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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모니터링한 스피커들 중에 인상적인 제품이 세 종 정도 떠오른다. 제일 먼저 달리의 에피콘 6가 있고, 아방 가르드의 우노 G2도 있으며, 이번에 리뷰하게 된 쿼드의 ESL 2812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각각의 제조법이나 스타일이 다르다는 것이다.

에피콘 6로 말하면, 전통적인 박스 스타일에 일반 콘 유닛을 장착한 형태다. 우노 G2는 혼 스타일이지만, 컴프레션 드라이버 대신 일반 콘을 쓴 점이 특이하다. 그래도 혼 타입으로 분류할 만하다. 이번의 2812로 말하면 정전형(Electrostatic)이다. 다시 말해 이 세 종의 스피커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데도, 그 음이 각각 매력적이고, 침투력이 강해서 계속 뇌리에 남는다. 참, 내 취향이 잡식성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어쨌든 흥미롭다.

그런데 여기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음의 성격은 대략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일단 무시무시한 해상력을 들 수 있다. 아직 정식으로 발매되지 않았지만, 향후 브라질 월드컵에서 공론화될 4K의 영상을 보는 수준이라고 할까? 또 하나는, 이런 성과를 얻기 위해 나름대로 고도의 기술적 완성도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에피콘 6는 새로운 드라이버의 개발로, 우노 G2는 혼과 콘의 조합에 완벽한 우퍼의 구동을 이룩한 점에, 그리고 2812는 정전형의 단점을 극적으로 커버한 데에 그 우수성이 있다 하겠다.

정전형이라는 컨셉이 처음 구현화된 것은 저 멀리 1957년이다. 당시 스피커의 수준을 생각할 때, 이 제품을 듣고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특히, 스피커 제조사들이 놀라서, 대체 앞으로 우리는 뭘 먹고 살아야 하나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바로 그런 ESL 콤플렉스 덕분에 스피커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도 했으니, 이래저래 역사적인 제품이라 할 만하다. 이 모델은 63년에 프로 버전으로 진화한 바 있다.

 

대략 여기까지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쿼드의 정전형 스피커라 하겠다. 사실 이 두 모델은 아직도 인기가 높아, 지금도 중고 장터에 가보면 매물을 찾는 이들이 많고, 수리에 자신있다는 고수가 출현하기도 한다. 이런 사정은 외국도 마찬가지여서, 뮌헨에서 열리는 하이엔드 쇼에 가보면, 토렌스 턴테이블이니 뭐니 수리에 자신이 있다며 나오는 스위스 회사가 있는데, 그들의 최대 세일즈 포인트는 바로 ESL의 점검 및 수리다.

그럼 여기서 대체 왜 ESL 시리즈가 높은 호응을 얻었는가 그 이유를 따지고 들 만하다. 우선 언급할 것이 해상도. 과연 인클로저의 속박을 벗어났을 경우, 얼마나 스트레스 없이 음이 쏟아지는지는 생각보다 놀랍다. 특히, 중고역의 다채로운 음성 정보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LP나 CD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다. 단순이 음이 또렷한 것 뿐 아니라, 그 주위를 감싸는 공기감이나 기척감, 잔향 등이 정말로 풍부하게 드러난다.

또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구현되는 스테레오 이미지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오케스트라 음악을 들으면, 각 단원의 위치는 물론 앞뒤의 거리, 무대의 크기 등에, 높이라는 요소도 정확하게 끄집어낼 수 있다. 눈을 감으면 바로 현장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단점도 눈에 띈다. 무엇보다 허전한 저역을 꼽을 수 있다. 저역이 아예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나, 뭔가 막힌 속을 확 뚫어줄 만한 쾌감이 없다. 특히, 우리 나라의 애호가들은 강력한 저역에 대한 욕구가 많은 듯해서, 이 부분이 보상되지 않으면 바로 고개를 돌린다.

