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오디오파일 앨범 중에 다이렉트 커팅(D2D) 녹음으로 유명한 영국 체이싱더드래곤(Chasing The Dragon)이 내놓은 LP 2장짜리 ‘Vivaldi in Venice’가 있다. 인터프레티 베네치아니(Interpreti Veneziani)가 지난해 6월 이탈리아 베니스의 산 비달(San Vidal) 교회에서 연주한 것을 현장에서 직접 녹음했다. 녹음과 동시에 커팅 머신을 이용, 마스터 LP를 제작하는 D2D 방식은 아니었지만,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동원된 녹음 장비들이다.

우선 메인 마이크로 60년 된 AKG C12 Valve 마이크가 2대 동원됐고, 제1 바이올린을 위해서는 DPA 4006, 첼로를 위해서는 U47 FET 마이크가 추가로 투입됐다. 레코더는 타스캄의 DSD 레코더, 나그라의 PCM 레코더, 스투더의 A810 0.25인치 레코더를 썼다. 마이크 케이블과 파워케이블은 노도스트의 Ax Angel Studio 모델, 밸런스 인터케이블은 덴마크 젠사티(ZenSati)의 Zorro XLR을 썼다.

맞다. 이번 시청기인 젠사티의 Zorro(조로) 밸런스 인터케이블이다. 녹음에 관한 한 거의 결벽증적 완벽함을 추구하는 이들이 그 수많은 인터케이블 중에서 굳이 젠사티 제품, 그중에서도 엔트리급인 조로 XLR을 썼을까 궁금했다. 다행히 체이싱더드래곤을 이끄는 마이크 밸런타인(Mike Valentine)이 한 인터뷰에서 그 이유를 대놓고 공개했다. 거의 젠사티 마니아 수준의 발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수많은 케이블을 테스트하고 써온 결과 젠사티 조로가 최고였다. 우리는 앞으로 완벽한 신호전송을 위해 젠사티 조로를 쓰기로 했다. 내가 들어본 케이블 중에서 착색이 가장 적은 케이블이다.”

젠사티와 조로

집으로 젠사티 조로 XLR 인터케이블이 배달됐다. 박스를 열어 실물을 보는 순간, 예쁘고 강렬한 색감에 정신마저 아찔했다. 특히 양쪽 단자를 수납한 알루미늄 케이싱 마감이 거의 예술 수준이다. 지금까지 여러 케이블을 접해왔지만 이렇게 미끈하고 잘생긴 아노다이징 케이스는 처음 봤다. 오른쪽 하우징에는 작은 글자로 ‘R’(오른쪽 채널)이 쓰여 있다. 케이블 피복을 만져보면 약간 탄력감이 느껴지는데, 유전체로 공기를 활용한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동봉된 취급설명서에는 이 조로 케이블을 “너무 심하게 구부리지 말라”며 그 이유는 ‘공기 유전체와 얇은 도체’(air filled dielectric and folio thin conductor) 때문이라고 쓰여 있다. 무리하게 구부리다 피복에 상처가 나면 공기가 빠져나가고 선재가 끊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밖에 수컷 단자의 3핀 품질도 괜찮아 보인다. 표면을 자세히 보면 알루미늄 봉을 일일이 깎아 세공한 티가 역력하다. 케이블 직경은 비교적 얇은 편인 9mm, 전체 길이는 1.5m다.

필자가 조로 XLR 케이블에 대해 공식적으로 확인한 정보는 이게 거의 다다. 젠사티 홈페이지에 가보면 지난 2017년 출시된 조로 라인업 자체가 아직 올라와 있지를 않다. 궁금증에 다른 라인업을 알아봐도 “젠사티 케이블은 빠른 스피드와 철저히 중립적인 성향을 추구한다.”라는, 필자 입장에서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밖에 없다. 구체적인 정보나 스펙 없이 오로지 직접 듣고 판단하라는 분위기다. 리뷰어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친절한 제작사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젠사티는 마크 요한센(Mark Johansen)이 2009년 덴마크의 블리스트럽에 설립했다. 무엇보다 비싼 가격의 케이블로 유명하다. 인터케이블의 경우 플래그십 실렌치오(Silenzio) 가격이 해외 리테일가 기준으로 2000만원이 훨씬 넘는다. 현재 라인업은 실렌치오, 세라핌(Seraphim), 쉐럽(Cherub), 젠사티 #1, 젠사티 #2, 젠사티 #3, 오센티카(Authentica), 그리고 조로(Zorro) 순이다.

라인업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조로는 젠사티의 엔트리 모델로, 인터케이블을 비롯해 스피커케이블, 파워케이블, 디지털 케이블이 마련됐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도체는 은도금 동선이며, 단자는 모두 덴마크에서 수제작된다. 도체와 단자는 클림프(압착) 타입으로 연결된 후 은 납땜으로 한 번 더 보강을 한다. 미세신호를 다루는 인터케이블인 만큼 전자기장 차폐, 즉 쉴딩 메커니즘이 궁금했지만, 이는 어디서도 확인할 수 없었다.

