나 CDP는 두꺼운 대리석 받침을 깔아 주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동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과학이며, 이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선 처음부터 발상을 달리 해야 한다는 것이 최근의 생각이다. 심지어 케이블조차 전류가 흘러갈 때 발생하는 진동까지 차단하려고 노력하지 않은가. 각종 받침대의 경우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 면에서 최근 아날로그 턴테이블의 발전이 눈부신 것은, 바로 이런 진동 문제에 대해 체계적인 어프로치를 이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컨티늄 오디오나 바이거의 제품들을 보면, 얼마나 악전고투하며 진동과 싸웠는지 여실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소개할 CEC의 플래그십 CD 트랜스포트 TL0X의 등장은 자못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많은 애호가들은 CDP에서 중요한 것으로 하면 DA 컨버터부터 생각한다. 특히 스펙에 민감한 분들은 대체 얼마나 업샘플링 혹은 리샘플링했는가부터 따진다. 하긴 요즘은 192kHz/24bit도 모자라 768kHz/24bit까지 업샘플링한 DAC가 나오는 마당이니, 스펙 추종자들은 일단 탄성부터 지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형태의 샘플링 레이트를 늘리는 것과는 반대로 있는 그대로 샘플링을 유지하면서 아날로그 출력단까지 별도의 회로를 꾸미는 회사들도 꽤 된다. 말하자면 44.1kHz/16bit에 담겨진 오리지널 CD의 신호에 충실하자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방식을 추구하는 쪽의 음도 꽤 매력적이다. 본기 역시 일체의 가감 없이 CD의 신호 자체를 DAC에 전달하는 구조다. 요즘처럼 트랜스포트 내에서 1차로 업샘플링해서 DAC에 보내는 방식과는 정면으로 배치되지만, 결국 음이 말하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이쪽 음도 상당히 놀랍다.
일전에 한 애호가 댁에서 TL0X와 다른 멀티 샘플링 트랜스포트를 일대 일로 맞대결을 펼친 바 있다. 여기서 기준을 삼기 위해 턴테이블을 동원했는데, 그 결과 재미있는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멀티 샘플링을 할 경우, 확실히 음장이 커지고, 해상력이 증가한다. 하지만 깊이 면에서는 좀 불만이 있다.
반면 TL0X는 음장이 커지지 않지만 해상력에 별 불만이 없고, 무엇보다 안길이가 엄청 깊어진다. 참고로 삼은 턴테이블로 같은 소스를 걸어보니 정확히 TL0X가 만들어 내는 음장과 안길이를 재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음이 TL0X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스펙의 허실을 새삼 깨닫고 필자는 무조건 업샘플링이나 리샘플링이 우수하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실제 최근에 접한 어쿠스틱 플랜의 CDP나 잔덴의 분리형 CDP 역시 일체의 가감 없이 오리지널 신호에 충실한 발상으로 만들어졌는데, 매우 아날로그적이며 자연스러워서 이런 쪽의 접근 역시 설득력이 있다고 깨달았다.
물론 오르페우스의 헤리티지 DAC가 연출하는 가공할 만한 음장과 해상도, 투명함을 생각하면 이쪽 또한 버릴 수 없는 매력이 가득하지만 말이다. 결국 어떤 방식을 택하던 음으로밖에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어쩌면 앞으로 애호가들은 이런 두 가지 방식을 동시에 구입해서 그 비교를 하며 음악을 듣는 일도 발생할 것이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본기가 연출하는 음을 매우 좋아한다. 실제 이런 비교를 하기 전에도 이 제품은 여러모로 필자의 관심을 끌었다. 물론 생김새로만 말하면, 이렇게 못생긴 CD 트랜스포트가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심하다. 무슨 공작 기구처럼 생겨서 공장 한 구석에 덜렁 놓여 있을 포름이라 해도 좋다.
하지만 차분히 살펴보고, 좀 만져보고 또 두드려 보고 하면 굳이 이쪽 분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지 않아도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본기를 제작했는가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인 바로 진동의 대책. 결국 CD 트랜스포트라는 것이 일종의 턴테이블인 만큼, 아날로그 턴테이블에서 쌓은 노하우가 적극 발휘될수록 좋은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다. 다행히 CEC는 어마어마한 턴테이블을 만들어본 경력이 있는지라, 이쪽 분야에 대한 접근성은 상당히 용이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본기는 크게 세 개의 새시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본체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상단의 트랜스포트부와 하단의 모터 및 동작부다. 그리고 별도의 전원부가 제공된다. 참고로 본체와 전원부는 1.5미터짜리 DC 케이블로 연결되는데, 이는 그만큼 거리를 떨어트리라는 뜻이라 한다. 만일 본기를 리스닝 룸에 설치할 경우 이 점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본기의 핵심이 되는 트랜스포트부는 일종의 3점 지지로 공중 부양되어 있다. 이 3점은 세 개의 기둥을 말하며, 그 내부를 보면 세 개의 스프링과 두 개의 고무로 이뤄져 있다. 다분히 스프링으로 장력을 늘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장력을 적절히 자체 흡수할 수 있도록 고무 댐핑을 한 것이다.
트랜스포트부 자체는 육각형의 모습을 띠고 있는데, 윗부분이 20밀리, 아랫부분이 10밀리의 알루미늄 패널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안에는 30밀리 두께의 드라이빙 메커니즘이 포진해 있는데, 일체의 자성을 띠지 않는 물질로 만들어져 있다.
내부를 보면 픽업을 중심으로 CD를 끼우는 스핀들이 있으며 그 양쪽으로 벨트와 연결된 회전축이 있다. 말하자면 양쪽에서 두 개의 벨트로 회전축을 돌리는 방식이다. 이는 아날로그 턴테이블에서 고양된 기술력을 발휘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하나의 벨트로 돌리는 것보다는 훨씬 안정적이고, 진동이 덜하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