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30년 동안 이런저런 공연을 보았습니다.
거의 쟝르불문입니다만... 예외는 있습니다.
비디오나 DVD룰 통해서는 보지만 절대 공연장에는 가지않는... 그것은 발레공연입니다.
오늘 7시에 아람극장에서 마린스키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공연이 있습니다.
진즉 티켓을 두 장 예매했는데... 아내와 선용이보고 가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말합니다.
'나는 가면 졸기나 할텐데...좋아하는 당신이나 가라.'
살다보면 양보못할 일들도 있는 법이지요.
단호히 말합니다.
'나는 많이 다녔잖아. 세계적인 발레단이야. 재미있다니까. 선용이랑 맛있는 저녁도 먹고...'
속 모르는 아내는 내심 좋아하며 말합니다.
'나는 발레 잘 모르는데... 알았어. 다녀올게...'
정확히 30년전, 그러니까 1980년 초여름.
당시 고3이던, 암것도 모르는 저는 가까운 친구와 싱갱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광일 - 밴드부였던, 술 잘 마시고 얼굴이 희던... 한 잔 하고 기타를 튕기며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을 부르는 모습은 정말 예술이었던...
동아일보 다니는 형을 둔 광일이는 형에게서 발레 티켓 두 장을 얻어와서는
함께 가자고 조르는 겁니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영국의 새들러스 웰즈 로열발레단. 젤 비싼 2만원짜리 티켓.
터프한게 남자다운 것으로 착각했던 저는 친구를 윽박지릅니다.
'야~ 딱 붙는 타이즈 입고 나와서 춤추는 그거, 기집애들이나 보는거지. 난 절대 안가.
그리고 사내놈들끼리 그거 보러 가는거, 생각만해도 웃긴다.
여자애 하나 꼬셔서 같이 가!!'
광일이는 작전을 바꿉니다.
'야, 그럼 여자라도 하나 만들어내...'
이런 미친 놈!! 속에서는 욕이 나오지만, 머리는 쌩쌩 돌아갑니다.
나중에 재수해서 서울대 국악과에 간 서혜숙이 퍼뜩 떠오릅니다.
그래, 혜숙이를 보내자. 2만원짜리 티켓인데...
광일이는 좋아 죽고... 혜숙이는 의외로 담담하게 승락합니다.
괜히 저는 서운합니다.
당시 혜숙이는 저와 가까운 친구이기는 했지만, 그냥 단순히 친구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애인 혹은 여자친구라고 말할 수도 없는, 친구와 연인 사이쯤이었지요.
보통키에 날씬한 몸매, 항상 밝고...웃는 모습이 썩 귀여운 그런 소녀였습니다.
사실 객관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혜숙이는 참 매력적인 아이였지요.
그럼에도 제가 적극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은 것은 오직 혜선이 때문이었습니다.
서혜선 - 혜숙이의 한 살 아래 여동생. 혜숙이보다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예쁘고...^^*
가끔 혜숙이네 집에 놀러가면 거의 혜선이가 있었고... 오빠오빠 하며 저를 졸졸 따라다녔지요.
하여간 해가 바뀌었고, 혜숙이도 혜선이도 그후로는 아직 한 번도 보질 못했습니다.
예전에는 가끔 그니들이 생각나곤 했드랬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혜숙이는 얼굴도 웃는 모습도 목소리와 옷차림까지도 선명한데...
혜선이는... 전혀 떠오르질 않습니다.
'오빠, 내가 피아노 칠테니까 오빤 기타쳐~.'
기타를 가져다주며 하던 말외에는...
나는 그니들을 사랑했던 것일까요?
사랑했다면 과연 누구를 사랑했던 것일까요?
발레공연을 가지 않는 것은 나의 트라우마인가요?
가을은 깊어가고 잡생각도 깊어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