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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성 수

최고의 기술력으로 최고의 음향을 이끌어 낸다고 자부하는 브랜드들이 전 세계에 즐비한 현실 속에서 설립된 지 이제 여섯 해 밖에 되지 않은 스위스의 브랜드인 다질에 눈길을 주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 회사에서 처음으로 내 놓은 작품이 하이엔드 앰프 세트라고 한다. 용기가 가상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무모하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10년 뒤에도 이 회사가 건재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기술력 부족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할 수 있다. 기술력이 한 회사의 운명을 결정짓는 유일한 변수는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오디오 역사에서 뛰어난 기술력을 갖추고도 사라져 간 회사가 어디 한둘인가?

그러나 다질에서 내 놓은 NHB-18NS 프리앰프와 NHB-108 model one 파워 앰프의 미래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섣부른 예단일 수도 있지만, 200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명품으로 이들 앰프가 남아 있을 가능성은 거의 100퍼센트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들 기기를 사들일 만한 능력이 있든 없든, 자신이 진정한 오디오파일이라고 생각한다면, NHB-18NS와 NHB-108 model one 세트는 반드시 들어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앰프 설계에 대한 기존의 관념과 관행을 초월한 독특한 관점과 내용을 담고 있는 까닭에, 표준 기술로 삼기 곤란한 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적어도 음향의 완성도를 기준으로 한다면, 보편성과 개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고전주의 미학으로 충만한, 생동감 넘치는 음향을 이 앰프 세트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NHB-18NS와 NHB-108 model one이 제시하는, 생동감 넘치는 고전주의 음향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이 자리에서 필자는 프랑스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가 지난 2000년에 발표한, 예술 영혼의 심연과 본질을 파헤친 소설 『로마의 테라스』 가운데 나오는 한 대목을 인용하고 싶다.

‘이 세상에는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점들이 존재하오. 이런 공간들은 옛날이 굳어진 순간들이지. 모든 것이 먼 옛날의 열정을 지니고 그리로 집결한다오. 그것은 하느님의 얼굴이오. 인간보다 거대하고, 자연보다 광대하며, 생명보다 활기 있는 무엇. 인간과 자연, 생명보다 먼저 존재하는 천체계(天體系)처럼 놀라운 태초의 힘이 남긴 흔적 말이오.’(송의경 역, 문학과지성사, 2002, p.82)

일개 앰프 세트가 감당하기에는 과분한 내용이지만, 이 자리에서 굳이 키냐르를 거론하는 이유는 오디오 설계에서 전자공학이 음악의 본질과 영혼을 되살려 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너무도 평범한 까닭에, 그리고 너무도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인 까닭에, 대부분의 설계자와 애호가들이 애써 무시해 왔거나, 그도 아니면 지금까지 접해 본 적이 없는 까닭에, 아예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지만, 어느 누구든 단 한 번만 대면해 보면, 그러한 경지가 실제로 우리 눈앞에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그러나 지극히 단순한 진리를 다질의 앰프 세트가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무결점 크리스털 음향을 극한치까지 추구하는 현대 음향의 홍수 속에서, 오디오 음향의 시원(始原)에 대하여 고민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NHB-18NS와 NHB-108 model one 세트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칠흑 같은 바다를 비추는 등대 같은 외로운 불꽃으로 음악의 영혼을 비추고, 오디오 음향이 추구해야 할 보편성과 특수성의 내밀한 조화와 균형을 성취한 고전주의 음향 미학을 제시하는 앰프 세트라고 하면 어떨까?

이러한 지적에 대하여 꿈보다 해몽이라고 할 사람도 없지 않으리라. 그러나 다질의 홈페이지 가운데서 ‘제품 철학’ 항목을 살펴보면, 오디오 설계에 대한 범상치 않은 시각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음악 연주의 핵심에 담긴 다양한 감정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오디오 앰프를 설계하는 오랜 탐색의 여정을 이끈 것은 지난 25년 동안 우리 자신이 가꾸어 온 음악 재생에 대한 진정한 열정이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오랜 동안 기다려 온 결과물, 즉 다질 NHB-108 model one 스테레오 앰프를 아주 자랑스럽게 소개합니다. …(중략)… 우리가 대답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질문이 있다면, 실제 음악처럼 느껴지는 음향인가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앰프 속에 구현한 새로운 오디오 회로의 모든 가능성을 탐구하고 개발하는 데 들인 16년의 세월 동안 우리를 이끈 것은 바로 열정이었습니다. …(중략)… 우리에게 음악은 단순히 의사소통과 감상을 위한 방편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에게 음악은 영혼의 표현, 또는 영적인 성숙을 이끄는 강력한 수단입니다.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감정은 설계 과정에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이럴 때 기술은 이들 감정을 한껏 고양하고 초월하는 경우에만 활용해야 합니다. 이들 감정을 왜곡하지 않으면서 말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한 이후에야 우리는 “전기 성능”의 측면에 노력을 집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테스트 벤치를 보유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먼저 들어보고 평가는 나중에 하십시오. 이 순서를 반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제품을 설계하는 방식입니다.’(굵은 서체는 필자)

