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잠시 트랜지스터앰프와 진공관앰프의 두 업계를 양분화시켜 놓고 살펴보다 보니 특이한 사실 하나가 발견된다. 하이엔드 오디오계의 기린아로 각광을 받던 인물들이 자신이 구축해 놓은 조직에서 퇴출을 당하는 경우가 우연치고는 좀 눈에 띄게 한쪽에 몰려 있다는 사실이다. 트랜지스터 설계자들이 그렇다. 마크 레빈슨이 그랬고, 넬슨 패스, 다고스티노가 불명예스럽게도 그 뒤를 차례로 잇고 있다. 그로 인해 그들의 가족사 또한 순탄치 않다. 물론, 그들의 창작활동은 그와 무관하게, 혹은 와신상담 그에 힘입어 더욱 불타오르곤 해왔다.

왜 그런 현상이 유독 트랜지스터 진영으로 바이어스 되어 있을까? 필자의 억측이겠지만, 트랜지스터 기반 제품은 양산을 통한 대형화가 상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어쩌다 보니 빠른 속도로 거대해진 조직 내외에 걸쳐 이해관계가 복잡해지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새로운 제품에 대한 운영진의 요구는 커지고 설계자의 선택 폭은 좁아지고, 구구절절 내막은 모르겠지만 대략의 원리는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데이빗 맨리의 명성, 그리고 매머드급 보탄에 대한 시선 등이 있었지만, VTL은 화려한 각광을 받는다거나 뉴스거리를 뿌리는 일을 매개로 해서 오디오파일들과 가까워진 브랜드는 아니다. 오히려 한동안 소식이 안 들려오면 이 회사가 사라진 것이 아닐까 우려한 적이 있었을 뿐이다. 진공관을 소자로 하고 있어서일까? 트랜지스터 업계의 퇴출 같은 우울한 소식 대신, 부친의 대를 이어 가업으로 확산시킨 몇 안 되는 하이엔드 패밀리 비즈니스의 사례가 된다. 소장파임에도 왕성하게 제품 라인업을 늘리는 일 보다는, 뭔가 포인트가 기획되기 전까지는 신중한 모습을 보인다. 그 결과 ‘지그프리드’와 같은 레퍼런스가 만들어졌고, IT-85 같은 제품이 스테디셀러가 되어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의 자료를 찾아보니, 7년 전쯤 본 IT-85에 대한 시청기를 각기 다른 월간지에 쓴 기록이 남아 있다. 서로 다른 시점에 두 번씩이나 필자와 조우를 한 이례적인 제품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기억에 남지만, 그 때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상당히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어서 이번 시청의 감회도 처음부터 상당히 이례적이다. VTL 유일의 인티앰프인 IT-85는 몇 가지 점에서 고유 영역을 갖고 있는데, 사운드 컨셉으로는 맨리와 VTL의 경계에 위치하는 제품이라는 인상을 준다. 맨리의 단골메뉴인 EL-34를 출력단에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관은 약간 다르지만,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본 제품은 VTL의 ‘스팅레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한편, 사운드는 상당히 풋풋하다. 맨리가 클래식하다고 하면 VTL은 낭만적이다. 시청을 해보면 맨리의 분파라고 생각하기엔 많이 다른 소리라는 생각을 누구나 갖게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당히 인체공학적이다. ‘이 정도 소리를 내면, 조금 불편하더라도 고마운 줄 알고 써라’와 같은 투박한 메시지가 아닌, 착하고 친절하며 사려 깊은 디자인이다. 예를 들면 뒷 패널에 경사를 두어 이 곳에 바인딩포스트를 둔 디자인은 최근의 두터운 스피커 케이블 연결을 위한 배려가 돋보이는 감각적인 부분이다. 7년 전, 필자가 ‘말을 매어 놓아도 될 만큼 시원시원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표현할 만큼 속이 다 시원한 디자인이다. 아울러 홀이 넓은 바인딩포스트는 웬만한 굵기의 케이블과 연결시에도 문제가 없어 보인다.

