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최근 회현동 일대의 LP 숍을 원정 가는 일이 잦아졌다. 워낙 싸고 좋은 오리지널 LP들이 즐비해서, 한번 들리면 물욕이 절로 샘솟아 참 억제하기 힘들다. 물론 대부분 중고들이라 반질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고, 재킷의 청결도도 검사해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다. 특히, 록이나 재즈는 시끄럽게 들어도 무방해서 좀 스크래치가 생겨도 손에 넣지만, 클래식은 다르다. 약간의 스크래치만 있어도 가슴이 철렁하다. 생각해보라. 한참 조용한 분위기에서 연주자가 심혈을 기울여 음 하나하나를 조탁하는 순간 찌지직 ~!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자. 아마 졸고 있다면 깜짝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날 것이다.

그럼 왜 이런 고통을 마다하지 않고 중고 LP들을 입수하는가? 물론 재킷이 주는 수려한 매력과 옛 것에 대한 향수 등이 어우러지지만, 무엇보다 음질 문제를 든다. 아무리 CD 시스템에 투자해도 결국 LP에 지는 것 아니냐가 현재까지의 중론이다. 물론 잘 조율된 아날로그 시스템에서 나오는 소리는 소름이 돋을 만큼 리얼하고 또 강렬하다. 음에 심지가 있어서 강하게 뇌리에 와 닿아 높은 음악적 감성을 자극한다. 그에 비하면 CD는 화려하기는 해도 다소 엷고, 에너지가 약하다.

특히 보컬 같은 것엔 쥐약이이서, 아무리 좋은 시스템으로 들어도 어딘지 모르게 만든 소리가 난다. 역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태생적인 차이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고, 마찰과 반사라는 물리적인 메커니즘의 벽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최고의 아날로그 시스템과 견줘도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을 가진 CD 시스템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그런 게 어딨어, 어딨어, 캐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여기 있잖아 ! 바로 그게 이번에 소개할 오르페우스의 헤리티지 DAC다.

스위스의 이베르돈 레 반이라는 호반 도시에 위치한 오르페우스사는 DAC, CDT, CDP 등 주로 디지털 관련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다. 모회사는 애너그램 테크놀로지스로, 특히 DAC 쪽에 탁월한 기술력을 갖고 있어서 전세계 메이커를 상대로 영업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오르페우스는 애너그램과는 별도의 회사로 분리해서 독자 노선을 추구하는데, 일부 기술은 애너그램 테크놀로지스에게 받지만 독자적인 기술력을 배양해서 세계 최고의 디지털 소스 관련 기기를 생산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오르페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인이자 악사이다. 당초 아폴론에게 하프를 배워, 그가 마음먹고 연주를 하면 사람은 물론이고 맹수들과 초목까지 매료되었다고 한다. 좀 심한 표현이지만, 이번에 소개할 헤리티지 DAC를 들으면 그런 오르페우스라는 작명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실감하게 한다. 한없는 부드러움에 자연스러움이 더해져 무슨 음악을 들어도 흥취가 나고, 과연 이게 CD에서 나오는 음인가 연신 의문을 갖게 하는 마법의 상자인 것이다.

특히, 아날로그를 듣는 듯, 음의 연결성이 대단해서 잔향이나 배음이 기막힐 뿐 아니라, 악기나 보컬 본래가 가진 심지와 에너지가 대단하다. 천의무봉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나 쓰는 것이리라. 디지털 하면, 0과 1로 이뤄진 신호로 아날로그 음을 나눠서 인위적으로 조작한 신호라는 것이 태생적인 성격인데, 희한하게도 본기를 걸면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일체의 끊김 없이 음성 신호가 리퀴드하게 전개되는 모습은 흡사 뭐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여담이지만 오르페우스가 스위스산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진짜 스위스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구나!' 남한 땅의 반도 안되는 면적에 그것도 대부분 산악 지대이고, 인구라고 해봐야 겨우 750만명.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하이엔드 오디오계의 강자로 부상하게 한 저력은 과연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 기회가 된다면 꼭 스위스 땅을 밟아 한번 그 정체를 추적하고 싶다.

