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버설 플레이어에 대한 편견 불식시켜
우리나라 오디오 시장에서 소문만 무성하고 제품이 귀한 것으로 순위를 꼽자면 아마도 블라델리우스가 수위를 다툴 것이다. 스웨덴의 블라델리우스라는 브랜드를 필자가 처음으로 들었던 것이 언제인지는 가물가물한데 아마도 2005년 초, 또는 그 한 해 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라스베가스 CES에 참가했던 수입원들이 입을 모아 매력적인 새 브랜드의 등장을 이야기했던 것. 들리는 이야기로는 국내 수입원 일곱 곳에서 블라델리우스 측에 프로포즈를 했다고 하니, CES를 참관한 국내의 모든 수입원이 이 새로운 브랜드에 매력을 느꼈나 보다. 그 후 국내 수입원이 결정되었을 때, 다른 수입원들이 매우 아쉬워했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블라델리우스는 하이파이 오디오 시장에서 ‘루키’가 아니었다. 주재자 마이크 블라델리우스는 넬슨 패스의 후임으로 스레숄드의 전기 회로 설계를 주도했고 프라이메어의 제품들을 설계해주기도 하면서 그 분야에서 착실하게 명성을 쌓아온 관록 있는 인물이었던 것. 그는 단지 자신의 이름이 붙은 브랜드로, 자신이 만들고 싶은 제품을 마음대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아직도 다른 브랜드를 위해서 제품을 설계하고 있었다면, 모노 블록 앰프이면서 좌우 앰프마다 고역과 저역 증폭 기능을 각각 특화시켜 2채널화한 독창적인 바이앰핑용 파워 앰프 - 베오울프와 같은 제품은 절대로 시장에서 빛을 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블라델리우스의 국내 진입은 예상 밖으로 산뜻하지 못했다. 전기가 들어가는 수입 제품에는 필수 절차인 안전 인증부터 문제였다. 들은 이야기로는 블라델리우스 측으로부터 안전 인증을 위한 협조를 받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샘플로 수입된 인티 앰프 토르와 CDP 프레야와 같은 입문기 단 몇 대만이 국내에 선을 보인 채 세월만 마냥 흘러갔다.
그러다가 수입원이 바뀌어 다시 수입된다는 이야기가 들린 것은 작년 초의 이야기. 그때는 필자도 큰 기대를 하게 되었는데, 해외 사이트에서 블라델리우스의 평가가 워낙 좋았고 특히 마르텐과 매칭이 좋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그토록 기다리던 곤둘은 이제서야 들어왔다. 순백색의 알루미늄 새시가 뻔뻔스럽게 보인다. 답답하게 기다리기만 했던 한 해였다. 가까운 일본 시장을 볼 때는 더 억울하다. 그 1년 동안 다양한 블라델리우스들이 수입되어 속속 인기를 끌고 있으며, 심지어는 처음에 없었던 신제품까지도 다수 등장한 것이다. 필자의 입장에서는 안전 인증 문제나 수입원과 메이커에 얽힌 우여곡절을 알 수는 없겠지만, 다만 세계적으로 좋은 제품들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일본의 시장 규모와 환경이 부럽다.
다만 수입원측 이야기로 이제 본격적인 안전 인증 절차가 진행되었고 메이커와의 협력 관계도 틀이 잡혀서 블라델리우스의 전격 상륙이 머지않았다니 그나마 조금 위안을 삼아본다.
