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바이올리니스트

안 재 휘

나는 여성 연주자를 유독 좋아한다. 재즈를 들어도 여성 보컬을 유난히 즐겨 듣는다. 빌리 할리데이, 엘라 피츠제랄드, 사라 본은 물론이고 주리 런던이나 헬렌 메릴도 좋고 최근의 멜로디 가르도트나 잉거 마리 등 유별나게 여성 보컬을 좋아한다. 성악에서는 딱히 그렇지는 않은 듯 하지만 피아노든 바이올린이든 기악 연주자도 여성 연주자라면 흥미가 더해진다. 그래서 제목부터 신중하게 적었다. 처음에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했다가 이내 ‘여성’으로 바꿨다. 웬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류’라는 단어는 여성을 다소 낮게 비하하는 것이란 얘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간호사를 간호원으로 부르다가는 호되게 대가를 치르기도 한단다. 어쨌든 나는 여성 음악가들을 이렇게 좋아라하니 그럴 일은 없어 행복하다.

바이올린이란 악기는 참 묘한 매력을 가진 악기이다. 생김새도 우아하고 깜찍하지만 그 소리는 더 매혹적이다. 악기 중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악기의 대표격인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때때로 비교 대상이 되곤 한다. 대부분의 중론이 피아노가 선율악기인 동시에 화성악기로서 보다 더 우수하다고들 하기도 한다. 우수하다는 것이 물론 더 존재가치가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고 음악의 표현 영역이 더 넓어서 감상자의 입장에서 더 많은 정보를 전달받을 수 있다는 것일 것이다. 나는 모든 다른 악기도 좋지만 바이올린을 참 사랑한다. 아마도 내가 처음 클래식 음악을 접한 것이 바이올린이어서 인지도 모른다. 이십 초반 처음 본격적으로 클래식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른바 소품을 별로 듣지 않았다. 그렇다고 수준 높은 대곡은 들을 능력이 되지 않았을 터이고 어찌해서 인지 바이올린 협주곡들을 주로 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바이올린 음악을 들으면 그 때가 생각나곤 한다.

바이올린 소리에는 어딘지 집시풍의 느낌이 있다. 몇몇 영화에서의 선입견 탓도 있지만 다소 ‘방만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흐드러진다’, ‘찐하다‘라고 표현해야 하나 아무튼 농염한 짙은 장미향의 정서가 배어 있다. 그렇다고 바하의 바이올린 곡에 이런 정서가 있다는 것은 아니고 이면에 또 다른 이런 느낌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렌드바이나 라카토시 같은 사람들로 대표되는 집시 바이올린이란 장르가 따로 있다. 그리고 치고이네르바이젠이나 치간느 같은 곡들이 모두 집시라는 단어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바이올린 연주자들 중에는 여성 연주자가 많다. 어쩌면 많다기보다는 잘 하는 연주자가 많은 것일지도 모른다. 일단 에리카 모리니(1904-1995)가 있다. 당시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들을 나이 순으로 열거해 보면 지오콘다 데 비토(1907-1994), 지네트 느뵈(1919-1949), 로라 보베스코(1921-2003), 요한나 마르치(1924-1979), 미셸 오클레르(1924-2005), 이다 헨델(1928- ), 까밀라 비크스(1923 or 28- ) 등이 있다. 아무리 서양이라고 해도 당시 사회에서 여성들에게는 아무래도 기회가 덜 주어졌는지 이들의 녹음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요즘 LP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수집 목표물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특히 요한나 마르치의 경우는 EMI의 저명한 프로듀서 월터 래그의 은밀한 성(性)요구를 거절하여 EMI를 떠날 수 밖에 없어 더 녹음이 귀하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이 단순히 여성이었기 때문에 세간의 주목을 더 받은 것 같지는 않고 오히려 실력에 비해 턱없이 손해를 받은 것이 확실하다. 그 이유는 지네트 느뵈의 경우를 보아도 분명하다. 그녀는 1935년에 16세의 나이로 비니아프스키 콩쿨에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를 2위로 밀어내고 당당히 1등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그 대회에서 이다 헨델은 7세의 나이로 너무 어려서 특별상을 받기도 한다. 물론 느뵈의 경우는 서른이라는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녹음이 적었기도 했지만 보베스코나 르클레르 등 대체로 남성 연주자들에 비해 활동이 제한적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 이후 상당 기간 훌륭한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의 출현이 없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정 경화(1948- )라는 걸출한 연주자가 세상에 그 존재를 알리게 된다. 이 사건은 보다 더 나중에 나타난 안네-소피 무터(1963- )의 출현보다도 더 임팩트가 강했을 지도 모른다. 다시 그 이후로 무터를 포함 뮬로바(1959- ), 레이첼 포저(1968- ), 미도리(1971- ), 힐러리 한(1979- ), 장 영주(1980- ), 율리아 피셔(1983- ) 등이 면면을 이어 오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여성 연주자의 곡들 중 브람스 협주곡을 연주한 이가 여럿 있다. 이다 헨델과 요한나 마르치, 지네 느뵈, 데 비토가 동일곡을 연주하고 있다. 또 요즘의 여성 연주자들로서는 포저와 한의 음반도 있다. 지난 시절 이들의 연주는 가히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를 들었고 하이페츠, 코간을 들었다. 그렇지만 그녀들의 연주는 이 걸출한 연주자들의 연주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 같다. 반면 포저나 한의 연주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포저의 연주는 마치 독주자가 펑크를 내서 오케스트라 악장이 대신 연주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카덴차 부분의 기교는 다른 연주자에 비해 뒤지지 않지만 자신을 과시하는 부분이 아닌 곡 전체를 이끌어 가는 능력이나 오케스트라와의 앙상블은 더 이전의 연주자에 사뭇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아직 정 경화나 무터의 브람스를 듣지 못했다. 최근 무터의 브람스 소나타는 들어 보았는데 진한 감수성을 보았다. 소위 ‘비의 노래’라고 불리는 1번을 비 오는 여름 내내 듣고 또 들었다. 어쨌든 젊은 연주자들의 연주를 좀 더 들어 보아야겠다. 브람스 협주곡의 절창은 느뵈라고 알려진 만큼 과연 기가 막히게 아름답다. 반면 마르치는 보다 더 우아하고 비토는 선이 굵은 울림이었으며 헨델의 경우 호소력이 남달리 짙게 남겨지는 등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명연이다. 브람스 협주곡은 연주하고 있지 않지만 에리카 모리니의 바흐나 보베스코의 비오티도 건너 뛸 수 없는 격조와 열정을 가득 담고 있다. 처음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에게 관심을 갖게된 동기는 마르치가 연주하는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후 LP를 포함한 여러 음반들을 들어오고 있는데 내가 이들의 연주를 평가할 위치에 있지는 않다. 오클레르는 아직 들어 보지도 못했고 비크스는 최근에야 글라주노프 협주곡과 브람스 소나타 등이 담겨있는 CD를 갖게 되었다. 지금 내 사무실에서는 비크스의 브람스 소나타 1번이 흐느끼고 있다.

이제 바야흐로 가을의 문턱에 서서 브람스와 함께, 바이올린과 함께, 또 이 여성 바이올리니스트들의 고고한 자태를 곁에 두고 싶다. 솟구치는 희망의 비상을, 심연까지 침잠하는 아픔의 나락을, 때로는 고양하고 또, 때로는 위무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