곰곰 곱씹어 보아야 할 내용이 한둘이 아닌 까닭에, 자세한 분석은 독자 제현에게 맡기겠지만, 이상의 인용문 가운데 마지막 문장만큼은 여유를 갖고 음미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기기만 등장하면 다양한 참고 자료를 일일이 살펴 가면서 해당 기기에 담긴 회로 설계와 부품 내역 등과 같은 기술 내용에 골몰하는 일부 애호가들의 호사 취미에 제동을 거는 주장이 담겨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글에서 이들은 선입견을 갖지 말고 음향부터 먼저 들어 보라고 권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음향이 실제 음악처럼 느껴지는가 하는 것부터 따져 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음악과 음향의 관점에서 먼저 검토한 다음, 이들 기기에 담긴 다양한 기술 내용을 살펴보라는 것이다. 필자가 이들 앰프에 담긴 기술 내용부터 검토하지 않는 이유 또한 이들의 권유를 받아들인 결과이다.

그렇다면 이 앰프 세트가 들려주는 음향은 과연 어떠한가? 오디오 평론의 경우 필자가 『월간 오디오』를 주 무대로 하여 활동하는 까닭에 이 잡지를 자주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는 독자 제현의 양해를 구하겠지만,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석 달 전, 그러니까 『월간 오디오』 2006년 4월호에 다질의 NHB-18NS 프리앰프에 대한 평론을 기고한 바 있다. 이 자리에서 당시에 썼던 글 가운데 한 대목을 인용해 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NHB-18NS는 음악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설계자 자신이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는 음악을 음향으로 구현해야 하는 방법과 기술을 알고 있는 사람의 작품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 고급스럽다는 찬탄을 절로 뱉게 하는 패널의 은은한 황금빛과 섀시 상판의 붉은색을 절묘하게 배합한 디자인과 기막힌 조화를 이룬 ‘고전적인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음향’이 NHB-18NS에서 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얼마나 잘난 놈인지 어디 한 번 두고 보자’고 했던 필자의 오만함을 은은한 표정의 음표 하나로 날려 버리는 놀라운 음향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다. 이 앰프는 그냥 잘났다고 하는 표현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정말로 잘난 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적시하면 당시 시청에서 NHB-18NS가 안겨 준 놀라움의 진원지는 따로 있었다. 이처럼 놀라운 음향을 연출하는 NHB-18NS가 트랜지스터 앰프였던 것이다. 이처럼 경이로운 광경에 대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이 쓰지 않을 수 없었다.

‘NHB-18NS를 듣고 있다 보면 정녕 이것이 트랜지스터 앰프가 만들어 내는 음향인가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도대체 트랜지스터 앰프라고 믿기 힘든 수채화 같은 삼삼한 색채 표현이 그렇고,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이 언제나 적정선을 연출하는 음색의 깊이가 그러하며, 유연하게 굽이치며 유장하게 흘러가는 자연스러운 선율선이 그러하고, 온화하면서도 깔끔한 울림을 이끌어 내는 섬세한 공간감이 그러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와 안정감을 잃지 않는 유연한 다이내믹이 그러하다. …(중략)…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트랜지스터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티시모까지 그처럼 천연덕스럽게 그리고 유장하게 솟구쳐 오르지만, 어떤 경우에도 부드러운 윤곽선이 흐려지지 않는, NHB-18NS가 연출하는 화려한 선율미를 물끄러미 감상하면서, 그리고 음향 저 너머에 있는 음악을 응시하는 듯한 아스라한 음영에 취하면서, 결국 그것은 소재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대답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 자리에서 고백해야 할 것 하나 있다. 이러한 찬탄을 자신 있게 내 뱉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필자가 NHB-18NS 단품이 아니라, NHB-108 model one 파워 앰프로 한 다질의 원 브랜드 셋업에 루멘 화이트의 다이아몬드라이트를 조합한 시스템을 시청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면 필자는 NHB-108 model one 파워 앰프만을 시청하고 평론을 썼던 신동휴 교수보다는 훨씬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월간 오디오』에서 필자와 함께 활동하고 있는 신 교수는 2006년 1월호에 NHB-108 model one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쓴 바 있기 때문이다.

