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하이엔드 AV 세계로 입문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 길이 있다.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무작정 나아가는 것도 그 방법 중 하나이다. 이 방법이 통한다면 기분 좋은 일이겠지만 반대로 매우 위험하기도 하다. 당신이 부지런하거나 인내심이 있다면 이 방법은 하이엔드 오디오의 모든 것을 매우 빠르게 섭렵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비싼 제품이 좋은 성능을 내준다는 점에서 좋은 제품을 갖출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자신의 수준이나 경험이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돈을 쓸 경우 하이엔드라는 가면을 뒤집어 쓴 조악한 제품에 정말 하이엔드격의 자금을 쏟아붓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편, 또 다른 이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자금으로 하이엔드에 입문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이들은 자신의 현재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 가는 방법을 통해 자금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이들은 시청능력이 하이엔드 제품을 누릴 만큼 향상될 때까지 사용하기를 유보한다.

후자를 택하는 이들에게 클라세 오디오의 새로운 모델 SSP-30 Mk.II 프리/프로세서가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제품은 초고가 하이엔드 기기 회사가 만드는 저렴한 엔트리 모델이다. 초고가 제품들이 가지는 화려한 기능이나 부품을 채용하고 있지 않지만 3,000불이라 하기엔 너무도 당당한 성능을 가지고 있다. 프리/프로세서의 표준적인 기능들 외에 고가 제품의 기능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 기능들이 하이엔드의 세계로 입문하는 시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부품을 살펴보면 다른 제조사의 고급기종과 저가기종처럼 상급기기와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사용된 모든 부품은 이러한 부품들을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이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고가 제품을 설계하는 엔지니어들이라고 해서 저가의 모델에서 좋은 성능을 구현하는 방법을 모를 리 없고, 하이엔드 제조사의 개발부서는 보통 소규모이기 마련이다. 따라서 경험 없는 엔지니어가 저가 제품을 담당하는 식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필자라면, 실력 없는 엔지니어가 만드는 고가 부품의 제품보다는 제대로 된 엔지니어가 중가 부품으로 만드는 제품을 선택할 것이다.

SSP-30의 기능들은 다른 프리/프로세서보다 다양하지는 않지만, 그리 다양하지 않은 기능들을 충분히 만회할 수 있는 성능을 가지고 있다. SSP-30은 서라운드 디코더로서의 완벽한 기능, 돌비 포맷(EX, Digital 5.1, 프로로직 II Movie, Music)가 dts(ES matrix, 5.1, Neo:6)를 지원한다. 하지만 THX 포스트 프로세싱 기능은 생략되어 있다. 클라세는 DSP 모드를 최소한으로 운용하고 있지만 채용된 DSP, 예컨대 5채널 스테레오 모드의 성능은 매우 뛰어나다. 외부의 24/96 디지털 신호는 DSP를 바이패스하고(스테레오와 모노 가능), 24/96 D/A 컨버터가 내장된 프론트 채널로 재생한다.

디지털 입력은 4개의 동축, 2개의 광단자, 흔하지 않은 AES/EBU 입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날로그 입력단은 바이패스 되지 않는 11개의 스테레오 입력과 바이패스가 되는 8채널의 입력으로 구성된다. 오디오 출력은 4개의 아날로그 스테레오 출력과 광단자 디지털 출력으로 되어 있다. 비디오는 각각 6개의 콤포지트 입력, S-video 입력, 3개의 S-video 출력, 4개의 콤포지트 출력으로 구성되며, 각각의 출력으로는 OSD를 선택할 수 있다. 컨트롤은 RS-232C 포트와 2개의 적외선 수신, 3개의 트리거가 있다.

생략된 입출력단 중 아쉬운 부분은 밸런스 출력과 콤포넌트 비디오 스위칭 기능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콤포넌트 비디오 스위칭 기능은 이 가격대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실 이 가격대에서 밸런스 입출력단을 갖춘 제품은 없지만, 콤포넌트 스위칭이 없어서 느끼는 아쉬움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이 기능 역시 이 가격대 기기에서 반드시 구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격을 고려하면 SSP-30의 짝은 2,200불인 CAV-75가 맞겠지만, 새로 출시된 4,500불짜리 CAV-180을 연결했다. 채널당 75W의 CAV-75와 달리 CAV-180은 채널당 180W의 5채널 앰프이다. CAV-180에는 밸런스 입력도 있는데 SSP-30에서는 쓸모 없지만 상급기인 SSP-60과 SSP-75와의 사용하면 장점이 될 수 있다. CAV-180은 입력과 출력 모두 완벽한 밸런스 구조이다. 물론 싱글 엔디드 RCA 입력 단자도 있는데, 이것은 5개의 스피커 와이어 고정 단자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부분이다.

내부를 열어보면 왜 43.4x24.1x54.6(WHD, cm)라는 큰 크기에 무게가 44.5kg이나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데, 1,000VA의 용량을 가지는 거대한 토로이달 트랜스와 22개의 캐패시터가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최상급기 모노블록 앰프와 같이 클라세는 큰 용량의 캐패시터를 소량 사용하는 중앙 집중식 보다는 작은 용량의 캐패시터를 다량 사용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을 택한 의도는 파워가 필요한 곳 가까이에 캐패시터를 집중해 속도감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클라세는 이러한 디자인을 통해 다이내믹스의 증가와 전단에 걸친 고정밀 전압 통제를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SSP-30/CAV-180 세트의 설치는 매우 빠르고 쉬웠다. OSD 메뉴는 매우 직관적이고 편했다. 리모컨은 최고의 디자인이라 말할 수 없지만 매우 효율적이고 논리적이다. 매뉴얼 역시 필요할 때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잘 구성되어 있다. 스피커는 최근 중가대에서 좋은 성능을 보이고 있는 B&W CDM 시리즈와 보스턴 어쿠스틱스의 VR-M 시리즈를 사용했다. 소스는 가격대을 고려해 온쿄의 DV-SP800 SACD/DVD 오디오 플레이어와 클라세의 CDP.3 CD 플레이어를 연결했고, 가격으로서는 도저히 매칭될 수 없는 크렐의 DVD Standard 플레이어도 연결해 보았다.