아무튼 DAC 단품으로서는 이례적일 만큼 고가인 데다 음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뛰어난데, 여기서 그런 비밀의 일부나마 풀어보도록 하겠다. 아무래도 테크놀로지에 관련된 부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바, 짧은 지식이나마 동원해서 추적해보자.

일단 본기는 두 개의 새시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전원부이고, 또 하나는 DAC부다. 전원부는 말 그대로 전원을 책임지는 부분으로, 여기에 컨트롤 기능이 더해져 있다. 앞에서 보면 여러 개의 작은 등이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DAC의 입력단의 어느 파트가 현재 작동중인지를 설명하는 디스플레이다. 그 조작은 전원부의 오른쪽 귀퉁이에 나 있는 두 개의 버튼으로 가능하다. 그 밑은 정상/역상을 선택할 수 있는 버튼이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DAC부를 파헤쳐 보자. 뚜껑을 열고 내부를 보면 일단 완벽한 좌우 대칭형의 설계에 감탄하게 된다. 특히, 중앙에 밀집된 네 개의 모듈 주위로 역시 네 개의 실버 박스가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도무지 설명이 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애너그램 테크놀로지스에서 공급한 것이라 한다.

그럼 네 개의 모듈을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제일 뒤쪽, 그러니까 뒤의 입력단에 근접한 모듈부터 시작하면, 이게 바로 타임 록 모듈이다. 이것은 마스터 클록 역할을 하는 것으로, 클록 정밀도를 1 피코 초 이하로 추구해서 지터 저감에 대단한 공헌을 하고 있다. 이어지는 두 개의 모듈을 좌우 두 채널로 나뉘어서 작동하는 Q5 모듈이다. 이는 44.1kHz/16bit에서 192kHz/24bit까지 입력되는 PCM 신호를 일종의 업샘플링하는 것으로, 채널당 768kHz/24bit로 만든다. 사실 192kHz만 해도 참 대단하다 했던 게 어제 같은데, 이제는 768kHz의 단위로 올라갔다.

이어지는 맨 앞쪽 모듈은 소닉(Sonic) 2 모듈로서, Q5에서 얻은 768kHz/24bit의 디지털 데이터를 베이스로 해서 교묘하게 암호화하는 모듈이다. 여기서 잠시 네 개의 모듈 좌우에 설치된 기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철저하게 좌우 대칭형으로 두 채널을 완벽 분리한 것으로, 채널당 네 개의 DAC 칩을 동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쓰인 아날로그 디바이스의 AD1955A라는 칩은 기본적으로 듀얼 DAC다. 즉, 이 칩 하나로 스테레오분의 신호를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채널당 4개 쓰였으니, 총 8개분의 회로를 구성하게 된다. 소닉 2 모듈은 이런 좌우로 각 8개분의 회로에 Q5에서 얻은 신호를 암호화해서 384kHz/24bit의 데이터를 보내는 것이다.

좀 복잡하지만 이렇게 판단하면 된다. 최고 입력 신호 데이터가 192kHz라면 이를 Q5에서 네 배 업샘플링한 후, 이를 반으로 나눠서 총 8개의 회로에 각각 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라, 네 개는 정상 신호, 나머지 네 개는 역상 신호로 보내는 데 묘미가 있다. 이 과정에서 AD 1955A에 수록된 디지털 필터는 바이패스해서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신호들을 I/V 변환 회로를 이용해서 차동 합성한다. 이 과정에서 가청 주파수 대역 이외의 대역에 셰이핑 노이즈를 합성해서 음성 신호의 직진성과 개방성을 좋게 만드는 방법을 꾀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PCB 기판은 최고의 퀄리티를 가진 금도금 기판이고, 여기에 도체 레일을 깔아 신호 경로로 사용하는데, 이럴 경우 전원이나 어스 관계에서 톡톡한 효과를 본다고 한다. 물론 회로의 설계는 최단 경로를 선택해 일체의 딜레이나 간섭을 방지하고 있다.

