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을 잃게 만드는 HRS의 극적인 효과
작년에 뮌헨 하이엔드 오디오 쇼에 갔을 때의 일이다. 브링크만이라는 회사의 부스를 보니, 넓고 탁트인 공간에 시원스럽게 기기들이 세팅되어 있었는데, 매우 정갈하고 군더더기 없는 음이 나와서 눈길을 끌었다. 사실 브링크만은 독일 지역에서는 매우 유명한 레이블로, 당초 EMT의 개량으로 큰 성과를 올린 바 있다. 그러나 음의 입구가 되는 턴테이블뿐 아니라 각종 앰프류에 이르기까지 제품이 다양해서 일종의 종합 오디오 메이커로 발돋움하는 중이었다. 이 지역에서의 명성 또한 대단한 모양이다.
필자는 항상 오디오 부스를 들어가면 기기를 배열하는 센스나 안목을 중시하는 편이다. 아무리 소리가 좋아도 눈으로 보는 즐거움이 없으면 기분이 반감하게 된다. 아마 이런 성향은 오디오파일이라면 대부분 동감하리라 본다. 브링크만의 부스 역시 그런 면에서 만점을 줘도 좋을 만큼 전체적인 인테리어나 세팅이 뛰어나서 한동안 자리에 앉아 음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속으로는 이런 리스닝 룸을 가졌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기기를 올려놓는 오디오 랙이 다소 생경해서 눈여겨봤다. 사실 부스마다 전시의 컨셉이 제 각각이어서 어떤 부스에 가면 벽면의 콘센트에 그대로 전원선을 연결해 대강 대리석를 깔아서 음을 들려주는 곳이 있는가 하면, 바닥에 양탄자를 깐다거나 조명의 광량을 조절하는 등 세밀하게 튜닝을 하는 곳도 있다. 브링크만은 특히 턴테이블에 신경을 쓴 듯, 별도의 받침대를 깔아놓았는데, 그게 바로 HRS라는 회사의 제품이었다. HRS? 세상에 참 많은 액세서리 메이커가 있어서 그때는 그냥 흘려 듣고 말았는데, 이번에 정식으로 수입되어 일단 반갑기는 하다. 사실 오디오를 하다 보면, 주 관심사는 아무래도 스피커이고, 그 다음에 앰프류다. 소스의 중요성을 실감하고는 있지만, 어느 정도 투자하면 별로 바꿀 일이 없으므로 한번 정착하면 잊는 편이다. 케이블? 양질의 전원 코드만 확보하면, 나머지는 그때그때 보충하면 된다.
그 외에 진동판이나 레조네이터, 신목과 같이 다양한 액세서리가 있기는 하지만, 효과는 시스템에 따라 다르다. 또 너무 액세서리에 의존해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도 있으므로 지나친 탐닉은 금물이다. 그런데 이제는 받침대라니, 대체 오디오 산업이 어디까지 가려고 이러는가 탄식이 나올 만도 하다. 일단 쉽게 설명하기 위해 HRS에 대해 이렇게 평하겠다. 만일 당신이 턴테이블이나 CD 트랜스포트의 성능을 극대화하고 싶다면, 이 받침대는 필수다.
스피커에 연결하는 스파이크나, 앰프류 등에 연결하는 전원 코드만큼이나, 소스류에서 HRS가 갖는 위력은 가히 독보적이라 하겠다. 여태 다양한 케이블이나 액세서리, 받침대 등을 리뷰 하면서 이처럼 극적인 효과를 보인 제품은 별로 찾기 힘들었다. 그만큼 그 결과가 압도적이다. 그리고 만일 여기서 재미를 본다면, DAC, 프리앰프 등 특히 진동에 민감한 기기 등에 차례로 받쳐볼 만하다. 그럼, 이제부터 그 부분을 기술하도록 하겠다.