곤둘. 전에는 상당한 주목을 받았지만 지금은 인기가 한 풀 꺾인 유니버설 플레이어이다. 애호가들이라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지금은 유니버설 플레이어보다는 SACD를 재생할 수 있는 음악 전용 2채널 기기들이 더 인기를 끌고 있다. 잠시 비주얼과 5채널 재생 쪽을 기웃거렸던 애호가들이 다시 예전의 2채널 하이파이로 회귀하며 비주얼과 하이파이를 분리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블라델리우스도 이 추세에 발맞추어 곤둘의 2채널 음악 전용 플레이어 버전인 곤둘 M을 내놓고 있다. M은 물론 ‘뮤직’을 의미한다. 하지만 블라델리우스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 본 사람이라면 곤둘이 유니버설 플레이어라고 해서 우습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블라델리우스는 창업할 당시부터 레드북 CD전용 CDP가 제품 라인에 있었음에도 한결같이 곤둘 유니버설 플레이어를 자신들의 레퍼런스 소스 기기로 내세워 왔다. 블라델리우스가 해외 유수의 오디오쇼에 참가할 때도 언제나 곤둘을 썼고 프리앰프는 보통 연결하지 않았으며, 그렌델이나 베어울프와 같은 파워 앰프에 직결하는 것을 즐겨왔다. AV와 상관없는 하이파이 쇼에서도 그런 것을 보면 그들은 유니버설 플레이어 곤둘이 다른 하이엔드 메이커의 하이파이 디지털 소스와도 음질 면에서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곤둘은 특유의 모듈 방식을 채택하여 사용된 모듈에 따라 레벨 1, 2, 3로 성능과 기능을 차별화시키고 애호가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그들의 베스트셀러 그렌델이라는 파워 앰프도 한 새시에 모듈을 추가함으로써 2~5채널로 사용할 수 있다). 물론 레벨 1에서는 모듈을 추가함으로써 레벨 2나 3으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 리뷰기는 풀 옵션이라고 할 수 있는 레벨 3.
채널당 두 개의 크리스털 DAC 칩을 차동 밸런스로 구성한 레벨 1은 기본 상태. 레벨 2에서는 192kHz까지 업샘플링이 가능하며 사용자가 이를 선택할 수 있게 하였고, 비동기 리클록킹 방식으로 지터를 거의 대부분 없앴으며 디지털 입출력도 세 개씩 장착했다.
레벨 3은 레벨 2에 하이엔드 하이파이적 성향을 대폭 부여했다. 특히 디지털 소스별로 독립된 D/A 컨버전을 수행하게 한 것이 돋보이는데, SACD용으로 버 브라운사의 DSD 1792 네 개를 차동 밸런스로 구성한 DAC를 갖고 있으며 이와 별도로 버 브라운사의 24비트 PCM 1704-k 네 개를 밸런스 모드에서 대칭으로 구현한 레드북 CD용 DAC를 함께 갖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급 CDP와 SACDP를 한 새시에 담았다고도 할 수 있는 구성이다.
한편 DAC의 출력에서 전류/전압 변환부를 OP앰프를 쓰지 않고 개별 소자를 써서 구성해 놓은 점도 인상적. 흔히 애호가들이 CDP를 개조할 때, 음질에 영향을 크게 미치고 비교적 쉽게 바꿀 수 있는 부분을 꼽으라면 출력 쪽의 커플링 커패시터와 함께 전류/전압 변환회로에 사용되는 OP 앰프의 업그레이드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전류/전압 변환회로가 필요한 이유는 대부분의 DAC의 출력이 전압이 아닌 전류이기 때문이다).
전류를 전압으로 변환하는 것은 가장 간단하게는 부하 저항 하나로도 끝나지만, 필자가 오래 전에 시도해본 바로는 음은 맑아져도 음량이 작고 맥이 풀려 나른한 소리가 되었다.
따라서 하이엔드 DAC 메이커는 이 부분에 트랜스를 쓰기도 하고 진공관을 쓰기도 하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물론 간편하게 OP 앰프로 처리하는 메이커들이 대다수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경우에는 OP 앰프의 성능이 무척 중요하다. 블라델리우스에서 개별 소자를 써서 독창적으로 이 부분을 구성한 것은 곤둘이 블라델리우스만의 소리를 내는 데 있어서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외에 레벨 2부터는 아날로그 입력 보드가 옵션으로 설치 가능한데, 이를 설치하면 밸런스 1조와 언밸런스 세 조의 입력을 갖는 프리앰프로도 사용이 가능하며 입력별로 게인 설정까지 가능하다.
