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그리고 포레
가을, 그리고 포레
안 재 휘
끝이 없을 것 같던 무더위도 이제 한풀 꺾였다. 수십 번을 맞이한 계절이지만 그 계절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에는 다가오는 계절의 느낌을 실감하지 못한다. 특히 이렇게 갑자기 쌀쌀해지는 기상일 때는 그 변화의 놀라움이 더하다.
그래서 공자가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 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 추운 겨울이 되서야 소나무, 잣나무의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라 한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적나라하게 지적한 탁월한 비유임에 틀림이 없다. 우리는 다가올 앞날의 어려움을 또는 즐거움을 지금 알지 못한다. 더구나 비교적 명백한 추후의 사실도 지금은 실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계절에 대한 감각조차도 실감나게 감지하지 못하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제 곧 엄동의 계절이 멀지 않았으니 이 짧은 가을을 한껏 즐겨야 할 모양이다.
가을에는 역시 브람스가 제 격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만년의 클라리넷 5중주와 함께 2곡의 클라리넷 소나타는 깊은 가을에 듣기에 그만이다. 특히 클라리넷 소나타 Op.120은 자신에 의해 비올라 버전으로 편곡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오늘 포레를 들고 나왔다. 브람스는 가을이 무르익었을 때로 미루어 두고 이번에는 포레를 한 번 들어보자.
가브리엘 포레(1845-1924)는 프랑스 작곡가이다. 흔히 드뷔시나 라벨과 비교되기도 하는데 그 둘보다는 비중이 덜한지는 잘 모르겠다. 드뷔시는 인상주의 음악이라는 분야를 개척하였고 라벨은 보다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였다. 그렇지만 포레는 생상의 제자로서 드뷔시를 가르쳤으며 드뷔시, 라벨로 이어지는 프랑스 음악의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작곡가이다. 즉, 베를리오즈 이후 생상, 프랑크, 비제등의 로맨티시즘에서 드뷔시의 인상주의로 시작되는 프랑스 근,현대 음악의 디딤돌이 되어준 이가 바로 포레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와 독일 문화의 차이란 어떤 것이 있을까. 프랑스적인 것이란 무엇이며 독일적이란 무엇일까.
한때 근대적이란 무엇이고 현대적이란 무엇인가에 공연히 골몰한 적이 있었다. 이런 류의 사고는 문명비판의 영역까지 논의가 확대되어야 답이 나올까 말까할 정도의 광범위한 문제이다. 다만 이런 문제는 개인의 사소한 느낌이나 선입견에 의해서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30년도 넘은 이야기인데 당시 대학 입시를 위한 영어 참고서 중에 무슨 종합영어라고 당시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제목을 말하면 대번에 알 수 있는 책이 있었다. 지금도 그 책이 나오고 있는지 또 그 내용이 아직도 실려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책에 나와 있는 프랑스적인 것에 대한 단편으로 프랑스를 이해하고 말았다. 그 책의 비교적 앞부분의 지문에 영국 사람과 프랑스 사람을 비교하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
내용인 즉, 마차가 언덕길을 굴러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 사람들은 그 순간 왁자지껄 난리가 난다고 한다. 반면 영국 사람들은 그 순간에는 조용하다 못해 냉정을 유지한다고 한다. 그리고는 마차가 떨어져 멈추었을 때 그제 서야 그 상황을 이야기하고 분석하고 법석을 떤다고 한다. 독일 사람과의 비교가 아니라 아쉽지만 일단 프랑스 사람들의 기질은 확보(?)가 되었다.
이 상황에서 독일인들은 어떻게 하였을까. 탈출을 시도하였을까. 당시의 처지를 비관하였을까. 마차의 다른 안전장치를 찾아보았을까. 그런 것은 우리가 잘 알 수는 없지만 프랑스적 기질은 얼추 근접해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한 나라의 문화적 기질을 통짜배기로 매도할 수는 없다. 실제로 그 이후 프랑스 문화를 더 접해 본 느낌은 반드시 이렇지만은 않은 점도 있었다. 이것 역시 깊이 있는 접근은 아니었고 그저 지드, 사르트르, 말로, 레비-스트로스 등의 문학 내지 철학과 함께 인상주의 미술과 프랑스 음악이 전부인 것이 유감스럽다.
나는 한국 연주자들을 사랑한다. 그렇다고 한국 연주자들을 일부러 찾아다니면서 듣는 편은 아니고 비교적 알려진 연주자들에 대해서는 즐겨 듣는다. 윤디 리나 랑랑보다는 임동혁 형제가 좋고 미도리보다는 장영주에게 손이 더 가고 정경화의 연주도 좋아한다. 요즘 독일에서 성가를 한껏 올리고 있는 연광철은 아직 제대로는 듣지 못했다.
이중에서 뺄 수 없는 연주가로 백건우가 있다. 수년전 지방 연주회에서 연주가 끝나고 구입한 그의 CD에 일일이 사인을 해 주며 가당치도 않은 나의 찬사에 수줍은 듯 고마워하는 대가의 겸손함과 진중함이 잊혀 지지 않는다.
그런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에 포레 연주가 있다. 베토벤 소나타 연주와 녹음 전집도 좋지만 이 포레 연주야말로 백건우의 백미가 아닌가 생각한다. 내가 가진 음반들 중에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사랑하는 음반이다. 물론 전설적인 제르망 티생-발랑탱이 있고 이본느 르페브르도 있다. 사람들마다 좋아하는 연주가 있겠지만 나는 이 연주음반이 너무나 좋다. 연주도 연주거니와 곡 구성이 이렇게 멋지게 놓여 진 음반을 그리 흔히 보지 못하였다.
무언가(3 Romance sans paroles : 가사가 없는 로망스) Op.17 no.3 을 시작으로 즉흥곡, 바카롤 다시 Op.17의 no.1 그리고 전주곡, 발라드 사이사이에 녹턴을 배치한 구성이다.
우리는 대개 포레 음악을 이야기할 때 그 유명한 피에 예수(Pie Jesu)가 들어있는 레퀴엠이나 꿈꾼 후에(Apres un reve) 등이 생각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첼로를 매우 사랑한 사람이다. 첼로 소나타 두곡과 함께 엘레지 Op.13, 로망스 Op.69, 나비 Op.77, 시실리안 Op.78 등 매우 많은 첼로 소품들을 작곡하였다. 또한 실내악곡이나 오케스트라곡에서도 첼로의 비중을 매우 높게 설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피아노곡이야말로 또 다른 포레의 진면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들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 중에 피아노가 들어가지 않은 것은 현악사중주 한 곡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그의 피아노곡은 그의 음악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점점 짧아지기만 하는 낮의 길이, 그만치 사색도 깊어 가는 이 가을에 포레와 백건우를 곁에 두자. 그 둘의 밀어처럼 무언가 Op.17-3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포레는 ‘예술은 특히 음악은 가능한 실재 그 너머로 멀리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복잡한 현실을 뒤로 하고 옛 추억 속으로 아니면 나의 깊숙한 내면으로 멀리멀리 나를 이끌고 들어간다.
이어서 꿈결처럼 슈만과 드뷔시 사이로, 쇼팽과 라벨 사이로 녹턴들이 스물 스물 그 감수성을 서늘한 공간에 채워온다.
어느 샹송의 가사에 ‘나는 나의 고독과 함께 있을 때 외롭지 않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제 바야흐로 각자의 고독과 동그마니 마주 앉아 내 고독의 위로를 받아 봄직한 시간이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