한편 도체 재질로 순은선, 순동선을 쓰지 않는 것은 젠사티의 확고한 원칙인데 어느 경우에서나 자기 색깔이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젠사티에서는 동선을 바탕으로 중하위 모델(조로, 오센티카, #3, #2)에는 은도금, 중상위 모델(#1, 세라핌)에는 금도금을 하고 있다. 그러나 쉐럽 라인업은 젠사티 #1보다 한 등급 위 제품인데도 은도금 동선을 쓰고 있다. 이는 제품 설계 컨셉트로 보여진다.

시청, 직진하는 젠사티씨

워낙 접한 정보가 적은 만큼, 젠사티 조로 XLR 케이블 소리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케이블이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DAC/프리앰프와 파워앰프 사이에 투입했다. 미국 마이텍(Mytek)의 Manhattan II DAC와 일본 스펙(Spec)의 클래스 D 파워앰프 RPA-W3EX다. 기존에 듣던 케이블은 지금은 일본에서 미국으로 본거지를 옮긴 블랙캣(Black Cat)의 3202 XLR이다. 둘 다 길이는 1.5m. 스피커는 테이퍼드 튜브 설계로 유명한 남아공 비비드오디오(Vivid Audio)의 Kaya 45다.

Andris Nelsons, Boston Symphony Orchestra - Shostakovich Symphony No. 5

Shostakovich Under Stalin’s Shadow

먼저 3202로 들어보니 어둡거나 혼탁한 음이 아니다, 향기와 색채감이 높은음이며, 무겁거나 질척거리는 음도 아니다. 각 음들이 선연하면서도 분주하게 얼굴을 들이민다. 막판 2분여를 남겨두고 불꽃놀이처럼 작렬하는 팀파니가 공기를 뒤흔든다. 바람, 압력, 힘. 이어 젠사티 조로로 바꿨다. 아, 갑자기 시베리아의 넓은 침엽수림이 펼쳐진다. 이 널찍한 사운드스테이지 느낌은 3202보다 좋다. 이 곡에 담긴 강단과 기개와 기세, 찬 바람과 말발굽 느낌이 더욱 잘 전해지는 것이다. 늠름하고 보무가 당당하다. 맞다. 젠사티 조로는 음들을 쓸어 담아 앞만 보고 질주하는 스타일이다. 막판 팀파니 8연타에서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스피커에 불이 붙은 것처럼 펑펑 터진다. 완전히 직진하는 젠사티씨다.

Kacey Musgraves - Space Cowboy

Golden Hour

올해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한 앨범의 베스트 컨트리송상 수상 곡이다. 3202로 들어보면 원래 그렇게 녹음된 것이겠지만 잔향이 장난이 아니다. 마치 교회나 성당에서 녹음된 것처럼 배음이 풍부하다. 달콤하기가 막대 사탕이다. 배고플 때 들으면 큰일 날 노래다. 그리고 입자가 정말 곱다. 젠사티 조로로 바꿔보니 진하고 굵고 중량감이 늘어난다. 이 차이가 큰 것 같다. 에너지감이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해상력은 3202가 나은 것 같다. 또한 젠사티 조로가 약간 뻣뻣한 느낌이 있다. 3202가 뇌쇄적인 퇴폐미가 있었다면 젠사티 조로는 기름기와 설탕기를 싹 뺐다. 입자는 고운 쪽보다는 굵고 분명한 쪽이다.

Bill Evans Trio - Waltz For Debby

Waltz for Debby

3202로 먼저 들어보면 타고났다고 해도 좋을 만큼 공간감이 대단하다. 역시 음이 곱다. 거친 구석이 전혀 없다. 젠사티 조로로 바꿔보니, 무대를 약간 가운데로 모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베이스 연주의 아티큘레이션은 너무나 선명하게 다가온다. 확실히 밸런스가 잘 잡힌 케이블이다. 맞다. 심지였다. 젠사티 조로 케이블은 심지가 단단히 박혀서 어느 곡을 만나서도 파탄이 나지 않는다. 개운한 맛, 음과 공간을 확 풀어주는 맛은 아까 블랙캣이 더 나았지만, 능청스러울 정도로 음원에 담긴 정보를 긁어오는 맛은 지금 젠사티 조로가 더 낫다. 두툼하고 밀도가 높은 중역대와 아주 하늘거리거나 빛나지 않는 고역대를 보면 은선 계열은 분명히 아니다.

이밖에도 몇 곡을 더 들어봤는데, 정리해보면 젠사티 조로 XLR 소리는 이랬다.

