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FICLUB, High-end Internet

싱글 크리스탈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고속도로 위로 자동차를 올렸다. 액셀 페달을 밟으려했지만 고속도로에 올라서기도 전에 브레이크를 밟기 바쁘다. 앞을 봐도 옆을 봐도 모두 짜증 섞인 얼굴로 전방을 주시한다. 엑셀과 브레이크에 발을 밟고 떼기를 반복하는 시간. 이제 민족의 명절 설을 앞둔 시점에 작년 이맘때를 생각해보면 머리가 질끈 아파온다. 다시 또 그 교통지옥을 겪을 생각을 하면 명절이 야속하기만 하다. 게다가 교통지옥이 좀 풀릴만하면 나타나는 톨게이트 교통 체증은 교통 체증의 핵심이다. 

케이블의 품질을 결정짓는 것은 매우 다양하다. 도체의 종류, 도체의 순도 그리고 절연 소재와 절연 방식, 차폐는 물론 맨 바깥쪽에 씌우는 피복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많다. 매우 단순해 보이는 케이블이지만 실제 그 속내를 보면 매우 다양한 소재들이 엉켜있으며 심지어 단자의 소재와 모양 그리고 케이블과의 터미네이션까지 이 복잡다단한 물건의 특징을 결정짓는다. 아무런 전자기적 방해물 없이 매우 빠른 속도로 순도 높은 신호를 전달할 수 있다면 이건 마치 고향길 교통체증이 일거에 해소되는 장면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쉬울 것 같은 그 길은 그다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분야 엔지니어들은 끊임없이 이 체증을 해소해나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중 케이블의 도체에 관한 한 OCC 는 매우 커다란 진보를 안겨주었다. 과거 일본 후루텍에서 제조하기 시작한 단방향 결정 도체는 동선 및 은선을 가리지 않고 이 분야에서 커다란 이슈가 되었다. 그리고 이 OCC 결정 구조를 오디오용 케이블에 선도적으로 적용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사람이 로버트 리(Robert Lee)라는 사람이다. 로버트는 싱글 크리스탈(Single Crystal)이라는 이름의 도체를 활용해 기존 OFC와는 완벽히 차별화된 케이블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아마도 밀레니엄 전후 시절부터 하이엔드 케이블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던 오디오파일이라면 분명 하모닉 테크놀로지 그리고 어쿠스틱젠 같은 케이블을 기억할 것이다. 바로 이 두 개 메이커의 핵심 엔지니어가 로버트 리다. 6N, 심지어 7N급 고순도 도체를 동과 은을 가리지 않고 제작해냈고 톨게이트 효과처럼 신호의 흐름을 막는 불균질한 결정을 규칙적으로 배열시켜 결정과 결정 사이 생기는 그레인 면적을 최소화했다. 이를 하모닉 테크놀로지는 OCC 대신 싱글 크리스탈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정의해 고품질 케이블을 생산해냈다. 

하모닉 테크놀로지의 르네상스

하지만 한동안 하모닉 테크놀로지를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 그 사이 로버트 리는 어쿠스틱 젠을 차려 분가했고 여러 진보적인 케이블 메이커들이 출현했다. 킴버, 오디오퀘스트, 카다스, 실텍, 반덴헐 같은 메이커는 이제 거대 메이저 메이커로 성장했고 이를 뒤쫓는 후발주자들이 두서없이 나타나 시장을 호시탐탐 노렸다. 그러나 과거 하모닉 테크놀로지의 Magic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의 실력에 대한 의심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하모닉 테크놀로지가 새롭게 정비하고 나타났다. 아니, 그들은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고 국내에 소개될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이다.

최근 하모닉 테크놀로지의 라인업을 살펴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잊고 지낸 사이 과거 기억 속의 라인업은 모두 사라졌고 그 자리에 신형 케이블이 도열하고 있었다. 그 중 운 좋게 플래그십 스피커 케이블이 나의 손에 들어왔다. 거대한 굵기와 엄청난 텐션을 가진 이 케이블은 스피커에 체결하기가 무척 힘들 정도였다. 다름 아닌 Pro-7 Reference Armour다. 이 엄청나게 두텁고 매우 무거우면서 동시에 잘 꺾이지 않는 케이블의 정체가 과연 내가 기억하는 하모닉 테크놀로지인지 의심스럽지만 그만큼 이들은 몬스터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직감했듯 내부는 네 개의 에어 튜브가 지나가고 있었다.