레벨 1, 2, 3를 스펙상으로 비교해보면, 현재 디지털 기술이나 추이로 볼 때 최소한 레벨 2 정도는 되어야 눈 높은 애호가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듯. 아마도 그들이 하이파이 오디오 쇼에서 시연했던 것은 레벨 3이었을 것이다.
이제 외관을 보자. 절삭 가공의 흔적이 그대로 보이는 커다란 알루미늄 새시는 금속의 질감이 두드러지지만 정갈하고 단정하다. 센터 메커니즘 양 쪽에 소스와 볼륨 표시되는 창이 대칭으로 붙어 있다. 전원을 넣었을 때 양측 디스플레이의 폰트 크기가 다른 것은 기능상의 이유이겠지만 좌우가 같아야 한다는 매니아적 강박 때문에 불편하다. 크기는 19인치 랙 마운트 표준이지만 깊이가 주는 존재감이 상당하다.
뒷면에는 레벨 1부터 기본 장착되는 5.1채널용 RCA 출력 단자와 프론트 좌우 밸런스 단자가 있고 영상 단자들은 BNC 타입으로 컴포넌트와 컴포지트가 장착되어 있고 S-비디오와 DVI도 있다. HDMI가 아닌 것은 아쉽다.
한편 레벨 2부터 장착되는 디지털 입력으로 AES와 코액셜 그리고 광 입력이 하나씩 총 세 개가 장착되어 있으며 같은 종류, 같은 수의 디지털 출력이 달려 있다. 빈 슬롯 하나는 옵션의 아날로그 입력을 위하여 남겨 둔 것. 5.1출력의 RCA 단자들이 평범한 제품이라는 것은 조금 아쉬운데, WBT의 넥스젠이나 카다스의 로듐 제품을 썼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전원 케이블을 무척이나 자주 바꾸는 애호가들을 고려하면, 전원 선을 탈착할 때 전원 단자가 흔들리는 것도 지적하고 싶은 점이다.
시청은 먼저 KR오디오의 대형 3극관 싱글 인티 앰프 VA350을 연결하여 카르마 3.2Fe를 듣기로 했다. 필자가 유니버설 플레이어라고 좀 방심했다는 것을 전제하더라도, 깜짝 놀랄 만큼 투명하고 섬세하며 정교한 고역에 매료되었다.
저역은 30W 진공관 앰프의 한계 때문에 양감이나 박력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온화하고 따듯하며 특히 질감이 자연스러워서 대음량파가 아니라면 매료될 애호가가 많을 것이다. 한편 곤둘은 고정출력도 가능하지만 100단계로 섬세하게 조절되는 볼륨을 갖고 있는데 작은 음량에서도 해상도가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을 보면 볼륨의 특성이 상당히 우수한 것 같다.
뭔가 재미있는 것이 없을까 하여 메뉴를 누르다 보니 멀티 DAC를 ON/OFF시키는 부분이 있다. 멀티 DAC는 앞서 언급했듯 레벨 3만의 기능. ON으로 두면 레드북 CD는 레드북 CD전용의 PCM DAC로 재생하는 셈이 된다. SACD를 들을 때는 DSD DAC를 써야 하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다. <브루크너 9번>을 계속 ON 상태로 듣다가 OFF시키니 소리가 가늘어지고 거칠어졌다. 다시 ON시키니 중역이 선명하고 따듯해지면서 아날로그적인 풍윤함이 느껴졌다. 몇 번 반복해보니 ON 쪽이 주 악기와 선율을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더 음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OFF 쪽이 들어주지 못할 소리라는 뜻은 결코 아니며 상대적두 모드의 차이를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다. ON과 OFF에서 음반에 따라 음량이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느낌이 있었는데 음악 장르에 따라 일관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음량 차이보다는 음색의 차이라고 판단된다. 궁금해서 체스키 레코드의 테스트 음반으로 315Hz의 단일 주파수와 스웹 톤을 재생하며 측정한 결과 주목할만한 출력 전압의 차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편 DSP를 바이패스시켜 음질을 개선하는 ‘CD 다이렉트’ 기능도 있다. 조심해야 할 것은 레벨 3의 DAC3를 꺼 둔 상태로 해야만 제대로 소리가 나온다. 처음에 모르고 DAC3를 켜 놓은 채로 ‘CD 다이렉트’를 작동시켰을 때 갑자기 큰 노이즈가 나와 깜짝 놀랐는데, 매뉴얼을 보니 메뉴나 세팅의 조작은 반드시 앰프를 끄고 하라는 주의가 크게 쓰여 있어서 머쓱했다.
