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오디오를 분류하는 기준이 여럿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크게 사실주의와 낭만주의로 구분하고 있다. 전자는 소스에 담긴 정보를 최대한 원래 상태 그래도 재생하기 위해 테크놀로지를 완비해가는 쪽이며 반면 후자는 오디오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보고 어떤 소스건 설계자의 사상에 맞게 필터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흔히 전자를 하이엔드, 후자를 빈티지 하는 식으로 구분하지만 꼭 그게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화제의 중심은 웨스턴 일렉트릭(WE)으로 간다. 크게는 오디오의 시조이며 일종의 알파와 같은 존재지만, 의외로 사실주의 경향이 강해 그냥 빈티지로 분류하기엔 애매한 감이 있다. 물론 여성 보컬이나 실내악에서 독특한 향기 같은 것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별다른 착색 없이 정확하게 소스에 담긴 정보를 끄집어낸다. 그래서 다른 빈티지 제품들과 달리 오랜 사랑을 받지 않는가 싶다.

 

 

《 G.I.P 5005 스피커 시스템 》

 
당연히 많은 메이커들이 앰프며 스피커에서 WE의 복각을 시도했고, 일부는 좋은 평을 얻기도 했다. 특히 일본에는 이런 부류의 회사들이 많아, 작은 공방 같은 곳까지 추적한다면 그 리스트가 꽤 된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GIP는 여러모로 타 회사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WE의 유산을 남김없이 흡수하면서도 당시의 기술적 한계를 극복해 그보다 더 뛰어난 제품을 감히 만들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WE의 사실주의적 경향을 훨씬 발전시켜 현대 하이엔드 못지않은 스펙을 구현한 점은, 긴 오디오 역사에서 상당히 특필할 만한 사건이라 보인다.
 
여기서 잠시 GIP의 강점에 대해 생각해봤다. 이는 WE와 공통되는 것으로, 결국 요리로 치면 매우 훌륭하고 순도가 높은 소재를 이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마 미식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금세 알겠지만, 처음에는 입맛을 자극하는 음식들을 찾게 된다. 강한 양념에 짙은 풍미를 찾아 숱한 맛집을 전전한다.

그러다 어느 정도 음식에 대해 알게 되면 결국 재료에 시선을 돌려, 철따라 바뀌는 채소와 생선을 찾게 되고, 더욱 순도가 높은 소재를 구하게 된다. 오히려 이런 경우 요리사가 손댈 부분은 적어지는 아이러니도 있다. “요리는 대부분 자연에서 주는 것으로 해결합니다. 제가 관여할 부분은 극히 적지요.”일본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모 요리사의 언급은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다.

 

 

《 4181 우퍼 》

 

GIP의 제품을 접하고, 공장을 탐방하고, 제작자와 인터뷰하면서 느낀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여타 빈티지 기기들을 압도하는 WE의 강점이라는 것도 새삼 느꼈다. 스피커 메이커인 GIP의 경우, 그 중심은 유닛에 있다. 물론 유닛만으로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지만, 네트웍이나 인클로저에 비해 유닛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최상의 소재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좋은 소재에다 그 강점을 최대한 살리는 요리 방법 역시 흥미를 끈다. 여기서는 일반 코일이 아닌 전자석을 사용해서 훨씬 순도와 속도를 높였고, 이를 3극관으로 구동한다는 메리트를 더했다. 즉, 기존의 오디오와 비교해보면 최대한 군더더기를 뺀 셈이니, 오로지 소재의 맛으로만 승부하는 고급 레스토랑을 연상케 한다. 미슐랭 쓰리 스타급인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최상의 유닛이 아니면 불가능한 접근법이기도 하다. 만일 약간이라도 하자가 있으면 그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장치들을 쓰기 시작하면 결국 덕지덕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음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유닛에서부터 승부를 걸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제조 과정에 대해선 일차로 탐방기에 적어놨으니, 궁금하면 그 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또 앞으로 기회가 되면 각각의 제조 공정을 자세히 추적해보고 싶기도 하다. 실제로 주물을 어떤 식으로 하는지, 페이퍼 콘지는 어떻게 만드는지 아무튼 궁금한 게 아직도 많다.

 

 

《597 트위터》

이 자리에서 GIP의 유닛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그 과정에 드는 비용이 엄청나 어쩔 수 없이 제품 단가가 비싸지는 부분도 납득이 간다. 다행히 이 회사의 제품을 신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 미국, 이태리, 독일, 네덜란드, 브라질, 프랑스 등 다양한 나라에 수출이 이뤄지고 있다. 최근 뮌헨 하이엔드 쇼에서 특히 강한 임팩트를 심어줘 전시된 제품 모두를 판매하고 새롭게 주문을 받았다고 하니, 요즘의 시장 상황을 볼 때 대단한 성과라 하겠다.
 
그래서 더욱 GIP의 여러 제품을 듣고 싶었던 차에 이번 공장 탐방으로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 당연히 제품 리뷰도 뒤따르게 되었던 바, 그간 주로 하이파이 클럽 시청실에서 행하던 작업을 일본 현지에 가서 진행한다는 상당히 이색적인 이벤트가 벌어지게 되었다. 아마 이런 일은 하이파이 클럽 역사상 최초가 아닐까 싶다.
 