또 하나는 내구성 문제. ESL 하면 거의 트러블 메이커라고 인식될 정도로, 이 부분에 대한 신뢰를 얻기 힘들다. 특히 습기에 민감한 점은, 우리네 환경이 갖는 독특한 성격이니 이민을 가지 않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사실 이 두 번째 부분은 내게 큰 의문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실제로 영국에 가보니, 심하다 할 만큼 비가 자주 왔기 때문이다. 겨울에도 가보고, 봄에도 가봤지만 늘 우중충한 상태에서 부슬부슬 기분 나쁜 비가 내렸다. 여행자에게 최대의 적은 감기와 어둠 그리고 비(雨)다. 만일 이 세 가지 요소가 한꺼번에 들이닥친다면 관광이고 뭐고 다 물 건너 가는 것이다. 특히, 사진 찍는 것을 즐겨하는 나는, 우중충한 하늘만 봐도 원망스럴 지경이다.

그래서 일전에 IAG를 방문했을 때, 피터 커마우에게 이 부분에 대해 물었다. 실제로 너희네 영국은 늘 비가 오는데, 왜 이 스피커가 습기에 취약한지 모르겠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기본적으로 영국은 건조하다. 심지어 비가 와서 습기를 걷어낼 정도다. 반면 아시아 지역은 기본적으로 습기가 많다. 이는 단순히 비가 자주 오냐 안 오냐의 차원이 아니다. 듣고 보니 수긍이 좀 갔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은, 이번에 소개할 2812가 바로 이런 단점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나왔기 때문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저역과 내구성에 관한 한, 확실히 진일보한 면이 보이고, 거기에 기존에 갖고 있는 장점도 극대화되어 가격대비 상당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하겠다.

사실 하이엔드 제품을 쓰는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비용이다. 컴포넌트 각각의 가격도 문제지만 더 큰 에로 사항이 있다. 만일 하나의 제품을 들인다고 하면, 나머지 부분을 모두 교체해야 하니까. 뭐, 이는 어쩔 수 없다. 계속 통장의 잔고를 확인하는 수밖에. 그런 면에서 본 기는 하이엔드 제품치고는 그리 비싸지 않으면서 앰프에 관한 한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참 기특하다.

일전에 IAG를 방문했을 때, 본 기의 상위 모델인 2912를 쿼드의 진공관 파워로 구동하는 것을 봤다. 아주 소출력 파워인데도 불구하고, 2912를 넉넉하게 휘어잡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는 다시 말해 아주 예산을 줄인다면, 시중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중고 쿼드 세트로도 충분한 것이다. 하이엔드 메이커에서 나온 50~100W의 파워라면 두 말할 나위가 없고.

당시 피터 커마우를 만났을 때, 본 기의 개량 포인트를 세 개로 압축해서 설명해줬다. 이 부분이 바로 여태껏 ESL을 구입할 때 망설였던 부분을 납득시키는 포인트와 통하기 때문에 다시 소개하기로 하겠다.

 

우선 메카니컬한 부분이다. 전작들에 비해 프레임이나 브레이스 등 여러 면에서 개량이 이뤄졌다. 프레임으로 말하면 훨씬 강도가 높아지고, 윗 부분에 댄 브레이스 역시 철제로 단단하다. 덧붙혀 뒷부분에 바를 대어 뒤로 넘어가는 위험을 커버한 점도 꼽을 만하다. 실제로 본 기는 3도 정도의 기울기를 갖추고 있는데, 이는 타임 얼라인먼트에 관계된 조치로 이해하면 된다.

둘째는 전기적인 부분이다. 이전 모델들에 비하면 훨씬 강한 전압을 걸어주는 게 특징이다. 무려 5KV나 한다. 이럴 경우, 자디 잔 전기적 트러블을 커버하는 강점을 갖는다.

마지막으로 PCB에 관한 것이다. 본 기는 통전을 시켜서 구동한다. 당연히 파워 서플라이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 부분에 관한 개량이 치밀하게 이뤄진 것이다.

 

한번 상상을 해보자. 가장 이상적인 스피커는 무엇일까? 실연을 생각하면, 그냥 공기를 움직이는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악기가 바로 공기를 진동시켜 우리의 귀에 와 닿는 것이다. 스피커의 경우, 이런 원리에 가장 근접한 것이 바로 본 기라 하겠다. 이를 위해 동원되는 진동판은 필름을 사용한 것인데, 그 두께가 사람의 머리카락보다 10배나 얇다. 한 마디로 본 기는 공기 그 자체를 움직이는 스피커라 해도 무방하다.