현재 오디오계에서 가장 큰 이슈는 역시 진동 문제다. 진동은 곧 공진을 일으키며, 이는 특정대역을 부풀려 음의 왜곡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이 진동이라는 것은, 단순히 기기를 단단한 받침대에 올려놓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만일 진동을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해도 특정 주파수 대역을 죽이거나 혹은 부풀리면 결국 음성 신호에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가청 주파수 대역의 음성 신호는 매우 민감하게 귀에 작용하기 때문에 이를 훼손시키지 않으려면 숱한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심지어 이런 진동을 적절히 이용한 통울림 스피커로 멋지게 음악을 재생하는 경우도 있으니, 과연 억제만이 해결책 인가하는 의문도 든다.
그러므로 현재 진동에 관한 연구는 단순히 억제하기보다는, 진동을 진동으로 잡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이열치열인 셈인데, 특정 진동이 오면 이를 또 다른 진동으로 맞받아쳐 가청주파수 대역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그럴 경우 가청 주파수 대역이 손상 받지 않는 장점이 있다.
대개 진동은 두 가지 형태로 나눈다. 구조적 진동원(Structure-borne)이 있고, 공기로 전달되는 공기 진동원(air-borne)이 있다. 전자는 스피커,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등을 들 수 있다.,여기서 발생한 에너지는 인접한 구조물을 통해 오디오 시스템에 전달된다. 후자의 경우 스피커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낸 음이 벽에 반사되어 다시 돌아올 때 앰프며 턴테이블은 그 진동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왜곡을 일으키게 된다.
바로 이런 문제점을 직시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는 움직임이 최근에 많은데, 그 중 하나가 바로 HRS다. 이 HRS는 “Harmonic Resolution Systems"의 약자로, 여기서 Resolution은 흔히 해상도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해결이라는 뜻도 있으니, 참 복잡한 의미를 지닌 작명이라 하겠다. 그래도 후자에 역점을 두면, 음악적인 하모니를 완성하기 위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HRS의 창업주이자 수석 디자이너인 마이크 라트비스(Mike Latvis)는,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하고 또 오디오 제작에도 남다른 재주를 보여왔다. 대학에서는 기계 공학을 전공했지만, 이후 진동에 관련된 일을 주로 해서 큰 업적을 남긴 바 있다. 그가 다닌 회사들을 보면 로드 코퍼레이션, 무그 컨트롤스, 바이브레이션 & 아이솔레이션 프로덕츠 그룹 등 주로 항공기나 방위 산업에서 진동에 관련된 제품을 개발하는 쪽이었다.
예를 들어, 미사일을 발사할 때 효과적인 아이솔레이션 시스템을 구축한다거나, 일반 상용기에서 진동으로 발생하는 노이즈를 실내에서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방법을 강구하거나, 탄도를 맞았을 때 해군 선박의 전자계통을 순식간에 차단시켜 보호하는 법 등, 대단한 기술력을 요하는 분야에서 수석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바로 이런 노하우가 결집되어 이번에 소개할 M3에 집결되었다고 하니, 항공기 기술이 하이엔드 오디오계로 이전한 또 다른 케이스라 하겠다.
이번 시청에 쓰인 기기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앰프류는 다질 세트가 동원된 가운데, 스피커는 루멘 화이트와 아센도의 C7을 번갈아 썼고, DAC는 오르페우스의 헤리티지, CD 트랜스포트는 C.E.C.의 TL0X다. 일단 TL0X를 중심으로 시청 리포트를 전개하겠다. 참고로 CD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 오스카 피터슨 “You Look Good to Me”
- 이글스 “Hotel California”
- 제리 멀리건 & 자니 호지스 “Sunny”
- 모차르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No. 26” 하스킬 & 그뤼미오 연주
사실 HRS가 창업한 것은 2000년경이지만, 라트비스를 중심으로 잘 짜인 맨 파워의 이쪽 분야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엄청나서, 설계, 진동 차단 시스템, 재료 등에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에 달해 있다. 본 기가 처음 만들어져 2004년 CES 쇼에 런칭했을 때의 반응은 정말 폭발적이었고, 자연스럽게 브링크만과 연계되어 이번에 국내에 소개된 것이다.