세팅은 반드시 앰프를 끄고 하고, 볼륨을 최소화한 후 앰프를 켜며 서서히 볼륨을 올리는 것은 특히 복잡한 디지털 기기가 많아지는 상황에서는 꼭 지켜야 할 ‘기본’인 것을. 하지만 곤둘은 유니버설 플레이어로 워낙 기능이 많은 만큼 두툼한 설명서로도 뭔가 설명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앞으로는 수입원과 딜러들이 공부를 점점 더 많이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편 블라델리우스에서 그동안 주로 곤둘과 파워 앰프를 직결한 것을 고려하여 나그라의 모노블록 파워 앰프 PMA를 직결해 보았다. VA350과 비교하여 고역이 더 투명해지고 더 섬세해졌으며, 저역의 양감은 풍성하다고 볼 수 없으나 스피드와 생동감이 뛰어나서 매혹적인 음이다. 이번에는 스피커를 교체. 국내에서 유난히 저평가된 감은 있지만, 소리나 디자인 그리고 가격까지 괜찮은 차리오의 컨스텔레이션 어사 메이저. 잘못 매칭하면 둔중한 소리를 내는 어사 메이저가 실로 깔끔하고 정결한 모습으로 바뀐다. 이 매칭은 참으로 필자의 마음에 쏙 들어서 실로 오랫동안 듣게 되었다.
"시애틀의 가을"은 SACD의 매력을 크게 느낄 수 있었던 소스. 피아노 소리는 아날로그의 온기를 갖추고 있으면서 섬세하며 영롱하고 단단해서 지극히 매력적이다. 레드북 CD "팝팝"에서 리키 리 존스의 목소리도 촉촉하고 적당히 쓸쓸하고, 나대거나 지나치게 어리지 들리지 않아서 좋다. 반트가 연주하는 "브루크너 9번"의 스케르초에서는 무대가 넓고 깊으며 악기들이 섬세하게 분리되고 오케스트레이션의 화음과 여운과 적당한 두께를 갖고 펼쳐진다.
필자는 지금까지 소스-파워 간의 직결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 정도의 음이라면 그 선입관을 가볍게 떨쳐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는 유니버설 플레이어의 ‘소리’에 대해서도 일관적으로 폄하하던 습관은 분명히 바뀔 것 같다.
만일 레드북 CD의 음질까지 염두에 두고 까다롭게 유니버설 플레이어를 선택하는 애호가가 있다면, 멀티 DAC가 장착된 곤둘 레벨 3를 반드시 들어 볼 것을 권한다. 그리고 SACD에 비중을 크게 두는 애호가라면 레벨 2와 3는 비슷한 가치를 가질 것이므로 레벨 2를 권한다. 한편 DVD 위주의 AV 애호가라면 레벨 1이어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처럼 2채널만으로 CD와 SACD를 가리지 않고 음악만을 듣는 애호가들은 조금 더 기다리시기를. 필자는 곤둘 M을 기다린다. 소리는 지금과 같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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