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렬하던 태양의 계절도 이제 한풀 꺾이고 서늘한 바람이 가을을 재촉하고 있다.
이맘때면 우린 대구역 뒤편, 침산동 일우(一隅)로 달려간다. 바로 대구국제오페라축제가 열리는 대구 오페라하우스가 그곳이다.
우리는 왜 음악을 듣고, 또 그것에 열광하게 되는 것인가. 포레(Gabriel Faure)의 말이 그것의 한 단초(端初)를 제공하고 있는 듯도 하다. 즉, ‘예술은, 특히 음악은 가능한 실재 그 너머로 멀리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 생활이 팍팍해 질수록, 또 나이를 더 먹어 갈수록 생활 너머의 그 어떤 것을 꿈꾸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건 현실도피와는 또 다른 나만의 꿈의 세계에로의 여행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나는 꿈을 꾸었다. 어린 시절 들은 천일야화의 꿈이 세헤라자데의 선율을 타고 명멸하기도 하고, ‘떡하나 주면 안잡아 먹지’나 스무고개 류의 골목놀이의 흑백 스틸 컷도 낡은 슬라이드 화면으로 지나간다.
그렇다. 오페라는 역시 꿈의,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유영케 하는 제식이고 오페라 가수는 바로 그것을 가능케 하는 샤먼(Shaman)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기꺼이 이 제전에 초대된 - 초대되었다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마력에 이끌려 나온 - 신도들이다.
이번 2014 대구국제오페라축제에서 공연되는 5편의 메인공연 중 첫 번째 오페라 투란도트(Turandot)는 10월 2일(목)부터 3일간 3회 공연된다. 나는 그 중에서 두 번째 공연인 금요일 공연을 관람하였다. 첫날의 이화영, 김재형, 이재은 선생 조나 토요일의 김라희, 최덕술, 이재은 선생 조도 궁금하기 짝이 없었지만 역시 팍팍한 생활 속에서 3회 공연을 다 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는 사실 이런 환상의 세계에 가까운 오페라를 선호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의 전작을 보면 마농레스코,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서부의 아가씨, 일 트리티코와 같이 주로 현실의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베리스모(Verismo)운동의 한 가운데에 있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초기작 요정 빌리가 비교적 비현실의 세계를 보여 주기도 하지만 전체 줄거리는 역시 실재의 생활 공간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어쨌든 그는 초기작 이후, 만년에 이르러 다시 이런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오페라를 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그도 포레처럼, 또 나처럼 가능한 실재 너머로 멀리 가고 싶었던 탓이었을까.
아무튼 미완성인 채로 그의 유작이 되어 버린 이 오페라가 우리를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중국’으로, 결코 현실적일 수 없는 수수께끼와 죽임 이야기로, 납득할 수 없는 칼라프(Calaf)의 사랑으로 우리를 멀고 먼 환상의 세계로 데려 가고 있다.
공연장은 이미 만원사례이다. 공연장 밖에 마련된 오페라 정보나 분장 부스 그리고 사진촬영 세트에서는 관객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축제를 즐기고들 있었다.
이윽고 공연을 알리는 공(gong)이 두 번 울리고 환상의 무대가 열렸다. 작은 무대를 효과적으로 꾸민 무대가 우선 인상적이다. 2막 이후의 무대는 더욱 아름답다. 팔작 지붕 윤곽 만을, 원근을 주어 크고 작게 배치한 것과 그 앞쪽으로 계단을 설치하여 때로는 Altoum황제의 보좌를 배치시키기도 하고 만다린를 위치시키기도 하고 Turandot공주를 세우기도 한다. 그 뒤로는 예의 그 지붕들이 점점히 구중궁궐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 여간 아름답지가 않다. 이 오페라의 무대는 매우 화려하고 장대하게 장식하는 것이 통례이고 분위기도 이국적으로 연출하는데, 이번 Turandot는 코스튬을 포함해서 무채색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무대였다. 즉, 서양 사람들이 연출하는 동양 분위기 또는 의상은 우리가 보기에는 동양적이라기보다는 동양식 전설적인 분위기로 보여 지는데, 이번 무대는 마치 우리 창작사극 오페라를 보는 듯 친숙한 무대였다. 이런 것이 아마도 우리 오페라연출의 세계화에 긍정적 신호가 될 듯도 하여 반갑기 짝이 없다. 연출의 정선영 선생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녀는 분명 세계적으로도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역량이 있어 보인다.
브리기트 닐손도 없었다. 에바 마르톤도, 마리아 굴레기나도, 레오나 미첼도, 스코토도, 카바예도 없었다. 프랑코 코렐리도, 도밍고도, 파바로티도 없었다.
그러나 이 프로덕션이 우리를 환상의 세계로 보내 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던가.
테너의 불안했던 고음, 공주가 처음에 다소 긴장을 했던, 오케스트라와의 호흡이 좀 안 맞는 부분이 있었던 그런 것들은 이미 우리의 행로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이병삼 선생은 이미 몇차례 들어본 터였지만 김보경, 여지원 선생은 처음이었다. 카라프왕자와 류의 노래는 공연장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투란도트 공주와 카라프 왕자의 이중창 ‘죽음과 같은 공주여! 얼음과 같은 공주여!(Principessa di morte! Principessa di gelo!)와 이후 공주의 아리아 ‘처음 흘려보는 눈물(Del primo pianto)' 의 절창은 전반에 다소 부족했다 할수도 있는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카리스마를 상쇄해 주고도 남았다. 이 날의 일등 공신은 견마지로를 다하고 끝까지 지치지 않았던 이병삼을 제외한다면 연출 정선영과 여지원이다.
오페라는 끝나고 모두들 흩어져 갔다. 아직도 한 무리는 백스테이지 투어를 기다리고 있다.
집으로 돌아 가는 차 안에서 내 귓가에 계속해서 울리는 멜로디가 있다. 그건 아리아도 아니고 합창으로 반복되어 울렸던 만세 소리의 선율 같았다. 이내 고개를 젓고 '얼음장같은 공주님의 마음도(Tu che di gel sei cinta)'를 떠올린다.
우리들 마음이 세상 때문에 닫혀져 있고, 얼어 있지만 그 속엔 얼음장 아래에 맑은 시냇물이 흐르듯 사랑의 온기가 잠자고 있지 않은가. 활연(豁然) 깨어나 그 온기로 이 세상이 가득할 때를 그려본다.
그의 이름은......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