본 기의 핵심은 위에서 이야기한 구조적 진동원과 공기 진동원 모두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느 위치에 놓여있던 최상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데에 운영의 묘가 있다. 즉, 외부에서 들어오는 진동 에너지를 최소화하고, 잔여 에너지를 조절하는 것이다. 기하학, 질량, 장애물 특성에 최적화되어 있고, 오디오를 통과하는 해로운 진동을 독점 탄성중합체를 통해 제거한다는 발상이다. 겉보기엔 단순해 보이지만, 여기에 이르기까지 행한 숱한 실험과 테스트에 대해선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본 기의 실력을 제대로 검증하기 위해 일단 프리앰프며 파워 앰프 등에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며 체크했는데, 제일 효과가 컸던 것은 역시 CD 트랜스포트였다. 이런 결과를 봐서 만일 턴테이블을 동원했다면 더욱 극적인 차이를 경험했으리라 짐작해본다. 언제 기회가 되면 턴테이블을 갖고 시험해보고 싶다.
오스카 피터슨은 피아노 트리오 편성이지만 레이 브라운의 베이스라던가 에드 틱펜의 드럼 등 멤버 개개인의 기량이 출중할 뿐 아니라, 디테일한 부분까지 녹음이 정확히 포착되어 있어 과연 명연주 명음반이라 불러도 놓을 만한 내용이다. 그런데 HRS로 우선 듣고 그 다음 맨 바닥에 트랜스포트를 내려놓으니 일단 대역이 확 좁아지고, 답답증이 밀려온다. 더블 베이스는 보텀 엔드(bottom end)가 잘리고, 활로 긁는 부분에 힘이 없다. 심벌즈의 울림도 약해서, 건성으로 두드리는 느낌이다. 중간에 흥이 나서 노래하는 부분의 음성이 실종되어 대체 이게 무슨 조화인가 놀라고 말았다.
“호텔 캘리포니아”는 초반부 어쿠스틱 기타의 인트로 부분을 들어보면 배후에 나직이 음향 효과로 처리된 음이 흐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올갠(organ)이 서서히 깔리면서 킥 드럼이 쿵쿵 두 번 울리면 본격적인 음악이 시작된다. 한데, 바닥에 내려놓으면 이런 음들이 평소 듣던 대로 차분히 나오지만, HRS에 올려놓으면 해상력이 확 증가하면서 킥 드럼만 해도 바닥을 두드리는 에너지가 강력하게 나올 뿐 아니라, 어쿠스틱 기타의 울림이나 올갠의 존재감이 확연히 떠오른다. 물론 생기가 넘치는 돈 헨리의 보컬에 이르면 할 말이 없어진다.
제리 멀리건은 어떤가? HRS의 유무에 따라 베이스의 양이나 에너지, 색소폰 파트의 활력, 드럼의 어택감 등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50년대 녹음에 따른 시대적 분위기가 HRS가 개재하면서 더욱 확연해져, 흡사 200g LP로 듣는 듯 자연스러움의 극치를 들려준다.
마지막으로 모차르트. HRS 없이 들으면 적당한 풍요로움을 갖춘 피아노가 흘러나오면서 다소 여성적인 톤의 바이올린이 나온다. 그러나 HRS가 개재하면, 피아노의 텐션이 증가하고, 바이올린의 다이내믹 레인지가 높아지면서 활기를 띠고 노래한다. 이것은 단순히 해상력이나 레인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보다 실연에 가깝고, 피가 끓고, 홀 톤이 잘 살아있는 음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현재 하이엔드 오디오에서 진동과의 싸움은 꽤 퀄리티가 높은 제품을 연달아 탄생시켰다. 그런데 HRS가 들려주는 극적인 변화는 그 어디에 견줘봐도 특필할 만한 내용을 갖고 있다. 만일 호기심이 생긴다면, 우선 소스기기쪽에 한번 도입하길 바란다. 적어도 두 단계 정도는 상승시킨 효과를 느낄 것이다. 이런 받침대 하나로 전체 시스템의 퀄리티가 달라지는 경우는 처음이라 흡사 뭐에 홀린 느낌이지만, 그 확연한 차이에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을 잃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