Pro-7 Reference Armour의 내부엔 총 네 개의 튜브가 들어가 있으며 두 개의 큰 구경, 두 개의 작은 구경 튜브로 구성되어 있다. 튜브 소재는 폴리에틸렌. 우선 커다란 구경의 튜브는 두 겹의 싱글 크리스탈 구조 OCC 리츠 타입 동선이 감겨있으며 테플론이 그사이를 겹겹이 감싸 절연시켜주고 있는 모습이다. 나머지 두 개의 튜브 또한 폴리에틸렌 소재로서 여기에도 역시 싱글 크리스탈 OCC 케이블이 감겨있다. 하지만 여기엔 은을 도금한 리츠 타입 고순도 동선이 감겨있다. 동선과 은도금 동선이 각각의 튜브를 중심으로 감겨있고 테플론 테이프로 겹겹이 감겨있는 모양. 괜히 잘 꺾이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 외부는 모두 면으로 채우고 종이로 감싸고 있으며 외부는 PVC를 두 겹으로 다시 감쌌다. 

하모닉 테크놀로지 Pro-7 Reference Armour는 그들이 애초에 던졌던 도체에 관한 신념 그리고 절연 및 차폐 등에 관한 기준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몰고 간 케이블이다. 타협이 없는 만큼 케이블 굵기는 매우 굵어졌고 매우 무거워졌으며 잘 휘어지지 않는다. 이번에 만난 Pro-7 Reference Armour는 양쪽 모두 말굽 단자로 조금의 완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아주 가벼운 북셀프를 스탠드 위에 올려놓고 사용한다면 체결시 조심할 필요가 있으며 앰프의 경우 주변에 어느 정도 공간이 필요하다. 말굽 단자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손으로만 조이면 쇼트의 위험이 있으므로 스패너 등을 활용해 단단히 체결할 필요가 있다. 

셋업 & 리스닝 테스트

Pro-7 Reference Armour 케이블을 처음 테스트하기 시작한 건 약 한 달 전. 나의 개인 리스닝 룸으로 가져와 다인 C4 및 베리티오디오 피델리오 앙코르와 매칭해보면서 에이징을 거쳤다. 이 케이블은 꽤 오랜 에이징 시간을 요구한다. 처음 연결 후 일주일 내에 이 케이블의 성능을 그대로 단정 짓는다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결국, 마지막 테스트는 하이파이클럽 시청실에서 이루어졌다. 스피커는 소너스 파베르 Amati Tradition. 앰프는 오디오 리서치 레퍼런스 10 프리앰프와 레퍼런스 160M 모노블럭을 사용했고 소스기기로는 dCS 비발리 원 외에 앞 단에 웨이버사 시스템즈의 W 라우터/W 코어 콤비를 활용했다.

A.M.Jopek, Pat Metheny - Cichy zapada zmrok

Upojenie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모닉 테크놀로지의 과거 사운드 특징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일 만큼 새로운 DNA를 확보한 모습이다. 무척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사운드를 재생했던 구형과 달리 신형, 그것도 레퍼런스급 스피커케이블 Pro-7 Reference Armour는 화창한 봄 하늘처럼 쾌청하고 화사하다. 안나 마리아 요펙과 팻 메스니의 ‘Cichy zapada zmrok’같은 레코딩을 들어보면 전체적인 토널 밸런스가 밝은 편으로 전체 시스템을 장악하며 숨어있던 작은 소리 입자까지 모두 수면 위로 남김없이 길어 올려 뱉어낸다. 대게 이 곡의 경우 중, 고역이 날카롭게 들리기 일쑤고 건조한 사운드를 내는 케이블의 경우 매우 피곤하게 들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다행히 밝고 해상력이 굉장히 높은 Pro-7 Reference Armour지만 매우 빠른 속도의 어택 이후 높은 대역까지 순발력 넘치게 치고 올라가면서도 피로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Zhao Peng - The Moon Represents My Heart