과연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CD의 신호를 업샘플링해서 극으로 DA 컨버팅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놀랍게도 이를 통해 얻은 음의 경이로움은 앞서 설명한 바 있다. 이를 보다 자세하게 묘사하기 위해 간단한 시청평을 써본다. 일단 시청에 동원된 기기는 다음과 같다. CD 트랜스포트는 C.E.C.의 TLOX이고, 프리 및 파워는 다질 앰프 세트 그리고 스피커는 아센도의 C7과 루멘 화이트 등을 이용했다. CD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Beethoven 피아노 콘체르토 3번 루돌프 제르킨(p) 레너드 번스타인 & 뉴욕 필

-모차르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No.26" 하스킬 & 그뤼미오

-이글스 "호텔 캘리포니아"

-오스카 피터슨 "You Look Good to Me"

베토벤을 들으면, 녹음 연대가 언제쯤인지 우선 명확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장중하게 전개되는 오케스트라를 배경으로, 마치 잔잔한 레만 호수에 돌멩이 하나를 던져 퐁당 물방울이 튀듯 피아노의 음이 잔잔하게 물결치는데, 그 대목에서 가벼운 탄성이 나온다. 더 이상의 설명이 불필요할 정도로,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는 준민한 음이 나온다. 최상급의 LP 플레이어 시스템에 초반을 걸었을 때의 느낌이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제르킨은 완벽주의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인데, 이 DAC를 걸면, 그가 연주에 임할 때 어떤 기분으로 악보를 해석하고, 건반을 누르고, 페달을 밟는지 상상이 간다.

모차르트의 곡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바이올린의 재생이다. LP가 CD에 비해 우위를 보이는 장르가 많지만, 특히 바이올린에서의 차이는 현격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굳이 그 차이를 실감할 수 없다. 그뤼미오의 연주는 매칭 시스템에 따라 때로는 과격해지고 때로는 온순해지는 양상인데, 여기서는 자연스런 톤으로 그뤼미오의 인품이나 개성이 적절히 녹아들어 있다. 끝이 뻗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고역에 밀도감 넘치는 중역 등 밸런스가 빼어나고, 바이올린의 줄 하나하나가 섬세하게 보일 만큼 세밀하면서도 전체적인 묘사가 뛰어나 연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이글스에 이르면 우선 압도적으로 밀어닥치는 악기군의 홍수와 저역의 박력에 아연실색하게 된다. LP로도 많이 들은 음반이지만, 과연 이 녹음에 이 정도의 정보량이 있었나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두 대의 일렉 기타와 한 대의 어쿠스틱 기타가 자연스럽게 얽히면서 그 위로 힘찬 돈 헨리의 보컬 그리고 드럼 & 베이스의 약동적인 리듬까지 뭐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심하게 말하면 라이브 현장에 온 듯한 기백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스카 피터슨은 시스템에 따라 고상하기도 하고 때로는 힘이 지나쳐 과격해지기도 하는 소프트인데, 여기서는 역시 오스카의 연주 스타일이나 트리오의 앙상블 등이 적절한 텐션과 에너지로 다가온다. 말하자면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상태다. 눈을 감으면 신명나게 스틱으로 북을 두드리는 틱펜과 연신 두꺼운 베이스 줄을 손가락으로 튕겨대는 브라운, 흥에 겨워서 만면에 미소를 잔뜩 머금은 오스카 등 멤버 각각의 얼굴이 그려진다. 피아노 트리오의 높은 이상을 구축한 이 세션의 열기와 재미를 이토록 리얼하게 묘사한 DAC가 과연 있을까?

필자는 기본적으로 스피커나 앰프보다 소스에 더 비중을 둔다. 처음 캘리번이 나왔을 때 복권이든 뭐든 거금이 들어오면 제일 먼저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DAC를 보니 부담이 더 생겼다. 그리고 이렇게 강렬하게 소유욕을 불러일으킬 만큼 멋진 기기를 만들어낸 오르페우스에 큰 찬사를 보내고 싶다. 만일 방대한 CD 컬렉션을 갖춘 애호가라면 한번 진지하게 본기의 구입을 고민하기 바란다. 당신의 CD를 LP 초반의 상태로 탈바꿈시켜줄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