구조를 보면 아주 심플하다. 이 얇은 진동판을 앞 뒤로 동으로 제작된 프레임이 지지하면서 각각 플러스 및 마이너스 신호를 흘려서 구동시키는 방식인 것이다. 말로는 쉽지만, 이를 상품화하기엔 엄청난 난맥이 도사리고 있다. 이번에 소개할 제품의 유니크함은 바로 이런 기술적 트러블을 하나하나 극복하고 만들어진 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기의 시청을 위해 이번에는 좀 강력한 파워를 걸었다. 바로 VTL에서 나온 MB 450으로, 확실히 그 장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어느 스피커 못지 않는 강력한 저역으로 보답했으니 말이다. 참고로 프리는 역시 VTL의 TL6.5이고, 소스는 메리디언의 MS600을 동원했다. 시청 트랙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베토벤 《교향곡 5번 1악장》 카를로스 클라이버 (지휘)
-안네 소피 무터 《카르멘 판타지》
-브랜도프 마살리스 《Rip Tip Johnson》
-도어스 《When the Music's Over》
 
우선 베토벤을 듣고 놀란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테마가 다양한 악기군을 통해 여기저기 출몰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스피커가 놓인 쪽이 거대한 벽으로 상정되면서 다양한 포인트에서 테마가 출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방대한 사운드 스테이지와 깊이는 물론이고, 높이 또한 표현되어야 하는데, 그 대목에서 깜짝 놀랐다. 또 각각의 음이 일체의 끌림이나 엉킴이 없이 쑥 나왔다가 바로 사라지는 점에서 확실히 인클로저에서 벗어난 스피커의 장점이 잘 부각된다. 저역의 재생도 만족스러워서 팀파니를 두드리는 음에 강력한 압박감을 수반한다.

무터의 연주는 정말로 기세가 좋고, 고역에서 한계를 모르는 질주는 강력한 쾌감을 동반한다. 또 바이올린의 음색 자체가 매혹적이어서, 그 음만으로도 취할 지경이다. 기본적으로 이 스피커는 정확하면서 아름다운 음을 갖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바이올린의 연주시 동원되는 다양한 테크닉을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는 듯 세밀하게 포착하면서, 악단의 움직임이나 스케일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와, 곡이 가진 스페내쉬한 열정과 어우러져 인상적인 재생을 펼치고 있다.

 

마살리스의 연주에는 특별히 존 리 후커가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게스트로 초대되었다. 바로 그 깊은 손맛이 세련된 재즈 뮤지션들의 연주와 어우러져 멋진 세션을 연출한다. 당연히 음량이 작은 기타의 음을 다른 악기들과 적절히 밸런스를 맞추는 솜씨가 필요한데, 이 부분에서 노련한 엔지니어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중간에 펼쳐지는 솔로는 강력한 흡인력을 갖는다. 자연스런 통 울림에 지판을 잡는 부드러운 손길의 움직임까지 정말로 일목요연하다. 여기에 마살리스의 소프라노 색소폰이 갖는 관능적인 음색이 더해져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도어스의 연주는 60년대 말의 열악한 스튜디오 환경을 그대로 드러내는데, 바로 그 점에서 록 특유의 거친 맛을 즐길 수 있다. 오른쪽 채널을 점한 드럼의 경우, 손발의 놀림이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하게 부각되며, 가끔씩 어택하는 킥 드럼의 존재감이 각별하다. 왼쪽 채널의 올갠은, 베이스까지 겸하고 있는 바, 그 특유의 울림이 다소 몽환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음울하면서 야성적인 모리슨의 보컬에 이르면, 강력한 마성을 느낄 수 있다. 사실 정전형과 록은 어딘지 맞지 않는 조합이라 느껴지지만, 여기서는 전혀 어색하지 않다. 아무래도 충분히 저역이 뒷받침된 데다가 세밀한 표현이 능수능란해서 그런 것이며, 그런 면에서 일종의 감상용 음악으로 다가온다. 적은 예산으로 하이엔드를 지향한다고 하면 분명히 권해줄 만한 스피커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