가격이야 어떻든 필자는 클라세의 제품이 늘 뛰어난 음악적 성능을 구현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SSP-30/CAV-180 세트 역시 이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먼저 연결된 B&W 시스템을 듣고 소리의 정확성과 자연스러움에 만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Paco de Lucia의 "Live in America"에서 기타의 타격음은 부드러우면서도 생생했다.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두 느낌이 매우 독특하게 어우러졌다. 필자가 SSP-30에 대해 처음 갖게 된 생각은 공간감이나 다이내믹 임팩트가 좀 적다는 느낌과 함께 소리의 경향이 어둡다는 점이었는데, 이는 저가 프리/프로세서의 지나치게 밝고 공격적인 성향과는 반대였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보스턴 어쿠스틱스 스피커로 바꾸면서 달라졌다. 스피커의 특성상 B&W는 부드러울 뿐 아니라고 소리가 뒤로 물러나는 경향이므로 클라세와의 조합에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매우 편한 소리를 만들어 냈지만, 다이내믹한 부분에서는 펀치감과 공간감이 때로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보스턴의 좀더 공격적인 중역대는 SSP-30과 조화를 이뤄(중역대가 부각되는 것은 아니며 중역대에서 약간의 감쇄가 있는 B&W에 비해 좀더 평평한 주파수) 따뜻함과 생생함을 동시에 재현했다. 핑크 플로이드의 'Another Brick in the Wall'은 보스턴의 스피커로 들을 때 라이브의 느낌을 더욱 살리면서도 통제된 소리를 들려주었다. 고해상도 포맷 음악의 경우 SSP-30은 스피커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고 멀티채널의 특성은 CAV-180의 성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많은 정보량이 SSP-30/B&W 조합의 소리에 개방감을 주고 넓은 무대를 재현함으로써 음악은 좀더 공간의 느낌을 살려냈다. 그에 따라 B&W는 자신의 장점인 따스함과 함께 자연스러움을 살려냈는데, 여전히 보스턴의 스피커가 좀더 좋은 소리를 들려주었지만 그 차이는 많이 좁아졌다.

 

무엇보다도 SSP-30은 프리/프로세서로서는 가장 기본적인 역할에 매우 충실하다. 즉, 자신은 사라지고 오직 스피커의 특성만남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클라세의 고가 제품들처럼 좀더 소리를 좋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 저가형의 기기를 발견한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특성은 SSP-30의 8채널 멀티채널 아날로그 입력단에서만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24/96 DAD 타이틀인 머디 워터스의 'Folk Singer'의 경우에도 크렐에서 디지털 입력으로 들어온 신호를 SSP-30의 DAC는 음의 변형이나 왜곡 없이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My Home is in the Delta'에서는 훨씬 고가의 시스템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공간감과 정확한 음색, 그리고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 주었다.

CAV-180은 필자가 재생한 다양한 종류의 음악을 있는 그대로 재생하는 데도 능동적인 역할을 했지만 좀더 강력한 임팩트를 주기 원했던 것 같다. 소스가 영화로 바뀐 것을 CAV-180은 놓치지 않았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오마하 비치' 씬이 시작하자 CAV-180은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 강력한 무대와 다이내믹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러한 능력이 지나쳐 괴로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었다. 속도감 역시 매우 중요한 특성이어서 대사와 음악, 폭발음 같은 서라운드 효과를 놀랍도록 신속하게 재생했다.

"와호장룡"은 CAV-180의 섬세한 측면을 매우 잘 부각시켜 주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전투씬의 다양한 효과음들을 재생하는 능력이 뛰어났다면 "와호장룡"에서는 동일한 다이내믹 임팩트와 함께 자연스러움, 그리고 복고적인 음악을 잘 재생해냈다. 부딪치는 칼들과 격노한 음성의 대사들은 배경의 뛰어난 첼로 연주와 강력한 퍼커션, 그리고 다른 여러 음악적 요소들을 작곡자가 의도한 대로 우아하게 그려냈다. 이러한 CAV-180의 유연함은 중가대 제품에서 필자가 그토록 기대하던 능력으로 3,000불인 SSP-30과의 테스트해본 10,000불에 달하는 렉시콘 MC-12와의 조합에 비해 별다른 차이가 없도록 느끼게 하는 중요한 특성이다. 어떤 앰프들은 최고의 프리/프로세서를 조합하면 자신의 단점이 확연히 드러나는 데 비해 CAV-180은 전혀 그런 문제가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CAV-180은 이러한 기회를 어떤 프리/프로세서와 함께 하더라도, 또 어떤 음량과 소스에서도 자신의 속도와 임팩트, 따뜻함과 통제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하이엔드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지만 빈털터리가 될 필요는 없다. SSP-30 Mk.II/CAV-180의 조합은 통장잔고를 완전히 비우지 않고도 뛰어난 성능의 제품을 제대로 만났다는 기쁨을 함께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가 알고 있는 가장 저렴한 가격의 신뢰할 수 있는 프리/프로세서 중 하나인 SSP-30 Mk.II는 뛰어난 오디오적 성능으로 인해 몇 가지 생략된 기능들을 보상하고 남을 만한 가치가 있다. 클라세의 이 제품은 하이엔드로의 성급한 진입보다는 진중하게 즐기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좋은 기회를 가져다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