여기서 주로 소개할 것은 7000 시리즈의 제품이다. 정확히 7396이란 모델이다. 7396으로 말하면, 가미노야마에 있는 스즈키 신이치씨의 자택 3층에 있는 시청실에서 처음 듣고, 이후 야마가타에 소재한 전문 시청실에서 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좁고 답답한 신이치씨 자택의 시청실이 꽤 훌륭한 음향을 냈다는 점이다. 전문 시청실은 정확한 계산과 다양한 흡음, 분산재를 설치한 본격적인 공간인 점을 감안할 때, 이 부분은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자택의 경우 스피커 사이에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놓여 있어서 일단 신이치씨가 가볍게 연주하고, 스피커로 재생되는 피아노 음을 비교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똑같은 컨디션이 아니라 뭐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피아노의 터치나 울림, 여운 등 여러 표현 요소들이 상당히 실제음에 근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제작자 본인이 피아니스트 출신인지라, 다양한 실연의 경험이 스피커 제조에 충분히 발휘되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제작자가 직접 피아노를 치고 또 오디오로 들려주는 경험도 흔히 않아 두고두고 뇌리에 남을 것 같다.

 

여기서 우선 7396부터 소개하겠다. 매칭된 앰프는 역시 GIP에서 제작한 프리 파워가 동원되었는데, 파워로 말하면 300B를 푸시풀로 구성한 것이다. 소스는 와디아 6.

 

첫 곡으로 들은 것은 너무나 익숙한 오스카 피터슨의 "YOU to Me Good Look". 익히 아는 소스라 생각했지만, 역시 일단 귀를 사로잡은 것은 실연을 방불케 하는 음향이다. 이 부분에서 대형기에다 혼 타입 스피커라는 장점이 넉넉히 드러났다.

힘 안들이고 치는 더블 베이스의 깊이는 상상을 초월하고, 드럼은 풀 세트가 나타나며, 피아노의 영롱함과 아름다움은 특필할 만했다. 특히, 더블 베이스를 치는 레이 브라운의 흥얼거림이 상당히 리얼해서 누가 따로 스피커 옆에서 효과음을 넣지 않나 싶었다. 중간에 점차 속도가 빨라지면서 치열하게 앙상블이 전개될 때의 짜릿함은 필자를 어느 재즈 클럽에 이동시킨 듯한 체험을 하게 했다.

 

이어서 야신타의 "AND Sing Angels the"을 들었다. 이 역시 자주 들은 곡이라 금세 본 기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가운데 정확히 드럼과 보컬이 정위한 부분이 포착되고, 더블 베이스의 음량이며 재생 대역폭이 상당해서 다이내믹 레인지가 크고 또 가볍게 둥둥둥 공간을 움직였다. 보컬로 말하면 특유의 섹시하면서 부드러운 느낌이 잘 살지만, 동시에 뱃심이나 숨소리 등도 잘 포착되어 살아있는 여성이 부른다는 기분이 확 들었다. 중간에 솔로를 펼치는 테너 색스는 강하게 액센트를 주는 텅잉 테크닉이 짜릿하게 임팩트를 줘서 이 또한 깜짝 놀라게 했다.

   

이음새를 느낄 수 없는 유연함이 돋보이고, 정교하게 맞춰진 위상 덕분에 스피커가 하나의 유닛으로 이뤄진 듯 일체감이 대단하다. 무엇보다 바이올린의 디테일한 표현이 압도적이어서, 이 작은 악기가 내는 다양한 임팩트와 다이내믹스가 귀에 쏙쏙 잡힌다. 
  

 

사실 이곳 시청실은 거의 20평에 달한다. 그럼에도 정확히 음이 전달되고, 일체 피곤함이 없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조금만 볼륨을 올려도 그 차이가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거북스럽지 않다. 결국 오디오는 큰 방에서 대형 혼 시스템을 울리는 로망이란 말인가?
 
아날로그를 들은 김에 한 곡 더 골랐다. 에디 히긴스와 스콧 해밀턴이 함께 한 "YOU'D to Home Come Nice so Be". 여기서 해밀턴은 현대 테너 연주자지만 빅 밴드 시절의 이디엄을 선호해, 마치 모던 재즈 이후의 역사는 깡그리 무시하는 듯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단아하고, 멜랑콜리한 에디 히긴스의 피아노가 가세했으니 그 결과는 당연한 명연.

 

 

《 웨스턴 594 드라이버 내부 부품 》

 

우선 명랑하고, 발랄한 리듬이 귀에 들어온다. 역시 아날로그의 장점이 잘 살아나 음 하나하나에 에너지와 기백이 넘친다. 그리운 스윙 풍의 반주에 얹히는 피아노의 터치는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하고 또 산뜻하다. 연주하면서 흥얼거리는 에디의 모습은 눈을 감으면 바로 여기에 있는 듯하다. 거기에 더해지는 구수한 테너 색스 플레이. 네 연주자의 위치가 명확하고, 각 악기의 존재감이 빼어나 이 훌륭한 룸과 오디오가 더욱 돋보인다.
 
결국 이 상태에 이르면 사실주의와 낭만주의 모두를 아우르는 멋진 재생이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 같아선 이 공간을 일종의 관광 코스로 만들어서 전세계 오디오파일들이 아무 때나 와서 들었으면 싶다. 그 정도로 강한 인상을 받은 만큼, 향후 한국에서 이런 제품을 들을 기회가 있다면 절대로 놓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혼, 3극관, 아날로그 ... 오디오파일의 최고 로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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