 

기타 상당히 편리한 기능들을 많이 고려하고 있다. 리모콘, 온-오프 시의 자동 뮤트 전환, 풀 프리입력 라인스테이지, 버퍼 프리아웃, 3극-4극 접속 변환 등 곳곳에서 인티앰프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본 제품은 TL-2.5와 ST-85의 결합물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파워앰프인 ST-85의 전원부와 입출력 트랜스를 그대로 가져다 심어놓았으며, TL-2.5의 라인단을 투입시켜 제작되어 있으며 포노단은 옵션이다. VTL의 전 라인업은 디자인의 큰 변화가 있었는데, 본 IT-85 또한 그 컨셉에 따라 디자인이 변경되어 있다. 기존 베이스 위에 형식적(?)으로 세워져 있던 전면 패널을 없애고 투명 패널을 둔 하우징 속에 수납시켜 놓았다. 개인적으로는 표면질감이 살아있는 이전 디자인의 강건함이 좋지만, 매끄러운 표면의 신제품의 세련미에 손을 들어주는 오디오파일들이 많을 듯 하다.

 

초단에 각 2개씩의 12AU7, 12AT7을 사용하고 4개의 EL-34로 출력을 하는 IT-85는 기본적으로 음색과 드라이빙 양면을 상당히 적절히 안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중고역으로 이어지는 음의 감촉이 상당히 감미롭고 매끄러운 동시에, 관의 특성을 감안해볼 때 모노블럭에 가까운 제동력을 보여준다. 고역의 공기감과 여백처리가 깔끔하며, 적당한 살집이 느껴지는 중역의 움직임이 선명하다. 더불어 저역에서도 다이나믹과 해상도가 상당히 잘 나오는 편이다. 양감과 댐핑이 공히 좋아서 펀치감 있고 순발력 있는 베이스이다. 이에 따라서 스피드와 순발력이 고루 필요한 곡에서도 안정감 있는 재생이 돋보인다. 폴 아웃 보이의 ‘Thanks for a Memory’에서 에너지가 순간 끓어오르는 부분의 선열함은 집중력을 잃지 않으며 고루 확산되고 있다. 견고한 바탕 위에서 여유로운 느낌으로 빠른 비트를 몰아가는 모습이 일품이다.

 

한편, 이전 모델에서는 배경이 깨끗하다거나 정적감 등은 다소 평범한 편이어서 보통의 솔리드 스테이트 앰프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했었는데, 본 제품에서는 그런 부분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울러 저레벨에서의 밸런스도 좋은 편이다. 정명훈 지휘의 ‘미사탱고’ 글로리아를 들어보면 이 사이즈와 어울려 보이지 않는 위력적인 사운드가 귀를 번쩍 뜨이게 한다. 특히 투티에서의 낮은 타격음에서 보여주는 강한 훅은 후련함을 안겨준다. 자세히 들어보면 낮은 대역에서도 스피커가 풀리는 순간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댐핑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

‘미사탱고’와 더불어 헤레베헤 지휘의 ‘B단조 미사’ 12곡 Cum Sancto Spiritu는 본 앰프의 양면을 잘 설명해주는 대표적인 곡이 된다. ‘미사탱고’가 주로 중저역의 역동적인 면을 잘 부각시켜준다고 한다면, ‘B단조 미사’는 진공관 특유의 투명한 스테이징과 하모닉스가 잘 살아나는 곡이다. 어딘가 두루뭉실하게 한다거나 해서 모서리를 지날 때 조차 동그랗게 감싸주는 사운드가 아니라 스피디하고 분명하게 몰아가면서도 순간 온기를 안겨주곤 하는 사운드이다. 

 

오디오력이 늘어갈수록 일종의 추세라는 게 있어 보인다. 스피커는 크게, 앰프는 작게.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스피커는 오래된 큰 스피커를 찾게 되고 앰프는 존재감을 잃지 않는 한도에서 어찌됐든 작았으면 싶다. IT-85는 정확하게 그 표준이 되는 사이즈가 아닐까 한다. 맨리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으면서도 최신예 앰프들의 추세를 잘 읽어 반영하고 있고, 과거나 현재 언제나 그리 가리는 장르가 없어 보인다. 최근 대출력 앰프들을 주로 시청하다 보니, 저능률 북쉘프를 통해 들어보면 IT-85에서의 스테이징은 다소 축소되어 들리지만, 그 경우에도 컴팩트한 음상과 정교한 미니어춰의 느낌을 놓치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매우 강렬하고 투명하다는 점이 매력을 더하고 있다.

 

하이파이클럽 시청실에서는 볼륨을 약간 올려야 적당한 시청음량이 되었는데, 약 10시 방향이면 딱 적당해 보였다. 이런 경우를 두고 종종 하는 얘기지만, 진공관앰프에 대한 궁금증이 크고, 솔리드 스테이트의 장점도 살리고 싶은 사용자라면 IT-85 만한 대안이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 갖고 있는 스피커가 아주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최신예 진공관앰프로서 IT-85의 가치는 높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