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굴드 - A State of Wonder
글렌 굴드 - A State of Wonder
안 재 휘
오래 전에 작성했던 옛 문서들을 정리하다가 그 당시 내 필적을 보고 색다른 감회에 빠졌다. 당시 나의 상황과 또 주변 사람들의 모습들도 함께 떠올라서 잠시 과거의 모습을 더듬으며 회상에 잠겨본다. 이런 막연한 회상은 흑백 사진과 같은 묘한 에스프리를 느끼게 해 주지만 실제의 당시를 구체적으로 그려내지는 못하는 것 같다. 과거에의 회상이란 그 당시의 실제 상황보다는 더 아프게, 아니면 더 아름답게 그려지는 법이다. 그런데 나의 옛 필적을 보았을 때는 느낌이 아닌 확실한 실상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회상으로는 미치지도 못할 강력한 힘으로 나를 과거로 오롯이 돌려놓아 준다. 마치 명백한 물증 앞에서 쩔쩔매는 범인이 되어 버리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연주자들은 어떤 심경으로 그들의 과거 녹음들을 접할까? 음악이란 재연예술이라 동일한 작품을 얼마든지 다시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장르이다. 대부분의 공연예술이 이에 해당하겠지만 역시 음악이 가장 대표적인 재연예술인 것이다.
얼마 전, 기획 음반으로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그 변주곡 연주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서 ‘GLENN GOULD A State of Wonder' 라는 제목으로 출반한 것이 있다. 매우 흥미 있고 나름 가치 있는 기획이 아닐 수 없다. 글렌 굴드(Glenn Gould, 1932-1982)는 이 곡을 1955년과 1981 두 번 녹음하였다. 1955년 녹음이 그의 데뷔 음반이었고 1981년 것이 마지막 녹음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게다가 그는 재녹음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까지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골드베르그에 유달리 관심을 가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거기에다가 그도 나처럼 자신의 옛 자취를 접하고 모종의 회한에 사로잡혔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알려진 대로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으며 거의 기인에 가까운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6월에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털장갑을 끼고 녹음실에 나타나고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없다면서 생수를 직접 가지고 오는가하면 5개의 약병과 고무로 발을 단 자신의 의자를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그는 1964년 LA에서 마지막 콘서트를 하고는 무대에서 사라져 버린다. 이후 오직 음반으로만 세상과 소통하였다. 사실 그는 본질적으로 청중을 싫어했다고 하니 이런 매우 이른 은퇴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런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음악에 대한 집중력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이 음반의 제목은 그의 예술관을 피력하는 말 ’예술의 목적은 아드레날린의 순간적 방출의 결과가 아니라 경이로움과 평온함의 상태(a state of wonder and serenity)를 점진적이고도 일생동안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에서 따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일생동안(lifelong) 구축한 골드베르그는 어떠한지 살펴보자.
일단 총 연주 시간을 보면 그의 연주 스타일을 감안할 때 대강의 줄거리를 상상할 수 있다. 55년 첫 녹음은 38분 26초, 81년 녹음은 51분 14초이다. 첫 번째 아리아만 보아도 각각 1분53초와 3분 5초이다.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 시간과 비교해 보아도 굴드의 연주는 엄청나게 빠른 또는 짧은 연주이다. 로잘린 튜렉의 경우 76분 1초(88년), 91분 10초(98년)이며 그녀의 하프시코드 연주도 90분이 넘는다. 앙타이도 78분 40초, 또 최근의 코롤리오프는 1시간 24분 52초인 점을 볼 때 굴드의 연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연주시간이다. 앞서 빠른 또는 짧은 연주라고 말한 것은 굴드의 연주가 단지 빠르기만한 연주는 아니라는 것이다. 연주가 빠르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반복을 생략해 버린 연주라는 것이다. 이는 굴드의 바흐 음악에 대한 해석과 연구의 결과일 것이고 듣는 사람들의 호 불호는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다. 젊은 시절 그가 단지 여지껏 수많은 사람들이 연주해온 스타일을 떠나 독특한 골드베르그를 남기고 싶은 치기로서 그렇게 하였을까?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흔히 그렇듯이 성급하고 주목을 받고 싶은 공명심에서 색다른 해석을 하게 된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는 아닐 것이고 적어도 그것은 굴드의 바흐 음악에 대한 해석과 연구의 결과일 것이다. 물론 골드베르그의 명연주자로 잘 알려져 있는 로잘린 튜렉은 음악에 있어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의 범위를 거의 인정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것 자체도 이미 주관적인 견해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논쟁은 연주라고 하는 음악의 재창조 행위에 있어서 해결될 수 없는 오래된 숙제인 것이다. 원전연주 또는 시대연주라고 하는 것도 사실 당시의 연주 형태를 그대로 재현한 것인지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너무 많이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수수께끼는 그의 81년 연주이다. 그렇다면 그는 26년이 흐른 뒤에 자신의 해석을 뒤엎을 만한 견해를 새로이 마련하였을까? 또는 나이를 먹고 죽음을 앞두고 다른 연주자들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추측컨대 그런 것보다는 이것 자체에 음악의 해석 및 연주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카알라일은 역사학자의 특권을 지난 시절의 위대한 인물에 대해 내 마음대로 평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다른 사학자는 모든 역사는 근대사라고 하였듯이 지금의 내가, 지금의 연주자가 해석한 음악이 곧 해당 음악의 원형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한다. 골드베르그 변주곡은 바흐의 교육적 목적이 구현되어 있는 ‘클라비어위붕’ 4부작중의 마지막을 차지하고 있는 곡이다. 파르티타 6곡, 이탈리아 콘체르토/ 프랑스 서곡, 오르간 미사 등으로 구성된 이 위대한 작품을 종합적으로 공부하고 싶으나 내게는 아직 무리인 듯 생각만큼 실행이 따르지는 않고 있다.
어쨌든 나는 지금 골드베르그를 듣고 있다. 55년의 글렌굴드를, 또 81년의 글렌굴드를, 또 로잘린 튜렉을, 앙타이를, 코롤리오프를. 그리고 이 모두가 존경하는 요한 세바스챤 바흐일 뿐인 것이다.
오직 경이로움과 평온의 상태에서... (2009. 11. 17. 음악저널 1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