1) 음악에 담긴 핵심을 곧바로 찔러간다. 쇼스타코비치 5번 4악장이 그 대표적 예다.

2) 진하고 굵은 음, 심지가 단단히 박힌 음이다. 음들이 용암처럼 분출한다.

3) 칼같은 해상력과 고운 입자감, 예쁜 소리에 목숨을 건 스타일은 아니다.

4) 하지만 음원에 담긴 정보를 모조리 긁어온다. 안네 소피 폰 오터의 ‘Baby Plays Around Here’가 그 증거다.

5) 은선 계열 소리는 아니다. 확실히 동선에 가깝다.

6) 밸런스가 잘 잡혔다. 이를 뉴트럴(neutral)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7) 음의 윤곽선이 분명하다. 제시 쿡의 ‘Vertigo’에서는 몽골 초원에 부는 바람, 중원에 나부끼는 깃발이 느껴진다.

케이블 음질을 결정짓는 변수 몇 가지, 총평을 대신해서

젠사티 조로는 어디 흠잡을 데가 없는 케이블이었다. 에이징이 되면 더 놀라운 실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면 젠사티 조로가 어떻게 다양한 모습으로 전체 오디오 시스템에 영향을 준 것일까. 필자가 지금까지 파악해온 인터케이블의 특성을 바탕으로 그 배경을 추론하면 이렇다.

우선 인터케이블은 미세전류가 흐르고, 연결하는 두 기기의 입출력 임피던스가 스피커케이블보다 훨씬 높다는 점에서 케이블의 저항(resistance)보다는 커패시턴스(capacitance)에서 그 음질적 승부가 난다. 왜냐하면 커패시턴스값이 높아질수록 그리고 주파수가 높아질수록 교류 신호는 케이블 내 절연체를 통해 쉴드선으로 빠져나가고 이는 곧바로 음질 왜곡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통상 인터케이블 선재와 플러그(단자)를 접합시킬 때 출구 쪽 쉴드선을 플러그와 단락시키는 이유도 이 커패시턴스를 조금이라도 낮추기 위해서다.

절연체도 중요하다. 케이블은 기본적으로 선재(conductor)를 절연체(insulator)가 감싸는 구조다. 절연체는 당연히 전기가 통하지 않지만, 선재에 전기가 통할 경우 절연체를 이루는 원소들의 핵(+)과 전자(-)가 일제히 분극(+,-,+,-,+,-....) 되는 현상이 문제다. 지금 당장은 전기가 통하지 않지만, 그 속의 원자들은 언제든지 전기가 통할 준비, 즉 절연체에서 도체로 언제든 배신할 준비가 된 것이다. 이 현상이 바로 ‘유전’(dielectric)이며, 절연체는 당연히 이 유전율이 낮을수록 좋고, 절연체 중에서 공기의 유전율이 가장 낮다.

결국 젠사티 조로 인터케이블이 시청 내내 중립적이며 밸런스 잡힌 소리, 그래서 곡에 따라 천변만 변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바로 젠사티가 커패시턴스를 최소화했고, 공기층을 유전체로 적극 활용한 덕분으로 보여진다. 블랙캣 케이블도 마찬가지지만 젠사티가 비교적 얇은 두께의 선재(folio thin conductor)를 쓰는 것은 바로 이 커패시터를 최소화하려는 설계로 보여진다. 또한 크림프와 은납땜을 모두 이용한 도체와 선재의 독특한 결합방식은 케이블의 저항을 낮추는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반납을 앞두고 젠사티 조로를 한 번 더 들었다. 에릭 클랩튼의 라이브 음원 ‘Wonderful Tonight’(24 Nights)이다. 무대와 객석의 공간감이나 기타 연주의 디테일, 여성 코러스와의 거리감 등이 모두 잘 전해진다. 사실 젠사티 조로를 처음 들었을 때는 눈에 확 튀는 오디오적 쾌감이 없어 당황했다. 그러니까 화사한 해상력(블랙캣), 적막한 배경(올닉), 투명함(에콜), 촉촉함(텔루륨Q) 같은 브랜드별 특성이 약했던 것이다.

하지만 에릭 클랩튼 곡을 들으며 확신했다. 어느 곡을 만나서도 밸런스가 틀어지지 않는 모범생, 재즈 팝 록 클래식 등 음악 장르와 볼륨 값에 따라 그 얼굴이 확확 변하는 야누스. 그러면서 음악이 끝날 때까지 모든 음들을 쓸어 담으며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인터케이블이 바로 젠사티 조로였다. 이 케이블은 화사함, 적막함, 투명함, 촉촉함을 따질 겨를도, 따질 생각도 없었던 것 같다. 대단한 케이블을 또 하나 알게 됐다. 

김편 오디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