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커史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걸작품. 먼훗날 20세기의 마지막을 살아간 인류문명의 흔적을 대별하는 표본이 되어있을 지도 모른다. 이 스피커가 갖는 의미는 인클로저의 공명이라는 스피커의 기본개념을 해체시켜서, 정전기로 얇은 플라스틱판을 진동시킨다는, 게다가 스피커의 앞과 뒤 양쪽으로 소리를 확산시킨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도입시킨데 있다.
쿼드社의 가장 큰 특징은 모델의 다양화없이 한번 개발한 제품은 일단 장수시킨다는 점이며, 이 스피커에서도 그런 사실이 잘 드러난다. 50년대 중반에 ESL이 처음 출시됐을 때, 업계에서 'Wonder'라고 반응했던 만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양면방사형의 새로운 설계를 시작한 1963년(제품명에 나타난)을 원년으로 해서, 90년대에 와서야 지금의 모습대로 완성이 이루어졌다. 쿼드사의 철학대로 약 30여년에 걸쳐 진화를 거듭한 모델이 바로 ESL 63하고도 Pro버전이다. 평면전체의 진동을 이용한 일종의 풀레인지형이므로 위상차는 존재하지도 않고 스피커뒤쪽에 형성되는 가상의 음원으로부터 펼쳐지는 球面波속에서 자리잡는 음상정위는 독특한 질감과 함께 이 스피커만이 갖는 매력이다. 필립스에서는 이 스피커를 오래도록 마스터링 모니터로 사용해 왔고, 유럽제에 대해 배타적이고 취향을 달리하는 미국의 오디오메이커들에 의해서도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아울러 미국의 리본형, 평판형 스피커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재생음의 질을 차치하고라도 이 스피커의 공로는 큰 것이다.
오디오의 라이프싸이클은 갈수록 짧아지기만 한다. 오디오업체들의 막대한 물량공세 앞에서 사용자의 갈등은 깊어가고 3년주기설도 길기만 하다. 독특한 디자인과 재생원리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세대를 뛰어넘어 가정과 스튜디오에서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스피커야 말로 기계의 모습을 한 철학자가 아닌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