‘프리앰프는 마크 레빈슨 26, 스피커는 AE-1 Signature 및 달퀴스트 DQ-20에 레졸루션 오디오 CD50 및 VPI의 TNT MK2 턴테이블에 첼로의 스티링스(XLR)로 연결하여 시청했다. AE-1 시그니처에서의 첫 인상은 전체적으로 차분하면서도 꽉 찬 볼륨감 있는 사운드를 내어준다. 흔히 말하는 비주얼적인 현상이 두드러진다거나 아니면 질감 위주의 예쁘거나 요염한 음색을 내어주는 경우는 없다. 매우 안정적이면서도 전 대역을 고르게 재생해주는데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스타일은 아닌 듯하다. 음색적으로는 약간의 온도감을 가지고 있는 정도이지만 잡스러운 소리가 나지 않고 조용하게 음을 이끌어주는 모습이 예사롭지는 않다. 까탈스러운 AE-1 시그니처이지만 첨부터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들어주는 것이 채널당 100W라는 수치에 상관없이 높은 구동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략)… 스피커를 달퀴스트로 바꾸어 본다. 원래 저역의 양이 많지 않은 스피커임에도 저역의 확장력이 매우 인상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일반적으로 파워 앰프를 바꾸어 매어보면 자신의 주장이 매우 강하거나 스피커에 매달리는 경향을 보이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 앰프의 경우는 그다지 고집을 부리지 않으면서 스피커 본래의 성향을 그대로 잘 나타내 준다고 생각된다.’[sic]

대역 밸런스, 색채 표현, 구동력, 적응력 등과 같은 NHB-108 model one에 내재된 가능성을 이끌어 내려는 신 교수의 노력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리고 다양한 기기들과 조합하여 얻은 다양한 결과를 꼼꼼하게 정리한 유용한 글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렇다면 신 교수는 NHB-108 model one에 대한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갑자기 획하고 내 앞에 별스럽게 등장한 앰프이긴 하지만 NHB-108 model one은 첫 대면부터 대단히 매력적인 사운드를 내어주어 사람을 혹 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중략)…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차로 그 매력을 은은하게 보여주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 … 정말로 ‘음악적’이라는 단어가 시청하는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중략)… 최근의 하이엔드 앰프들이 야단스러운 크기와 어마어마한 덩치를 선보이고 약간은 별스러운 소리를 내려는 경향 있는데 다질 NHB의 사운드나 덩치는 별스럽지도 않고 적당한 사이즈를 가진 보편타당한 하이엔드 사운드를 내어준다고 생각한다. 적당한 크기와 무게를 가지면서도 성능에는 결코 양보하지 않은, 그러나 오랫동안 들어도 쉽게 질리지 않을 앰프를 찾는 오디오파일들에게 권하고 싶은 앰프이다.’ [sic]

신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입장이라면 나도 이렇게 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만약 필자처럼 원 브랜드 셋업으로 다질의 앰프 세트를 시청했다면, 신 교수는 어떤 평을 썼을까? NHB-18NS와 NHB-108 model one을 조합한 시스템을 시청했다면, 신 교수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이들 기기를 시청해 보면 금세 풀릴 일이지만, 필자의 의문에 대한 답은 이미 그의 글에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음악적’?‘보편타당한 하이엔드 사운드’ 등과 같은 표현을 그가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월간 오디오』에서 간혹 열리는 특집 시청회에서 의견 충돌을 빚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음악을 음악답게 표현하는 ‘음악성’과 ‘보편성’을 간직한 음향에 대해서는 언제나 의견 일치를 보는 만큼, 다질의 앰프 세트에 대한 우리 두 사람의 시각과 평가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다만 원 브랜드 시스템을 시청한 필자가 이들 앰프에 대하여 훨씬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는 것 정도가 다를까?

- 2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