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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고품질 진공관 제조로 오디오 애호가들에게 알려진 체코의 KR Audio는 1990년도부터 자사의 진공관을 바탕으로 한 앰프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크론질라 SX 파워앰프는 그 동안 진공관 제조와 앰프설계로 쌓은 KR Audio의 노하우를 집대성한 작품으로 자체적으로 개발한 3극관 T1610과 이에 맞는 독특한 회로를 적용한 것이 특징이다. 크론질라의 실물을 접했을 때, 진공관의 크기가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느낌을 받았다. 출력 트랜스와 방열판, 진공관 보호 날개, 그리고 후면의 각종 단자들을 보면 만듦새에 관해서는 별 걱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상당한 빌드 퀄리티다. 하긴, 1,600여 만원짜리 파워 앰프의 만듦새가 허섭해서야 되겠느냐마는, 어쨌든 잘 만들어진 물건을 보면 느껴지는 감탄과 희열(?) 비슷한 게 가슴을 채워서 왠지 뿌듯하다.

채널당 출력관을 1개씩 써서 50와트의 출력을 낸다는데, 우리에게 친숙한 출력관이 아니고 자체 개발한 T1610 3극관이라고 해서 몹시 궁금했다. EL34나 KT88, 혹은 6550 등의 5극관과는 분명 방향이 다를 것이고, 300B나 2A3같은 3극관과도 규모나 힘에 있어서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KR Audio의 최신기술로 개발된 T1610 진공관은 3극관 고유의 매력을 간직하면서 3극관의 단점인 저출력을 극복한 것이 특징이며, 대폭 증대된 수명 또한 장점이다. 과연 어떤 소리일까? 지난번 3극관 앰프 특집 때 들었던 소리들과는 어떻게 다를까? 큰 기대감을 가지고 시청에 임했다.

린데만을 프리 겸 씨디피로 활용하고, 스피커는 베리티 오디오의 파르지팔 오베이션을 연결했다. 베리티 오디오의 스피커가 리뷰용으로 준비된 것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이런 종류의 앰프 리뷰에 딱 들어맞는 조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이 집의 스피커들은 그야말로 적절(!)한 구동력과 음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주 황당한 재생음을 내어주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수차례 경험한 일인데, 힘없는 앰프를 물리면 그야말로 우퍼를 제대로 구동하지 못해 비실거리고 벙벙거린다. 그게 싫어서 센 놈을 물리면 음악적인 뉘앙스가 다 죽어버린 처참하고 황당한 무기질적인 소리를 내어준다. 그야말로 음색과 구동력 모두가 평균점 이상을 받아야 득점에 성공할 수 있는 스피커다. 잘 걸렸다!

우선 여성 재즈 보컬곡들을 울려 보았다. 프리미엄 레코드에서 나온 "베스트 오디오파일 보이시스" CD를 걸었다. 오호! 프리앰프 없이 직결했음에도 불구하고(물론 린데만 씨디피의 프리부가 훌륭한 편이긴 하다), 음악적인 뉘앙스가 하나도 소실되지 않은 아주 충실한 소리가 나온다. 한마디로 이거다. “뭘 더 바래?” 보컬은 3극관 특유의 투명함에 빛나고, 피아노는 타건의 낭랑함과 온도감을 동시에 표현해준다. 베이스의 울림은 아주 자연스럽고, 깊이감의 표현 또한 훌륭하다. 포커싱은 정확하지만 부자연스럽게 티를 내는 법이 없다. 특히 그 음색의 아름다움이란! 모든 것을 잊고 푹신한 소파에 잠겨 음악에 빠져들고 싶은 것이다. 파르지팔 오베이션과의 매칭은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명색이 오디오파일 아닌가. 심술궂은 마음이 발동한다. 핑크 플로이드의 을 걸었다. 역시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은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알(?)이 커도 3극관 싱글의 한계일 것이다. 그러나 ‘Speak To Me’에서의 심장 박동 소리, ‘Time’에서의 시계 타종소리의 디테일과 공기감의 표현, ‘Great Gig In The Sky’에서 그 블루지한 백킹 보컬의 파워와 뻗침. 전체적인 스피드도 적당하고, 리듬&페이스도 적당하다. 특히 음의 분해 능력이 상당한 느낌이다. 엄청나다는 느낌은 절대 들지 않지만, 매우 안정적이고 차분하게 음악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도널드 페이건의 ‘I.G.Y’를 들어보면 리듬감과 그루브가 아주 경쾌하다. 에밀루 해리스의 목소리에서는 애잔함이 배어 나오고, 캐롤 키드의 경우 원숙미와 경륜이 돋보인다. 다른 건 몰라도 목소리 표현만큼은 정말 좋다. 온도감을 잃지 않는 투명함, 뻗침을 잃지 않는 두께, 적절한 크기의 음상이면서도 풀 바디를 놓치지 않는 몸체 표현…. 대개의 진공관 앰프가 그렇듯이 고역은 닫힌 듯 둥글려져 있지만 사실은 열려 있으며, 현과 바이올린의 음색은 일견 수수한 듯하지만 음 끝에 요염함을 실어 나른다.

대편성의 경우 워낙 악기수가 늘어나고 힘을 필요로 하는 장르인지라 좀 걱정스럽긴 했다. 출력은 채널당 50와트로 3극관 싱글로는 상당한 출력이긴 하지만, 대출력 파워 앰프에 비한다면 스케일이나 저역 구동력에 일견 의심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찬찬히 들어보면 무대 표현이나 저역의 깊이감에서 손색이 없는 소리를 들려준다. 총주시에도 무게감이 약간 떨어진다는 단점 외에는 구동력이나 깊이감에서 전혀 아쉽지 않았다. 물론 파르지팔과의 매칭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지금 듣고 있는 게 오디오리서치나 안티크사운드랩의 허리케인이 아님은 분명하니까…. 변강쇠는 아니지만 1,600만원의 가격이 수긍되는 퀄리티다.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드보르작의 교향곡, 신세계 교향곡, 스트레스 없이 술술 넘어간다.

자, 정리해보자.
연주회장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무지막지하게 딴딴한 돌덩어리 저역과 현미경으로 부자연스러우리만치 확대된 음상 크기와 디테일에 집착하시는 분이라면 관심을 두지 마시라. 그러나 음악을 음악 자체로 마주하고자 하는 분께는 일청을 권한다. 놓치기 아까운 좋은 파워 앰프이다. 하늘거리는 투명한 고역, 따뜻하게 다가오는 중역, 차분하되 심지를 잃지 않는 저역. 훌륭한 분해 능력을 바탕으로 차분하고 안정적인 무대를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음색이 아름답다. 인간의 목소리, 현의 질감, 관의 매끄러움…. 우리가 진공관에서 바라는 대부분의 것들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이석용