The Greatest Basso

Pro-7 Reference Armour는 대단히 짜릿한 쾌감과 미세한 입자감으로 리스닝 룸을 촘촘히 자신의 색깔로 메운다. 특히 고역에서 중역, 저역에 이르기까지 해상력 및 다이내믹 컨트라스트는 그 어떤 레퍼런스 케이블에 비해서도 뒤처지지 않는다. 함께 비교했던 레퍼런스 레벨의 케이블에 비해서도 이런 세부표사, 디테일은 더 우위에 있다. 파트리샤 바버의 보컬이나 로버트 플랜트의 레코딩에서도 중, 저역 부근에서 번지거나 뭉개지는 법 없이 매우 뚜렷하고 응집력 높은 사운드를 들려준다. 시종일관 극도의 투명도뿐만 아니라 텐션 넘치는 물리적 특징이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든다. 예를 들어 조붕의 ‘The moon represent my heart’같은 곡에서 3웨이의 중후한 느낌은 사라지고 정전형에 가까운 간결하고 깨끗한 ‘인간 우퍼’로 변모한 모습이다.

Herbie Hancock - Chameleon

Head Hunters

저역 쪽 해상력은 탑 클래스며 전반적으로 매우 정숙하고 단정하게 조여진 사운드다. 예를 들어 허비 행콕의 ‘Chameleon’에서는 오디오리서치의 다소 두툼한 저역을 바늘도 들어갈 틈 없이 단단하고 텐션 넘치게 보완해준다. 워낙 단정한 중, 저역은 다소 정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으나 힘찬 추진력과 리듬, 페이스 & 타이밍을 통해 시스템 전체 사운드를 역동적으로 이끌고 나간다. 대체로 중역과 저역의 이런 느낌은 최초 들었을 때와 어느 정도 에이징 이후에 가장 큰 차이로 감지된다. 처음의 약간 들뜬 고역과 딱딱했던 중역은 이후 착 달라붙는 촉감과 디테일로 승화되어 코히어런스 측면이 안정화 단계로 접어드는 과정을 낱낱이 목도할 수 있었다.

Gustavo Dudamel - Mahler: Symphony No. 5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중, 저역 쪽은 매우 단단하고 손으로 움켜잡은 듯 응집력이 뛰어난 스타일이다. 한편 그 양감은 조금 적되 반대로 깊이를 깊게 끌고 내려가는 타입으로 저역 해상력 및 마이크로 다이내믹스 측면에서 후한 점수를 줄 수 있다. 전반적으로 매우 민첩하고 고역은 활짝 열려 있으며 악기의 표면 질감을 한 터럭도 남김없이 표출해내므로 3차원 홀로그래픽 음장감은 무척 뛰어나다. 예를 들어 두다멜 지휘 말러 교향곡 5번을 들어보면 소름 돋을 만큼 선명한 포커싱과 악기의 정위감이 약간 어지러울 정도로 입체적으로 그려지는 모습이다. 각 악기들이 워낙 빠른 스피드로 일산 분란하게 움직이지만 초점이 흐려지거나 사운드스테이징이 뭉개지는 일은 없다. 다만 숨 쉴 틈이 살아 꿈틀거리는 역동감 덕분에 긴장감이 상당히 높다.

총평

오랜만에 다시 만난 하모닉 테크놀로지는 과거 그들의 모습에서 완벽히 일신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라는 것인가? 아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도체 부분에서 공통분모를 가진다. 그러나 지오메트리 등 상당량의 새로운 염색체를 내면화해 새로운 사운드스펙트럼을 창조적으로 만들어낸 하모닉 테크놀로지다. 스피커로 치자면 매지코의 트위터나 더 나아가 베릴륨 유닛을 연상케 할 정도로 칼날 같은 포커싱과 빤짝이는 표면 음결 등 현대 하이엔드 오디오의 기류 위에 서 있다. 

이런 측면은 오히려 스피드 완급 조절이 늘어지거나 응집력, 마이크로 다이내믹스가 떨어지고 굼뜬 시스템에 들어갔을 때 그런 약점을 일거에 해소해줄 수 있는 능력을 시사하기도 한다. 앰프로 치자면 구형 A 클래스 앰프를 사용하다가 코드 일렉트로닉스 같은 앰프를 사용했을 때의 충격과 비교할 수 있겠다. Pro-7 Reference Armour는 그 모델명처럼 총알도 뚫지 못할 만큼 단단한 갑옷을 걸치고 음악 속으로 선명하게 진군하고 있는 모습이다. 현지 가격을 생각할 때 가격 대비 성능은 대단히 높은 편으로 약간 힘든 셋업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제 가치를 톡톡히 하고 있다. 

Written by 오디오 칼럼니스트 코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